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연산군의 사돈이자,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 구수영은 조선 전기 성종-중종 시대의 척신으로 자는 미숙, 본관은 능성으로, 중추부지사 구치홍의 아들이었으며 영의정 구치관의 조카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자세가 수려했던 구수영은 1467년, 12세 때 세종의 막내 아들인 영응대군의 사위가 되었고, 이때 세조로부터 특별히 부호군의 작위를 받게 됩니다. 구수영이 영응대군의 사위가 된 이유는 그의 외할머니인 인천 이 씨가 세조비 정희왕후와 외사촌 자매간이라는 사실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습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절충장군에 임명되었고, 잠저에 있던 자산군을 시종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친해집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면서 원종공신에 책훈되었으며, 종 2품 중추부동지사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첨지사로 승진하게 됩니다.
이때 성종은 편전에서 그를 보고 말하기를 “옛날 함께 놀던 일을 생각하면 마치 눈앞에 선한 것 같다.”라며 어의를 하사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승차는 계속되어 1478년, 정 2품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고, 여러 관사의 제조와 도총각을 여러 번 역임하게 됩니다.
이렇게 구수영이 단기간에 출세했던 이유는 성종과의 친밀함이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로는 장모였던 대방부부인 송 씨의 역할이 컸습니다.
늦게 낳은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궁궐 내탕고의 모든 재산을 받은 영응대군은 안타깝게도 34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모든 재산을 부인인 송 씨가 물려받게 되었고, 그녀는 대군을 아끼던 왕실 사람들로부터 비호까지 받게 되면서 실질적인 권력이 높아져 갔습니다.
심지어 송 씨는 진수성찬을 차리고 손님을 초대해 사위 구수영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때 특별히 한 자리를 설치해 사위를 가운데 앉히고 여종 수십인을 모두 궁중 나인 복장으로 꾸며 좌우로 열을 지어 시립하게 합니다.
마치 궁궐에 있는 듯한 모습을 재현했었기에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논란이 되지만, 결국 아무 일 없이 수습될 정도로 그녀가 왕실에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1494년, 성종은 가뭄이 심해지자, 경회루 연못가에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한 기우제를 지내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를 구수영이 맡아 3일 동안 정성을 다해 제를 지내자 큰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성종은 크게 기뻐했고, 그를 치하하며 궁온과 어의를 하사합니다.
세월이 흘러 연산군 때에도 여전히 건재했던 구수영은 1501년, 연산군의 첫째 딸 휘신공주의 짝으로 자신의 넷째 아들 구문경이 간택되어 1502년, 혼례를 올리면서 연산군과 사돈이 됩니다.
참고로 구수영은 길안현주 이억천과 남다른 금실을 자랑하면서 5남 5녀를 두게 되었고, 그의 자식들 역시 왕실과 명문가에 혼맥으로 연결이 됩니다.
장남 구숭경은 세조비 정희황후의 조카인 윤보의 사위, 둘째 아들 구희경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겸의 사위, 첫째 딸 구순복은 간신으로 유명한 임사홍의 며느리, 둘째 딸은 성종의 서자인 안양군 이향과 혼례, 넷째 아들 구문경은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와 혼인해 부마가 됩니다.
연산군과 사돈이 된 해인 1502년 구수영은 종 1품 돈령부 판사에 임명되었고,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게 됩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1504년, 갑자사화로 그의 두 사위가 죽임을 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두 딸마저 종이 된 것입니다.
첫째 사위 임희재는 간신이라 널리 알려진 임사홍의 아들이었지만, 성품이 곱고 권력을 멀리한 인물로 1504년, 갑자사화 때 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참수됩니다. 이때 구수영의 장녀 구순복은 연자되어 종이 되지만, 올케인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의 뜻으로 다행히 방면됩니다.
또한 둘째 사위 안양군은 성종의 서자로 생모가 귀인 정 씨였습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가 죽임을 당한 폐비 윤 씨 사건의 원인이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 씨와 귀인 엄 씨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하면서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귀인 정 씨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궁으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연산군은 귀인 정 씨와 귀인 엄 씨를 창경궁 뜰에 묶어놓고 모진 고문을 하다가 안양군과 봉안군이 궁에 끌려 오자, 그녀들을 마구 때리라고 명합니다. 안양군은 당시 날이 어두웠기에 어머니임을 짐작하지 못하고 마구 때렸으나, 눈치가 빨랐던 봉안군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차마 때리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울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때문에 더욱 화가 난 연산군은 그녀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살해합니다. 며칠 뒤 안양군은 제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이듬해인 1505년,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이때 부인과 첩은 종이 되어 다른 종친에게로 나눠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위들이 연산군의 역린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구수영은 이러한 위기를 잘 풀어가며 연산군과 더욱 밀접해집니다.
1504년에 대왕대비 소혜왕후가 죽자, 산릉도감제조로서 상례를 잘 처리하였고, 1505년에는 장악원 제조에 임명되어 악률과 악기에 재능이 있었던 것을 십분 발휘해 채홍사로 모집된 흥청, 운평, 광희 등 2,000명이 넘는 기녀를 모아 악률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연산군의 방탕을 돕게 합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506년, 종 1품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제도 통찰사와 개성 유수를 겸임하게 됩니다.
이후 경기순무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왔을 시기인 1506년 음력 9월 2일,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키자, 이에 합류하여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국공신이 되면서 정 1품 능천부원군에 봉해집니다.
이때 구수영은 자신의 넷째 아들 구문경이 죄인의 사위가 되었다면서 휘신공주와의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고, 곧 이를 허락받게 됩니다. 이는 아들의 핑계를 대었지만, 결국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누렸던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2년 후인 1508년, 사원부대사헌이었던 정광필은 부부는 역모를 꾀한 이의 자식이라도 국가에서 이혼시킬 수 없는 것이라며, 휘신공주 부부의 재결합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중종은 부원군 이상의 신하들이 참여해 이 안건을 논의하도록 하였고, 결국 출가한 딸은 친부 쪽의 죄에 연좌시키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휘신공주 부부는 재결합하게 됩니다.
구수영은 부원군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연의 영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스스로 고사하여 면직되었고, 1507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제가 끝난 다음 복직하려 하자, 대간에서는 그의 벼슬들이 모두 연산군 때 남발된 것이라고 탄핵하여 결국 관직을 내려놓게 됩니다.
1510년 중종이 그의 옛날 공헌을 생각하여 정 2품 정헌대부의 자급을 주고 능청군에 봉하지만, 대간들이 들고일어나 연산군의 충복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다시 논란을 일으키면서 결국 파직됩니다.
당시 언론을 담당한 삼사에 포진해 있던 개혁파 사림들은 그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으며 맹렬히 비판하면서 공신 자격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죄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같은 훈구 세력이었던 반정공신들의 비호로 실질적인 죄를 받진 않지만, 그는 조정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구수영은 평구의 강촌에 별장을 지어놓고 관직에 전혀 개의치 않은 채 15년 동안 한가하게 살다가 152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였습니다. 구수영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으며, 부인 길안현주와 함께 합장됩니다.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 성품이 자상하고 유순, 겸손하여, 비록 부귀영화가 대단하였으나 마음 편히 조용하게 스스로를 지켜 교만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또, 사치스럽거나 화려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여색이나 사냥놀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여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친가에 문안드리는 것을 폐지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에 즉위함에 따라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원종으로 추존되어, 그의 부인 구 씨도 인헌왕후로 추존됩니다. 이때 재밌는 사실은 인조의 어머니였던 구 씨는 구수영의 둘째 아들 구희경의 증손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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