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텍스트 YouText 글로 읽는 동영상

[미스터 션샤인] 실제 모델이었던 ‘이 사람’의 묘가 뉴욕 한복판에서 발견된 사연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얼마 전 글로벌 데이터 인포그래픽 업체 ‘비주얼 캐피탈리스트’<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순위>라는 재미있는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0위권에는 휴스턴,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미국 5개 도시가 휩쓸었는데, 아시아에서는 도쿄가 2위로 선정됐습니다. 서울은 전체 16위를 차지했는데요.

그럼, 대망의 1위는 어느 도시였을까요?

바로 뉴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뉴욕이 차지했는데, 이를 바꿔 말하면 뉴욕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자가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조사에 따르면 뉴욕에 거주하는 백만장자는 34만 5,600명으로, 이들의 총 개인 자산은 3조 달러를 넘었고, 억만장자도 59명이나 살고 있다고 하는데요. 뉴욕 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이 위치한 세계 제일의 금융 중심지인 만큼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데, 뉴요커가 되는 건 웬만한 부자는 엄두도 내지 못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화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자가 사는 도시, 뉴욕 한복판에서 한글이 빼곡히 적힌 비석이 발견됐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미국 뉴욕의 오래된 공동묘지에서 한국인 일행은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이 일행을 이끈 주인공은 뉴욕 한인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던 ‘장철우’라는 인물인데, 그가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이유는 얼마 전 교회에서 특별한 기록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뉴욕 한인교회 명부에 남겨진 단 두 줄의 기록은 이 인물이 1923년 4월 17일 사망 후, 뉴욕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는데, 당시까지 그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평소 장철호 목사는 한국인 무덤 찾기 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잃어버린 묘지를 찾아다녔는데요. 뉴욕 한인교회는 1921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1920년대에 사망한 인물들은 독립운동가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가 발견한 두 줄 기록의 주인공 역시 독립운동가일 것이라 추측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리벳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져 허름하게 방치된 한국어 묘비를 찾아냈습니다. 2피트 크기의 묘비에는 ‘대한인 황긔환 지묘’라고 쓰고, 가운데에는 그의 영문 이름과 사망 일자가 기재되어 있었는데요.

이 인물이 바로 몇 년 전 종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입니다. 드라마 속 유진 초이는 신드롬급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선말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유진은 극심한 시대적 혼돈 속에서 가난과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해병대 장교가 됐습니다.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후, 미국 공사관의 영사 대리 자격으로 조선에 돌아오게 됩니다.

우연히 만난 양반댁 규수 ‘고애신’이 일제에 저항하는 강인한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가 결국 항일운동에 투신하게 되죠. 그리고 장렬히 전사하는 비운의 미군 장교로 그려졌는데, 실제로 이런 삶을 산 독립운동가가 바로 ‘황기환’입니다.

그의 삶을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평안도 순천군 출신의 황기환은 10대 후반이던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출생 일자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드망즈 주교 일기’ 1920년 3월 12일자 기록에 따르면 1888년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기록이 맞다면 그가 16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간 것인데, 아마 유학이라기보다는 가난을 피해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미국 땅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던 그는 1917년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동시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게 되는데요. 그는 유럽 전선으로 파견되어 미국 병사들을 구호하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그가 왜 미군에 지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1918년 5월, 미국 정부가 누구든지 전쟁 때 군 복무를 하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징집법’을 공포했는데, 그가 이 혜택을 받았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종전했지만, 2년간 유럽 전선을 누비던 그는 훗날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김규식의 제안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종전 후 국제 정세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했습니다. 유럽 강대국들을 상대로 일제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뛰어난 영어 실력에 서양 문화에 익숙한 태도, 미군 복무라는 희귀한 경력을 가진 황기환은 임시정부에 너무나도 귀중한 인재였기 때문에 그에게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을 맡겼죠.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 김규식을 도와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했지만, 강화회의는 폐회 때까지 한국 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프랑스로 불러들인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황기환은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강대국들을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홍보활동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1919년 8월, 프랑스 신문 <라 프티 르프브리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자치나 개혁이 아니라 일본이 강탈한 권한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절대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서이고,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도입하려는 개혁이 무엇이든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과 일본이 화해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한국이 독립하여 양국 사이에 좋은 이웃 관계가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만행과 우리나라 독립의 필요성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1920년 1월에는 프랑스에서 열린 지리학회에 참석해 “우리는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우겠다.”라며 어눌한 프랑스어로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자리에는 베트남의 독립투사 ‘호찌민’도 있었습니다. 당시 김규식, 황기환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파리에서 교류했던 호찌민 역시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황기환과는 달리 연설 기회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죠.

