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3 정성왕후 서 씨]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 씨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재임 기간이 가장 긴 왕비로 33년간 내명부의 수장으로 있게 됩니다. 대구 서 씨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2살 때 두 살 어린 연잉군(영조)과 혼인을 하고 달성군 부인으로 봉해집니다.
하지만 행복해야 할 그 순간 그녀는 연잉군에게 소박을 맞게 됩니다. 혼인 첫날밤 연잉군이 그녀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곱냐고 물어보자 고생을 안 한 덕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 그리하였다고 대답하니 연잉군은 신분이 미천했던 생모 숙빈 최 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연잉군과 결혼할 당시 그녀의 친정은 그리 명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정성왕후 아버지는 소과에 합격하지만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한 진사였고 할아버지 또한 큰 차이가 없었기에 야사로 전해지는 첫날 밤의 일화가 사실이라면 연잉군은 대단한 집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큰 콤플렉스를 느낀 것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극도로 불안 한 정신세계를 가졌던 남편을 만나 험난한 세월을 보내다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제빈이 되었고 1724년 경종이 승하하고 남편이 보위에 오르자 왕비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 32세였습니다. 하지만 왕비가 되었다고 그녀에 대한 남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신은 경희궁에 머물렀으며 형식적인 자리를 빼고는 거의 정성왕후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일국의 왕비로 세상의 관심 속에 살았지만 죽는 날까지 고독했습니다. 하지만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정성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왕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됩니다.
또한 자식이 없던 그녀는 영조의 후궁 정빈 이 씨의 소생인 효장세자와 영빈 이 씨의 소생인 사도세자를 차례로 양자로 받아들여 친아들처럼 아꼈습니다. 특히 영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도세자를 무척이나 아껴 둘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한편 붕당의 소용돌이에서 사도세자를 지키기 위한 버팀목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왕실에 중재자가 없어지게 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아들이 아버지한테 죽게 되는 참극인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성왕후에 대한 영조의 무관심은 그녀의 환갑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1752년(영조 28년) 왕비가 환갑을 맞이했지만 당시 영조는 대왕대비 인원왕후와 대립하며 전위 소동을 일으키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왕비의 회갑연을 거듭 청했지만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정성왕후는 인생의 가장 큰 경축일인 환갑을 맞이했지만 영조의 무관심 속에 아무런 행사 없이 그냥 넘어갔으며 대신 온 나라가 떠들썩한 전위 파동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1757년(영조 33년) 정성왕후는 큰 중병에 들게 됩니다. 그 당시 왕비의 병이 몹시 위중했는데 남편 영조는 아내의 병세를 듣고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비로소 중궁전으로 찾아오지만 영조는 정성왕후를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게 됩니다.
당시 사도세자는 친어머니처럼 따랐던 그녀의 병수발을 하느라 옷차림을 돌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정성왕후는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곧바로 장례절차를 진행해야 했지만 공교롭게도 영조가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죽게 되면서 영조는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한 뒤 딸을 위로하기 위해 부마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얻지 못한 비운의 왕비였습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 숙종이 있는 명릉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그녀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게 됩니다. 하지만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는 당시 왕대비였던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게 됩니다. 결국 그녀의 능인 홍릉은 옆자리가 비워진 채 지금까지 홀로 남겨지게 되었으며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워진 능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TOP2 단경왕후 신 씨]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후(1487년~1557년) 신 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한 씨의 딸로 조선시대 역대 왕비 중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비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집안 거창 신 씨는 성종과 연산군 대에 권력을 쥐고 있던 최고의 명문가로, 할아버지 신승선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장인이었으며 고모는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 씨였습니다.
또한 아버지 신수근은 좌의정에 연산군의 처남, 작은아버지 둘은 모두 형조 판서를 역임했으며 작은어머니가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일 정도로 그녀는 조선의 역대 왕후들을 통틀어도 보기 드문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의 단경왕후는 13세의 나이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혼례를 올려 부부인에 오르게 되고 7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상한 무리가 진성대군과 신 씨의 집을 포위하게 됩니다. 진성대군은 이복형 연산군이 폭정을 거듭하자 언제나 그 칼끝이 자기를 향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집을 포위하자 그는 잔뜩 겁을 먹게 됩니다. 대군이 죽음을 떠올리며 자결을 생각할 때쯤 부인 신 씨는 냉철하게 바깥 상황을 살펴보게 됩니다. 이에 집을 에워싼 말들이 바깥쪽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말머리가 집 쪽으로 향해 있으면 위험할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이 말머리가 밖으로 향해있으면 우리를 보호해 주려는 것”이라며 남편을 진정시킵니다.
