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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 깜짝 놀래킨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현존하는 가장 정확하고 가장 오래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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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식재료가 후추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중세 유럽에서 후추는 매우 귀했습니다. 인도가 원산지인 후추 열매 453g으로 중세 영주가 소유한 노비 1명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귀했는데 여기에 후추의 향이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을 막아준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 그 가치는 더욱 높아졌죠.

최전성기 후추 한 상자는 현재 가치로 약 4,500만 원이었는데 이마저도 흑사병 이후로는 없어서 못 구하는 향신료가 됐습니다. 워낙에 비싸 귀족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었는데, 돈 좀 벌어 보려는 이들이 결국 이 후추를 찾아 인도로 직접 떠나게 됩니다. 쉽게 말해, 후추가 대항해시대의 기폭제가 된 겁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발되기 전까지 모든 배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갔습니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가장 짧은 항로를 개척한 인물은 포르투갈 출신의 바스코 다 가마라는 탐험가였는데, 1497년 7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10개월 뒤 진짜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이로써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유럽과 인도를 잇는 최단 항로가 개척됐는데요. 희망봉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웨스턴케이프주 남서쪽에 있는 곶으로 여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유럽인들이 희망봉 덕분에 후추에 대한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드디어 좌회전할 수 있게 되면서 인도로의 항로가 열렸고 이 항로를 따라 바스코 다 가마가 진짜 인도에 도착한 겁니다. 그렇다면 인도로 갈 때 탐험가들은 내비게이션을 썼을까요? 불가능하죠. 지도를 썼습니다. 그래서 대항해시대 유럽에서는 매일 새로운 지도가 등장했는데 현재와 비교했을 때 진짜 지도라 부를 만한 것은 희망봉이 개척된 후에야 만들어졌습니다.

최초 발견 후 약 10년 뒤 엔리쿠스 마르켈루스의 세계지도에 희망봉이 반영되면서 유럽에서 그나마 참고할 만한 지도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죠. 그런데 모든 유럽인의 후추에 대한 갈망을 풀어주었던 희망봉이 최초로 그려진 지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이 아닌 조선입니다.

비행기는커녕 제대로 된 탐험선 한 척도 없었던 조선에서 이미 86년 전인 1402년에 희망봉을 정확히 그린 지도가 등장한 겁니다. 미국 교과서에도 수록된 세계 최고의 지도를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잠시만 시선을 옮겨 2018년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5월 23일 부산에서는 ‘2018 아프리카개발은행 연차총회’가 개최됐는데 당시 참석한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한국에서도 아프리카를 같은 지구촌 식구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운을 뗀 그는 한국의 강리도에 나타난 것으로 이는 당시 아프리카, 유럽, 인도 등이 포함된 세계지도로서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지도에 수록한 것에 비해 100여 년이나 빨랐다고 강조했죠.

지금처럼 구글맵이나 위성을 이용해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기 전까지 정확한 지도를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모든 땅을 걸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가미했다가는 정확한 지도는 영원히 나올 수 없죠.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402년, 그러니까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찾아내기 86년 전, 조선에서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지도가 만들어졌습니다. 강리도는 조선은 물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까지 전부 세세하게 그려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을 것 같은 아프리카 희망봉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 1402년 조선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즉위 2년 후 신규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해 힘으로 고려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개국했음을 백성들에게 알렸는데 이방원 역시 왕위 찬탈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왕위에 올려 준 공신을 비롯해 왕실의 종친들마저 전부 처형하는 등 악행을 벌였으니, 백성들에게 자신이 정당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아버지가 하늘을 그렸으니, 자신은 땅을 그리기로 하고 수많은 지도를 제작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지도 중 하나가 바로 강리도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로 역대 왕조들의 영토와 수도를 하나로 엮어 그린 지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전도가 아니라 세계지도였던 것이죠. 태종 2년 1402년에 가로 164cm, 세로 148cm로 그린 강리도는 한국 최초의 세계지도이기도 한데, 잠시 언급했듯 강리도에는 희망봉을 포함해 전 세계 곳곳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데 조선인이 아프리카를 탐험했을 리는 만무하고 도대체 어떻게 이를 그릴 수 있었을까요?

