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10월 11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는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실렸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니콜이라는 여성은 자신이 폼페이 유물을 훔쳤다는 고백 편지와 함께 타일 2개, 암포라라고 불리는 항아리 등 도자기의 파편 일부를 폼페이의 한 여행사에 보냈다는 것이죠.
폼페이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번화했던 도시로 서기 79년 8월 24일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사라진 바로 그 전설적인 도시입니다. 니콜은 2005년 폼페이 고고학 공원을 방문했다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역사의 조각을 갖고 싶은 욕심에 몰래 유물을 훔쳤는데 그녀에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현재 38살인 그녀는 벌써 유방암에 두 번 걸렸고, 재정적인 문제도 심각했는데 그녀는 ‘내 가족과 아이들에게 이런 저주가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죠. 그러면서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역사의 파편을 갖기를 원했지만, 이 유물들은 파괴의 땅과 관련돼 너무나 많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인간이 우주를 정복하고 있는 2023년에 유물의 저주라는 말이 어색하고 조금 웃기기도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면 설마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실 고대 유적지에 대한 저주는 게임, 영화, 드라마로도 다뤄졌을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데 파라오의 저주, 미라의 저주, 얼음공주의 저주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관광객들이 유물을 훔쳐 갔다가 스스로 반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유물들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비단 외국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1973년 7월 27일 한국에서 작성된 한 유적지 발굴일지에는 ‘날씨 비 온 뒤 맑음. 금관을 들어 올릴 때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모두가 급변한 천기에 무섭고 놀라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금관을 수습해…’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해당 발굴일지가 작성되기 전부터 이 지역에는 30도가 넘는 폭염과 함께 가뭄이 이어졌는데 당시 그 지역에서는 왕릉을 파서 지하의 신라 임금들이 노했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유적지길래 청명하던 하늘에 마른 날벼락이 치고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내렸던 것일까요? 1971년 7월 5일 공주. 완전히 밀봉된 왕릉의 입구로 진입하기 위해 인부들이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자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구덩이에 빗물이 사정없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발굴단은 비를 흠뻑 맞은 상태로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흘려보냈는데 마침내 비가 그치고 입구를 여는 순간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무덤 안에서 하얀 수증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죠. 당시 발굴단장은 공교롭게 빚에 몰려 집을 처분했고, 남의 차를 빌려 타고 가다 사고가 나기도 했죠. 이 모든 것이 왕릉 발굴의 저주였습니다.
유교 국가에서 1,500년 전 왕의 무덤을 발굴한다는 것이 께름칙해 생겨난 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는 가짜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경주 천마총의 발굴도 아주 우연히 시작됐습니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신라 고도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이라는 이 메모 한 장으로 시작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제98호분 ‘황남대총’을 발굴한 후 관광객에게 공개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계는 그 정도 규모의 큰 무덤을 발굴하기에는 아직 한국의 발굴 경험이 부족하다며 난색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본격적으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연습용으로 그보다 규모가 작은 고분을 발굴해 경험을 쌓아보자며 선택한 것이 바로 천마총입니다. 황남대총과 130m 떨어진 천마총은 거리상으로나 규모 면에서나 연습용으로 삼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무너져 내린 봉분의 모습으로 볼 때 이미 도굴꾼에 의해 충분히 훼손됐기 때문에 부담도 적었죠.
그런데 막상 발굴이 시작되자 발굴팀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겉모습만 그러했을 뿐 천마총은 이제껏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착각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당시 경주에서 도굴은 가장 흔한 범죄였고 1972년부터 1년간 도굴꾼에게 압수한 유물이 600점이 넘는다고 하죠.
그런데 연습용으로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고 바보 같은 주장이었습니다. 1973년 4월 6일부터 8개월간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천마총에서는 금제품 780점을 비롯해 총 11,297점의 유물이 쏟아졌는데 새와 나비의 날개를 편 모양을 딴 영락이 무수히 달린 관식이 여럿 출토됐고, 유리구슬과 영락이 달린 목걸이 외에도 각종 귀걸이, 금제 허리띠에 드리웠던 요패 장식 등도 발굴됐습니다.