19세의 젊은 부인 신 씨는 현명하고 강단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날이 밝자 병사들은 진성대군을 궁으로 모셔갔고 그는 곧바로 보위에 오르며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이 됩니다. 때는 연산군 12년(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대신들은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폐위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결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가 주도하여 ‘왕’을 몰아낸 중종반정이었습니다.
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은 보안을 이유로 진성대군에게는 알리지 않고 대군의 어머니인 왕대비 정현왕후(자순대비)에게 아들을 왕위에 세울 것을 허락받은 후 다음 대의 왕으로 정해진 그를 보호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반정이 일어나기 얼마 전 핵심 인물인 박원종 등은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에 그 어느 편이 더 중하냐”라고 물어보게 됩니다. 신수근이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임금(연산군)이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라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에 반정 세력들은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를 제외하고 반정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그때 “딸의 편에 서겠다”라고 그들을 지지했더라면 아마 그의 딸은 왕비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반정이 일어나면서 신수근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가담 여부를 묻는 반정 세력들을 왕에게 고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연산군 대에 좌의정에 오르고 왕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신수근을 가장 먼저 죽이게 됩니다. 이렇게 반정이 성공하면서 연산군의 부인인 신수근의 누이는 왕의 폐위와 함께 자동으로 폐비가 되어 유배를 가게 되지만 중종의 부인이지만 신수근의 딸이었던 단경왕후가 문제가 됩니다. 반정 세력들은 훗날 중종이 왕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권력을 쥐게 되면 왕비 신 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정공신인 박원종을 비롯한 무리는 중종에게 왕비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그 당시에 힘이 없었던 중종은 어떻게 조강지처를 버리냐고 항변을 했지만 죄인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반정 세력의 강압적인 주장을 거부할 수 없어 단경왕후는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비가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신 씨는 남편을 위해 “어느 자리에 있어도 무방하다”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그녀는 친정이 화를 당하고 남편 중종과 강제 이혼을 당하면서 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됩니다.
여기서 일부 역사가들은 단경왕후는 단 하루도 왕비였던 적이 없으며 추존 왕비에 불과하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정식으로 왕비가 되려면 책봉식을 치러야 하는데 단경왕후는 반정 당일 바로 중종과 강제 별거 되었기에 7일이란 기간은 그녀가 왕비로 지낸 시간이 아니라 중종이 아내를 내치지 않으려고 버틴 시간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1506년 9월 9일 단경왕후가 초저녁에 궁을 떠나자 다음 날 예조에서는 서둘러 새 중전 간택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에 중종도 순순히 책봉을 허락하면서 곧바로 계비인 장경왕후가 왕비에 오르게 됩니다. 야사에 의하면 중종은 단경왕후가 보고 싶으면 궁궐의 누각에 올라 그녀의 사가가 있는 인왕산 동쪽을 바라봤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 씨는 인왕산에 있는 바위에 자신이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고 중종은 그 치마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집니다.
이 바위가 바로 인왕산의 치마바위로 평생토록 단경왕후는 인왕산에 올라가 궁궐을 내려다보며 남편을 한없이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이후 남편인 중종이 임종 직전에 그녀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기록에는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 반정을 도모하고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한 이들이 죽은 후 계비로 들어온 장경왕후 윤 씨가 9년 만에 원자(인종)를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죽게 되자 단경왕후를 다시 왕실로 불러들이자는 여론이 형성됩니다. 당시 훈구세력이 약해지고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세력이 강해질 시기였기에 단경왕후의 복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중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녀가 복위한다는 것은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일이었고 신 씨가 복위해 왕자를 낳으면 후계 구도가 복잡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중종의 사랑은 변한 것입니다. 당시 중종은 단경왕후가 폐비가 된 후 새로운 부인인 장경왕후와 많은 후궁(10명)을 두었다고 합니다. 결국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는 없던 일로 되고 세 번째 왕비로 그 유명한 문정왕후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새로운 왕비는 왕의 사랑과 후계를 두고 경빈박씨를 비롯한 후궁들과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됩니다. 단경왕후가 폐비가 된 후 어떻게 살았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후 그녀가 거처하는 곳을 폐비궁이라고 부르고 생활에 보조를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단경왕후는 1557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왕실에서는 장례를 왕후 시부모의 예에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이등례로 초상을 치러주게 됩니다.
그 후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 씨 혹은 신비로 불리다가 영조대인 1739년(영조 15년) 신하들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하게 되면서 단경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이라는 존호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과 생이별을 한지 200여 년 가까이 지난 후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