당시 지도 제작에는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 2명이 참여했는데 현재로 치자면 부총리가 2명이나 책임자로 참여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2품에 해당하는 ‘참찬’이었던 ‘권근’이 지도 제작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히는 발문을 썼는데 여기에 자세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근에 따르면 강리도는 1402년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가 중국에서 들여온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연구하고 검상 이회에게 명해 조선과 일본 지도를 편집해 하나의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최신 지도들을 모아 장점들을 취합해 새로운 지도를 만든 겁니다.

하지만 1402년에 제작됐다는 기록만 남아있고 그 원본은 아직까지 공개된 적 없습니다. 물론 어딘가 원본이 남아있겠지만 장물이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원본을 수정해 제작된 필사본 4점으로 전부 일본 류코쿠대학에 있고, 한국에는 필사본도 없습니다. 이찬이라는 지도학자가 만든 모사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남아있을 뿐이죠.

어쨌든 1402년 제작된 강리도는 6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로 평가됩니다. 물론 지금은 위성을 통해 실물에 가까운 지도를 그릴 수 있겠지만 그 시대, 즉 15세기경에 그려진 다른 지도들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강리도 제작 후 80년 뒤인 1482년 독일 울름에서는 프톨레미 세계지도를 출판했습니다.

2세기 그리스 천문지리학자인 프톨레미가 저술한 지오그라피의 이론과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리 지식을 보완해 제작한 것이죠. 지오그라피는 지도 제작 이론을 제시함과 동시에 약 8,000개에 이르는 지명의 위치를 적어두었는데, 그 이론과 개념, 수학적 지도 제작 이론 등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이는 15세기를 대표하는 지도로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프리카 대륙입니다. 아프리카의 남부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고 미지의 땅인 ‘Terra Incognita’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가 만약 사실이고 바스코 다 가마가 이 지도를 사용해 인도에 가려고 했다면 아마 항해 자체를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남단은 세상의 끝이자 죽음의 땅이니까요. 또한 희망봉을 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강리도는 아프리카 남단이 바다로 둘러싸인 모습은 현재의 위성사진과 크기만 다를 뿐 해안선의 윤곽은 거의 흡사합니다. 즉,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희망봉을 찾기 전까지 아프리카를 이렇게 정확하게 그린 지도는 없었던 겁니다. 만약 강리도가 1402년경 유럽으로 흘러갔다면 대항해시대가 지금보다 빨리 열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조선에서는 어떻게 위성사진과 거의 흡사한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었을까요? 정답은 아랍인입니다. 학계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아랍인들에 비해 오히려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는데 조선에서 강리도를 그리며 참고한 이택민의 성교광피도가 원나라의 지도입니다. 그리고 원나라는 아랍국과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국가죠.

다시 말하면 아라비아 지역으로 진출했던 원나라 시대 아랍에서 그려진 지도가 원나라로 유입됐고 이것이 조선으로 전해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외국의 지도를 참고했으면서도 강리도에는 한반도가 아프리카 전체 대륙에 버금갈 만큼 과장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조선의 세계관을 나타내는데 발문을 쓴 권근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는 우리나라의 강역이 많이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 지도를 넓게 했다’라고 밝혔죠.

당시 원나라 지도는 한반도를 눈곱만큼 작게 표현했었는데 아마 이에 대한 반발로 한반도를 의도적으로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즉, 중국이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탈피해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 원본은 세상에 등장한 적 없는데 아마 임진왜란 때 원본이 유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류코쿠대학에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역시도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아마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한국에는 필사본도 없고 이 필사본 사진을 다시 필사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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