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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폭격에 초토화된 고려시대 사찰 벽을 뜯어냈더니 나온 보따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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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넘치는 왕권 다툼을 뚫고 보위에 오른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은 자객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꼭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보위에 오르고 2년 뒤, 1011년, 목숨을 잃을 뻔했던 수차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진관스님’을 위해 삼각산 자락의 신혈사를 중창해 절을 창건했죠.

그는 이 사찰을 특별히 ‘진관사’라 불렀는데 이것이 현재 서울 은평구에 자리한 진관사입니다. 1,1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을 무사히 견뎌낸 진관사는 아쉽게도 6.25 당시 북한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건물이 소실된 것이죠.

그런데 폭격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 3채가 있는데요. 그중 한 건물을 보수하기 위해 벽체를 뜯어냈다가 상상도 못 한 보물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1907년 건축된 진관사의 칠성각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6.25 폭격을 피했지만, 10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 한 것이죠.

그렇게 2009년 5월 칠성각에 대한 해체, 보수가 결정됩니다. 그러던 5월 27일 아침, 벽체를 뜯어내던 인부 한 명이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이상한 보따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법해 스님은 해체 보수가 결정됐을 때 인부들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니까 작업 도중 동전 하나가 나와도 꼭 알려달라고 당부해 두었는데 이 말을 새겨들은 인부가 함부로 버리지 않고 따로 가져다줬습니다.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 생각한 그는 진관사 여러 스님께 연락해 한자리에 모이도록 했고 천천히 보따리를 열기 시작했는데요. 한지로 겹겹이 싼 보따리를 여는 순간 모든 이들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안에서 옛날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인쇄물들이 발견됐으니까요.

그중 압권은 1919년 11월 27일 자 독립신문에 실린 태극기라는 시 한 편입니다.

‘삼각산 마루에 새벽빛 비췰 제 네 보았냐 보아. 그리던 태극기를 네가 보앗나냐. 죽은 줄 알았던 우리 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았내 자유의 바람에 태극기 날니네 이천만 동포야 만세를 불러라 다시 산 태극기를 위해 만세만세 다시 산 대한국’

독립신문은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뜻있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1919년 8월 21일 창간한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입니다. 조선 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들을 담아 발행된 한글 신문인데 1년 뒤, 11월 27일 ‘태극기’라는 시가 실린 겁니다.

이 신문 외에도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펴낸 ‘신대한 신문’ 3점, 국내 지하신문이었던 ‘조선 독립신문’ 5점, 실물이 전해지지 않았던 불교계 독립신문인 ‘자유 신종도’ 6점, 친일파를 꾸짖는 경고문 1점까지 보자기에 싸인 인쇄물 하나하나가 전부 국보급에 해당하는 보물이었습니다. 당시 인쇄물들과 보자기를 분석한 이는 ‘문명대’ 동국대 명예 교수였는데 그는 며칠 전 콘텐츠로 다뤘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인쇄물들을 감싸고 있는 보자기의 정체였는데요. 보자기는 언뜻 보기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를 즉각 펼쳐보니 불에 타고 군데군데 해진 자국이 남아있는 가로 89cm, 세로 70cm 크기의 태극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태극기와 보따리는 어떻게 6.25 폭격에서 살아남아 후대로 전해진 것일까요?

당시 자료를 분석한 교수들은 이 보따리를 숨긴 인물로 초월 스님을 꼽았습니다. 초월 스님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 등이 주동자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후 불교계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한 인물입니다.

백초월은 1920년대 진관사를 거점으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는데 당시 그가 이 보따리를 숨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역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9년 12월 체포됐다가 풀려났고 1920년 3.1 선언 1주년을 맞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자기를 가만히 살펴보던 전문가들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건곤감리에 해당하는 4괘와 양에 해당하는 태극 문양의 붉은색은 윤곽이 뚜렷했는데 음에 해당하는 푸른색이 삐뚤삐뚤했던 겁니다. 그 비밀이 풀리는 순간 모든 이들은 짧은 탄성을 뱉어냈죠. 왜냐하면 보자기로 사용한 이 태극기는 하얀 천 위에 그린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덧칠해 그렸기 때문입니다.

즉, 윤곽이 뚜렷한 일장기 위에다가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겁니다. 이건 무슨 의미였을까요? 초월 스님의 행적에서 이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1919년 12월 독립운동 군자금 사건과 관련해 일본군에 체포된 초월은 손톱이 통째로 뽑히고 인두로 머리를 지지는 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 고문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했던 그는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에 장애가 발생했는데요.

