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가, 어느 민족,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지배받지 않기 위해 지배해야 했고,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사는 역사로 남아 현재 국가를 만들어 냈는데요.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를 통해 현재의 한민족의 개념이 견고해졌고,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중원 통일이라는 과업을 달성하면서 현재 중국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요? 통일 일본의 역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현재 일본의 근간을 닦은 인물이자, 일본 역사 최고의 영웅 중 하나로 불리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인물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일본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둔 그는 열도 곳곳에서 일자리를 잃고 실직자가 된 수십만의 사무라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하나가 싸움의 달인이었던 이 사무라이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을 염려한 그는 즉각 거대한 명분을 제시합니다.
명나라를 정벌하자는 것인데요. 다만 명나라를 정벌하려면 그 중간에 있는 조선을 먼저 정벌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무라이를 조선으로 보냅니다. 임진왜란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한국의 경우, 임진왜란을 통해 성웅 이순신을 포함한 대단한 영웅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치욕의 역사이자 굴욕의 역사입니다.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세계 정벌을 꿈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영웅의 탄생을 알렸지만, 그를 영웅으로 받드는 일본인들은 굳이 그가 시작한 임진왜란을 깊이 파고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명나라 정벌이라는 거대한 명분 때문이 아니라 조선에서 굴러다니는 ‘개밥그릇’ 몇 개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임진왜란을 시작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본 국보 제26호는 ‘기자에몬 이도’라는 높이 9.1cm, 지름 15.3cm, 무게 370g에 불과한 찻잔입니다. 그런데 일본 교토의 대덕사가 소유한 이 찻잔에는 ‘천하 대명물 찻사발’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 조선에서 만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릇의 용도도 정확히 몰라 그냥 막 쓰는 그릇이라는 뜻을 가진 막사발로 불린다는 점인데요. 도대체 용도도 정확히 모르는 이 막사발은 어쩌다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된 것일까요?
제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사고라도 칠라치면 ‘에비!’ 하며 저를 멈춰 세우셨습니다. 이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인데 이 말의 유래가 임진왜란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이비야’의 줄임말인데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간 야만적인 일본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사무라이들에게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오면 그 양에 따라 조선 땅을 분배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실제 사무라이들은 이 짓을 저질렀습니다. 일본 교토에 가면 이 ‘에비’의 실제 증거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비총, 즉 귀와 코를 묻어둔 무덤, 이른바 귀 무덤 또는 코 무덤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군의관이었던 승려 경념은 전쟁을 직접 목격하고 쓴 ‘조선일일기’라는 종군 기록에서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 것은 없다. 일본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고을마다 가득했다. 조선 사람은 어린이부터 부녀자까지 코를 잘라 대바구니에 담았고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라고 남겼습니다.
서울대 인류학 전경수 명예교수는 ‘일본의 사료 등을 검토한 결과 베어져 묻힌 코의 수는 56,476개로 추정된다. 왜장 1명당 평균 6,275명의 조선인 코를 베었다는 것인데, 이 숫자의 3배가 넘는 왜장들이 돌격부대장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베어간 조선인 코의 숫자는 드러난 숫자의 3배인 20만 개로 생각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적게는 5만 개, 많게는 20만 개가 넘는 이러한 무덤은 알려진 것만 후쿠오카 1곳, 대마도 1곳, 오카야마 2곳, 교토 1곳 등 총 5곳에 이르는데요. 그런데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비단 조선인의 코와 귀 말고도 더 있는데 바로 조선의 기술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기술자 중 특히 손재주가 있는 이들을 일본으로 데려오도록 했는데 그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던 기술자가 사기장, 즉 도공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임진년의 왜구가 일으킨 난’이라는 의미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도자기 전쟁’, 서양에서는 ‘Ceramic War’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도자기가 무엇이길래 조선이 이토록 고통받아야 했을까요?
현재 한국에서도 말차를 파는 카페가 꽤 많이 있는데 말차는 말로 만든 차가 아니라 녹차를 가루 내 물에 타 먹는 차, 즉 분말차를 의미합니다. 이 말차를 마시는 법과 문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들이 바로 다인들인데 이 말차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찻잔을 받치는 찻사발입니다.
일본에서 다도 문화는 16세기경 센리큐 또는 센노리큐라는 스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센리큐는 조용히 침묵에 잠겨 차를 마시는 것으로 자신을 수행했습니다. 평생 살상과는 거리가 먼 스님이 조용히 침묵에 잠겨 쓸쓸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이 다인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이때부터 화려함을 버리고 투박하고 거친 조선의 찻사발을 찾기 시작하는데요.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화가 바로 센리큐가 정립한 다도 문화의 핵심입니다. 물론 일본도 이러한 도자기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과 중국의 기술에 비하면 비천했기 때문에 내세울 만한 것이 되지 못했죠. 초창기 일본에서는 흑갈색의 유약을 바른 화려한 중국제 흑유다완을 차 전용 사발로 사용했었지만 센리큐의 등장 이후 투박하고 거칠며 위에서 내려봤을 때 우물 모양을 닮은 조선제 막사발인 이도다완으로 선회했습니다.
