한편, 부진한 로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한 남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화면설명: 피터슈라이어 “아주 안 좋아 보이네요.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로체가 밋밋한 존재감으로 낮은 판매량을 이어가던 사이 고민에 빠진 기아차는 좀 더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 나섰고, 기술 공유라는 이점을 취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바로 “디자인”에 몰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아차 편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분도 그 때 영입된 파격적인 외부 인사였죠. (자막 : 피터슈라이어)
2008년 출시된 2차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로체 이노베이션은 기아차의 디자인 경영이 옳은 방향임을 깨닫게 해준 모델이었습니다. 호랑이의 얼굴을 형상화 했다는 전면부는 이후 기아차 패밀리룩으로 자리 잡은 일명, 호랑이 코 그릴을 중심으로 라인을 따라 헤드램프를 자연스럽게 배치해 전작의 순둥한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날렵한 인상으로 거듭났습니다. 또 중형차 중 전장이 가장 짧았던 전작에 비해 길이를 55mm 가까이 늘리면서 쏘나타보다 길어졌고, 일자로 쭉 뻗은 캐릭터 라인은 직선이 강조된 달라진 얼굴과 더 잘 어울렸죠. 휠 디자인도 더욱 스포티하게 바꿨고요. 리어램프 형상을 살짝 손 봐 무게감을 덜어낸 후면부도 날렵해진 전면부와 조화를 이뤘습니다.
전체적으로 피터 슈라이어가 내세운 직선의 단순미가 돋보였고, 이름 그대로 진보를 넘어 혁신적으로 바뀐 것은 분명했어요. 또 이후 등장한 K5의 예고편이 되기도 했죠. 외관에 비하면 실내의 변화 폭은 크지 않았지만, 계기판과 인포테인먼트, 기어 레버 등 탑승객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하는 부분을 개선해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했습니다. 기아차의 브랜드 컬러로 자리 잡은 붉은색 조명은 아우디를 연상케 했고, 고리타분한 우드 그레인을 버리고, 고광택 패널과 메탈 그레인 장식으로 꾸며, 동일한 레이아웃을 쓰면서도 분위기는 훨씬 스포티하고 젊어졌습니다. 블랙 하이그로시에 대한 기아차의 사랑도 이때부터 시작됐어요.
스포티한 느낌의 3 실린더 계기판은 주행 환경에 따라 초록, 하양, 빨간색으로 변하는 에코 경고등을 통해 운전자의 경제 운전을 유도하는 에코 드라이빙 램프를 내장했고, 국산 중형차 최초로 버튼 시동 스마트키, 패들 시프트, 하이패스 룸미러를 추가하는 등 구성 면에서 쏘나타 못지 않거나 오히려 앞서기도 했습니다. 역시 뭘 하려면 힘이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또 블루투스 오디오, 부담스러운 가격과 부실한 성능으로 빈축을 샀던 기존의 DVD 내비게이션 대신, 저렴한 액츄얼 DMB 내비게이션을 새롭게 선보여 편의성이 큰 폭으로 개선됐죠.
다만, 눈에 띌 정도로 곳곳이 원가 절감되면서 차급에 기대하는 고급감은 오히려 떨어진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딱딱한 플라스틱 소재가 도드라져서 감성 품질은 오히려 전작만 못 했고, 폭넓게 적용된 하이그로시는 보기에는 좋았지만 지문과 먼지 등 오염에 취약했죠. 특히 잔기스가… 최대 5단계를 지원했던 열선 시트도 선택지를 쿨하게 없애버렸습니다. 파워트레인에도 변화가 있었는데요. 판매가 부진했던 종전의 1.8L 가솔린과 디젤 엔진은 정리했고, 쏘나타 트랜스폼과 발을 맞춰 업그레이드된 세타II 가솔린 엔진을 탑재해 출력과 연비를 개선했습니다. 빠릿한 페달 반응은 여전했지만, 이전 모델에서 승차감에 대한 지적이 있어서인지 스티어링 기어비와 서스펜션을 느슨하게 세팅했습니다.