흔히 중꺾마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했어도 마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일본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에 일장기 위에다가 태극기를 그려 넣었죠.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일장기를 태극기로 덮어버린다는 그 뜻과 기개 앞에 마음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독립을 염원했던 것일까요. 전문가들은 이 보따리와 태극기는 그가 고문 후 풀려난 192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던 당시에 진관사에 숨겨두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동국대 한철호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형태와 그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에서 진관사 태극기에 대해 자세히 분석했는데 그는 ‘건이 위치한 왼쪽 윗부분의 끝자락은 불에 타서 손상되었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점을 볼 때, 이 태극기는 3·1 독립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에 현장에서 사용되다가 불에 탔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1919년 3.1 만세운동에서 실제로 사용된 국보급 태극기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이런 상징성을 인정받아 2021년 10월 25일 ‘진관사 태극기’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2142호로 지정됐죠.

언제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태극기’라는 존재는 언제 우리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보통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던 박영효가 배 위에서 그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일까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는 1882년에 등장합니다. 그해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게양된 태극기인데 미국의 전권대사를 맡았던 로버트 윌슨 슈펠트는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서로 국기를 교환했다고 회상합니다. 이는 미 의회도서관의 슈펠트 문서 보고서에 나타나 있는데 2017년 이태진 교수가 찾아냈습니다. 그해에는 미 해군성 항해 국도 ‘해상 국가들의 국기’라는 도감을 펴냈는데 여기에도 태극기가 등장하는데요.

49개 국가의 국기와 선기, 삼각기, 문장, 대통령기, 신호기 등 154점의 도안을 담고 있는데 그중 9페이지에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태극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국기라는 존재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그보다 앞선 1870년대 중반입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빌미가 됐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근대화를 이뤘다고 생각한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해 조선을 선택하고 조금씩 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875년 9월 중순 이노우에 요시카는 군함 운요호를 타고 강화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강화도를 지키던 조선 수군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었습니다. 결국 교전이 발생하죠.

이 사건 후 일본과 테이블에 앉게 된 조선 정부는 해괴망측한 말을 듣게 됩니다. 일본 측에서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돼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며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이죠.

사실 이미 181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된 회의에서는 국가가 국가다워지려면 국가가 있어야 하고, 국기가 존재해야 하며, 헌법을 제정해야 하고, 중앙박물관을 세워야 한다는 기준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모든 국가가 국기 만들기에 혈안이 됐었죠. 다만 조선은 비엔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무지했던 겁니다.

어쨌든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도 국기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은 청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국기를 가진다는 것은 모든 국가가 대등하다는 것이 전제로 하게 되는데 그간 조선은 우리 속국이었는데 이제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직시한 순간 청나라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청나라 국기인 황룡기를 모방해 청룡기를 만들라고 요구한 겁니다. 만약 조선이 따라만 준다면 어떤 국가가 보더라도 조선은 자연스럽게 청나라의 속국임이 인식될 테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1883년 1월 27일 내각회의에서 고종은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채택했죠.

태극기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으로 보통 박영효를 떠올리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882년 8월 고종의 특명을 받고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그는 본 방문기 ‘사화기략’을 남겼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죠.

그는 ‘1882년 9월 25일 새벽 4시에 도착해 누각에 올라 경치를 구경했음. 새로 제작한 국기를 누각에 달았음. 흰 바탕의 천을 네모나게 세로로 깃대에 걸었는데, 세로의 길이는 가로의 5분의 2를 넘지 않았음.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메우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감리의 4괘를 그렸음. 이는 일찍이 상감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바임.’이라고 썼죠.

즉,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태극기를 제작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결정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고종의 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였던 겁니다.

어쨌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의 도안은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4괘의 좌우 위치를 바꾸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 모본으로 확정된 겁니다. 이런 내용은 일본 측 자료에서도 확인됩니다.

평소 태극기 마니아로 소문난 송명호 씨는 태극기의 원형을 찾다 1997년 도쿄 도립 중앙도서관에서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선의 유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를 찾아냈죠. 현재 태극기의 건곤감리와 다르고 중앙의 태극무늬도 현재와 달리 좌우로 갈라져 있죠. 당시 신문에는 태극기 그림과 함께 이를 만들게 된 배경과 도안 설명을 담고 있는데요.

신문은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 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 원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라고 썼습니다.

즉, 박영효의 사화기략이나 일본 신문에 실린 기사로 볼 때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이 처음부터 제작 의도, 도안, 의미, 조선국기라는 국기 명칭까지 치밀하게 결정하고 나서 이를 박영효에게 그대로 실행토록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기사 첫머리는 ‘지난 28일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라고 시작하는바 당시 수신사 중 한 명과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음을 알 수 있죠. 당시 수신사에는 김옥균, 서강범 등이 함께 갔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청나라가 청룡기를 쓰라며 강요하던 당시 이에 분개한 조선에서 태극기의 초안이 등장한 것인데요.

다만 널리 보급되기는 했지만, 도형에 대한 통일성이 없고 4괘와 태극의 위치가 중구난방이어서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 도안과 규격이 통일돼 현재에 이른 겁니다.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 시작한 3.1 운동 후 일제는 강제로 태극기를 강탈해 소각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태극기는 재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초월 스님이 진관사에 몰래 숨겨둔 일장기 위에 그린 태극기가 약 1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흔들었던 태극기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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