그중 단연 군계일학은 1973년 7월 26일 발굴된, 1,500년 만에 긴 잠에서 깨어난 천마총 금관입니다. 신라 금관으로는 7번째, 광복 이후로는 최초였는데요. 천마총 금관이라고도 불리는 이 금관은 지금도 국보 제188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대단한 유물이지만 당시에는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발굴사업의 초점이 ‘금관 유무’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죠. 박 전 대통령이 이 사업을 승인하면서 ‘금관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가?’ 를 물었고 당시 정재현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이 ‘금관이 나올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라는 말로 글을 설득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천마총 금관 발굴 당시 미스터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1974년 발간된 ‘천마총 발굴조사보고서’에는 당시 매일매일의 발굴일지를 기록해 두었는데 7월 27일 자 발굴일지에 충격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성자는 ‘7월 27일 맑은 후 비. 금관을 들어 올릴 때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급변한 천기에 무섭고 놀라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금관을 수습하여 세척을 끝냈을 때는 밤 하늘도 씻은 듯이 맑아져 있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무덤 속에서 금관을 꺼내 들고 나오던 20대 조사원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었는데 조심히 한쪽에 내려놓고는 현장 사무실로 피신했다고 하죠. 발굴 3개월이 넘어선 시점에 발굴된 금관은 발굴팀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 놀라운 것이었는데 현재도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동시에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재가 되었죠. 그리고 이 금관은 국보 제18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발굴팀 사이에서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라고 평가됐던 유물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아무리 땅속이라고는 하지만 연약한 자작나무 껍질이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요.
금관 발굴 후 한 달 뒤 또 한 번 발굴단의 눈을 의심케 하는 유물이 나왔습니다. 155호분의 이름을 갖게 한 천마도가 출토된 겁니다. 천마도란 말을 탈 때 필요한 안장이 부속구인 장니라고도 부르는 말다래에 그려져 있었는데 부장품을 넣어둔 궤짝에서 1쌍이 발견됐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천마가 환생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지금이야 공기에 노출되고 보존 처리하느라 색감이 달라졌지만 막 출토되었을 당시에는 생동감 있는 원색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황홀했다고 하죠. 더구나 연약하기로 소문난 자작나무 껍질이 1,500년의 세월을 견뎌냈다는 점, 천마와 그 둘레를 에워싼 사실적인 도형들은 막 화공이 그려놓은 듯한 생생함이 살아있었습니다.
천마도는 장니에 그려져 있었는데 장니는 말 양쪽 배를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을 뿐 아니라 장식물로도 사용됐습니다. 천마 총에서 발굴된 장니는 가로 75cm, 세로 53cm, 두께 6mm의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서 누빈 위에 천마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진 판, 즉 장니도 중요하기 때문에 천마도와 장니를 합쳐서 천마도 장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왜 발굴단 사이에서는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라고 불렀던 것일까요? 왜냐하면 1,500년의 세월을 견뎌냈다는 것은 자칫 실수로 햇빛에 노출되면 그대로 가루로 변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진으로도 남겨질 것이고 실측도도 공개되겠지만 실물이 사라지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혹 실수로 사라져 버릴까를 걱정한 겁니다. 발굴단은 모두 4점의 천마도를 발굴해야 했습니다. 먼저 붓으로 첫 번째 천마도에 낀 먼지를 쓸어내고 촬영과 실측을 진행했습니다.
마지막 천마도를 보는 순간 발굴팀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천마도의 균열이 눈에 띄게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 버릴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발굴팀은 생생했던 색채가 퇴색이 진행되고, 균열이 생기는 찰나의 순간을 전부 목격했기 때문이죠.
어떻게든 이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사원들에게 구해오라고 시킨 함석판을 장니 밑으로 깊이 밀어 넣어 마지막 천마도를 수습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과서에 수록된 그 천마도입니다. 우리가 보는 천마도보다 훨씬 원색감을 보존했을 만큼 상태가 좋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한국에서 당시까지는 신라시대 벽화가 발견된 사례가 없었고 고구려 벽화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천마도는 금관과 더불어 제155호 고분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로 꼽힙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모여 문화재 발굴 뒤 학술적인 명칭을 부여하기 위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대표성을 띤 이름을 찾다 천마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신라시대의 회화 수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그림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제155호 고분은 천마도가 발견된 큰 무덤이라 하여 천마총으로 명명한 겁니다. 이후 천마총의 이름을 무덤 주인의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경주 김씨 985명의 청원이 있기도 했지만, 무덤 주인을 특정할 만한 유물이 없어 그대로 천마총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천마총 발굴은 우리나라 유적 발굴의 수준을 높이는 계기이자 문화재 발굴조사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일제강점기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발굴된 신라 고분의 구조와 유물 배치 역시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죠. 주먹구구식이었던 그때, 발굴단조차 하늘의 저주를 믿었던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감상하는 많은 유물이 발굴될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