위에서 잠시 등장한 일본의 국보 제26호 기자에몬 이도는 일본의 국보이지만 조선에서 만든 찻사발인데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센리큐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소문도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사무라이가 조선에서 훔쳐 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정확한 이동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자에몬이라는 오사카의 상인이 소유했던 찻사발이라는 의미로 기자에몬 이도라는 이름이 붙었죠. 그런데 한창때 조선제 막사발은 사무라이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기도 했고, 오사카의 성 한 채 값을 지불해도 살 수 없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런 인기는 전국시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특히 환장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잘 아시다시피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질렀는데 전국시대에 사무라이들에게는 ‘부레이우치’라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으며, 사무라이보다 계급이 낮은 상인이나 농민 등이 무례를 범하면 칼로 목을 내리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즉, 사무라이에게 현재로 치자면 면책특권을 제공한 겁니다. 밥 먹듯 죄를 저지르는 사무라이였지만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기 때문에 늘 자신들은 살인의 업보를 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런 업보를 씻어내는 희생 제사의 형식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든, 도요토미 히데요시든, 도쿠가와 이에야스든, 주기적으로 부하들을 불러 모아 차를 마시는 모임을 했는데 이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혈맹 의식의 역할을 했죠.
그런데 사무라이들이 죽고 못 사는 이 막사발이 조선에서는 그리 인기 있는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흔했기 때문에 대충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거나 때로는 술을 담아 마시기도 하다가 이빨이라도 나가면 개밥그릇으로나 쓰던, 쉽게 말하면 길거리에서 굴러다니기도 하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급 취급을 받고 성 한 채 값을 호가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름다움을 초월한 무심, 꾸미지 않은 자연미,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은 모두 이 막사발에 내려진 평가인데요. 그렇다면 일본에는 도자기 장인들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일본에도 물론 도자기 장인들이 존재했으나 기술력이 부족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명품으로는 청화백자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청화백자는 흰색이지만 살며시 푸른색을 띠기도 하고 은근히 회색이 감돌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백자는 청자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굽는 온도가 더 높은 것인데 약 1,300~1,350도를 며칠간 유지해야 하죠.
또 유약에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서 백자에서는 티 하나 찾기 어려울 만큼 반들반들합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1,300도까지 올릴 수 있는 가마도 없었고 기술자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전후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터를 잡아 일본의 경제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에서는 유교를 숭상하면서 불교에서 발달한 다도 문화에 대한 관심도 줄었고 멸시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비천한 신분에 불과했지만, 일본에서는 달랐습니다. 막사발 하나로 사무라이 몇 명의 목숨이 오가다 보니 일본 막부와 다이묘의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장인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우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족이라 하여 사무라이와 동급으로 대우해 줬죠. 그렇게 일본에 터를 잡은 도공들은 굳이 조선으로 돌아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겁니다. 일본으로 납치된 도공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 이삼평이라는 인물일 겁니다. 일본에서 그는 도자기의 신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17세기 유럽은 일본의 이마리 자기로 발생한 무역역조로 상당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인 끝에 독일에서 순백의 마이센 자기를 탄생시켰죠. 그들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연구한 이마리 자기는 다름 아닌 임진왜란 때 납치된 이삼평의 후예들이 규슈 현 아리타에서 만든 청화자기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품으로 꼽히는 덴마크 왕실의 푸른 무늬 그릇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보면 이 기술과 맞닿아 있는데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아리타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됐는데 배운 게 도자기 만드는 일인지라 계속해서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리타 동부 지역의 한 채석장에서 하얀 돌덩이를 발견했는데 이를 이용해 백자를 만들어 보니 그 색깔과 품질이 너무 훌륭했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그에게는 카나가에라는 성씨를 하사했습니다. 어쨌든 이로부터 시작된 도자기 제작 기술은 이 마리 도자기까지 이어졌는데 조선의 도공과 일본의 장인 우대 정신이 결합해 완벽히 새로운 도자기로 태어났죠.
이 도자기는 일본에 어마어마한 부를 선물했습니다. 원래 유럽인들은 중국 도자기를 끔찍하게 아꼈는데 전 세계 교역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중국 도자기 산업은 청과 명의 전쟁으로 초토화됐습니다. 도자기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었던 유럽 상인들은 조선에도 기웃거리기는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도자기 산업 역시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 일본입니다.
16~17세기 유럽에서 도자기는 사치품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귀족들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도자기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도자기 무게와 금 무게를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죠.
좋은 도자기는 집 한 채를 살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술이 좋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을 무역 파트너로 선택했는데 졸지에 일본은 당시 현재의 배터리나 반도체와 같은 최첨단 산업인 도자기 산업의 선진국이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도자기 덕분에 다른 물건들의 가치가 덩달아 높아지면서 일제는 고품질이라는 인식이 유럽에 파다했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장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자극했고 이들까지 합세하면서 일본 도자기의 위엄은 상당했습니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도자기가 약 7천만 점이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국부 유출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에서 도공들을 납치하고 그들이 만든 도자기를 유럽에 팔아 부를 축적한 일본, 만약 조선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