이런 내용은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프랑스 경찰관이 보고서로 자세히 남겨놓아 한국 독립운동사에 귀중한 사료가 됐습니다. 경찰관은 문건 기록으로 “한국인 황 씨가 호찌민과 친밀한 분위기에서 영어로 대화했다.”라고 적기도 했죠.

그런데 황기환이 프랑스에서 혼자 고군분투할 때 남긴 업적은 따로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가난을 피하기 위해 또는 일제의 폭압을 피해 고향을 떠난 한인 약 500여 명은 러시아 연해주를 거쳐 북해 무르만스크의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나고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200여 명이 영국 에든버러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일제는 영국에게 이들은 모두 식민지의 국민이라며 송환할 것을 요청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황기환은 영국의 외무성을 찾아갑니다. “이들은 일제의 폭압을 피해 탈출한 한국인들이니, 이들을 전부 프랑스로 데려가겠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영국은 영일동맹에 의한 동맹국인 일본의 요청에 따라 한국인들을 중국 청도로 데려가도 좋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이송시킬 수 없다고 했죠. 황기환은 어떻게든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200명 중 35명만이 프랑스로 이송됐습니다. 35명이라도 프랑스로 이송할 수 있었던 것은 황기환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들은 이후 1차 대전 최대 격전지였던 프랑스 마른 지방의 벌판에서 시신과 유골을 수습하고 전사자 묘지를 조성하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는데, 피땀 흘려 번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써달라며 파리위원부에 보내기도 했는데요.

황기환은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미스터 션샤인>에도 등장했던 ‘프레데릭 아서 매켄지’ 등 친한파를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알렸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매켄지 기자는 의병활동, 3.1 운동, 제암리 학살 등을 취재해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까지 발간했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해결 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개최된 워싱턴 회의를 준비 중이던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하지만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결국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23년 4월 18일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40세였죠. 1995년, 우리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고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으나, 그의 묘지는 2008년 장철우 목사가 찾아내기 전까지 외로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한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봉환해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사망한 지 100년 만의 일입니다.

국가보훈처는 2013년부터 뉴욕 한인교회의 요청을 받고 뉴욕에 실사단을 파견해 그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으나, 올리벳 공동묘지 측에서 “유족의 동의 없는 파묘를 하려면 법원의 결정이 필요하다.”라며 거부했었습니다. 이에 2019년과 2022년 미국 법원에 유해 봉환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의 유족이 없음을 확인할 공식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법원의 승인을 받지 못했죠.

보훈처는 뉴욕 총영사관과 함께 순국 100주년인 2023년, 그의 유해를 봉환해 한국인들의 염원에 호응해 달라고 공동묘지 측을 설득한 끝에 전격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황기환의 묘를 찾은 장철우 목사는 “아직 황기환 무덤 주변에는 비석이 없는 무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한국인 무덤으로 추정된다. 독립운동을 했든, 막노동을 했든, 미국에 살았던 한국인의 무덤을 찾으려고 지금도 묘지를 찾고 있다.”라며 2012년 목사직을 내려놓은 후에도 여전히 애국지사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뉴욕 올리벳 공동묘지에는 주인을 찾지 못한 애국지사의 묘지가 많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분들이 그렇게나 만들고 싶어 하셨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