덕분에 스포티해진 외관과는 반대로 승차감은 한결 느긋해졌고, 뒷좌석에 가족이나 손님을 모시는 중형 세단의 역할에 좀 더 충실해졌죠. 쏘나타보다 연비가 소폭 우세한 것도 여전했고, 특유의 부실한 방음 대책도 여전했습니다. 이후 2009년에는 연식 변경을 통해 북미형의 블랙 베젤 헤드램프와 격자형 라디에이터 그릴, 새로운 디자인의 알루미늄 휠로 외관을 스포티하게 꾸민 연식 변경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특히, 주력인 2.0L 가솔린 모델에도 듀얼 머플러를 적용해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심지어 하나의 머플러에서 두 개의 배기구를 나누는 패션 듀얼 머플러가 아닌 2.4L 모델의 것과 동일한 양갈래 듀얼 머플러였죠.
스타 파이터 추성훈을 모델로, 귀를 이끄는 음악과 세련된 분위기의 광고로 시선을 사로잡은 로체 이노베이션은 ‘스타일이 힘이다.’ 라는 슬로건처럼 변화된 스타일이 좋은 반응을 얻어 전작에 비해 판매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경쟁 모델인 쏘나타가 신형으로 거듭난 와중에도 매월 평균 4천 대 가량 팔리며 준수한 성적을 이어갔죠. 전작을 그저 쏘나타의 마이너 버전으로 보이게 만드는데 힘을 보탰던 저렴한 가격은 이 모델에서 다행히 순기능으로 작용해 로체를 가성비 좋은 중형차로 돋보일 수 있게 했습니다. 여전히 영업용 수요가 많았지만, 자가용 수요도 크게 늘었죠. 덕분에 중고차 시장에서도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고, 사회 초년생들의 무난하게 탈 수 있는 중형차로 최근까지 사랑받았습니다.
국내 최고 베스트셀러의 형제 모델답게 정비 편의성도 최고 수준이죠. 이 밖에 나이가 들면서 프론트 케이스에서 엔진오일이 새어 나오거나 어느 날부터 기어박스 쪽에서 간헐적으로 ‘틱, 틱, 틱’ 하는 소음이 발생하는 쉬프트 락 솔레노이드 잡소리 등의 고질병이 있고, 개선형 세타II 엔진이 장착된 일부 모델은 엔진 피스톤 내벽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이슈를 공유하고 있으니, 중고차 구매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여담으로 앞서 K7 편에서 언급된 인기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후반부에 K7이 주목받았다면, 전반부 유럽 로케이션 장면에서는 예서 아버님의 차량으로 로체 이노베이션, 현지명 마젠티스가 멋지게 활약하기도 했죠.
말이 나온 김에 알아보는 해외시장 성적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옵티마라는 이름을 그대로 이었고, 한 해 평균 4만 대 가량이 판매됐죠. 국내 판매량과 큰 차이 없는 무난한 판매량이었지만, NF를 선보인 이후 판매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쏘나타에 비하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좀 서운한 수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전작의 이름인 마젠티스를 계승했는데, 이 쪽은 더 처참했죠. 평가 역시 국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뚜렷한 개성이 없는 중형 세단으로 평가받았고, 해외 소비자들 역시 이왕이면 웃돈을 주고 중고차 가격이 보장되는 경쟁차들을 구매했죠.
지금까지 기아차의 중형 세단 로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출시 초에 밋밋한 디자인과 상품성 준중형 플랫폼을 썼다는 오명으로 기대 이하라는 반응 속에 출발했지만 다행히 슈라이어 라인으로 개성을 찾는데 성공, 지금도 많은 소비자들의 러닝 메이트가 되어주고 있죠. 비록 역대급 후속인 K5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 로체라는 이름은 아쉽게 사라지게 됐지만, 단종 직전까지 기아차 라인업의 중추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역시 어떤 것이든 나만의 개성을 갖고 있을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한편 올해 K5의 페이스리프트가 예정돼 있다는 소식이 벌써 들려오는데, K5는 아직 너무 새 차 아닌가요? 기아차가 시기를 앞당긴 걸까요? 아니면 시간이 빨리 가는 걸까요? 돈은 왜 계속 없을까요? 다음에도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사소하지만 궁금한 자동차 이야기 멜론 머스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