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충성심이 강한 진돗개의 고향, 전남 진도에 가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2006년 광복절, 이 산에서는 전에 본 적 없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수, 대학생, NHK 방송국 PD 등 25명의 일본인이 이 산 앞에 모여든 것이죠. 일부 대학생은 조상의 영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추는 염불 춤을 추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은 홀로 독경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일본에서 전남 진도까지 찾아와 염불 춤을 추고 독경을 외운 것은 400년 전 조선에서 전사한 조상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일본과 한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동시에 이 산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산에 모여든 일본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 산이 어떤 산이기에 이런 광경이 펼쳐진 것일까요?
일본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 블로거는 자신이 겪은 독특한 일본의 문화를 글로 남겼습니다. 그 블로거는 아이가 다니는 보육원의 참관 수업에 갔는데, 아이들이 전부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조금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조그만 몸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했지만 조금 익숙하지 않다고 했죠.
우리는 일본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언론 매체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를 두고 정좌라고 하는데요. 이는 일본인의 평소 모습에서도 자주 목격됩니다. 검도, 유도, 다도, 서예 등을 할 때도 정좌를 하고 기다립니다.
이는 일종의 예의 같은 것인데요.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정자를 예의의 기초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정좌가 생활 속에 녹아든 겁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행동은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사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바른 자세인 것은 같지만 한국에서 이는 예의를 갖추기 위한 행동이 아니죠. 상대방에게 진심을 담아 사죄할 때 무릎을 꿇습니다.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무릎 꿇는 것이 아주 익숙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진심을 담아 사죄해야 할 일에는 그러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선배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는 수많은 조선인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겼지만 이에 대한 사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매년 9월 말이 되면 진도에서는 일본인이 무릎을 꿇는 특별한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24일 전남 진도군 고군면 내동마을의 왜덕산 앞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를 비롯한 100여 명의 관계자가 모여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위령제란 말 그대로 ‘영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는 추모사에서 “일본이 한때 한국에게 아주 큰 고난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사죄는 고통 입은 이가 ‘이제 그만해도 됩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 전공을 계산했지만 그뿐 아니라 무덤을 만들어 공양한 일본인도 있다. 왜덕산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한국과 일본의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길 때 미래는 밝아질 것”이라며 정치인답게 양국의 우호를 강조했는데요. 왜덕산이 도대체 어떤 산이길래 일본인이 단체로 찾아와 매년 위령제를 지내는 것일까요?
1597년 임진왜란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일본인 사이에서 ‘실존했던 것 자체로 기적’이라 불렸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대첩, 노량해전, 명량해전 이른바 3대 해전으로 인해 일본인에게 저승사자 같은 장군으로 기억됩니다. 명량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함성 330척을 격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 정벌에 나서면서 총대장으로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임명했습니다. 1592년 조선 땅을 밟은 그는 조선 전역을 다니며 잔인함을 과시했는데요. 그러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맞서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330척의 일본 군함과 총대장, 구루시마 미치우사를 포함 4,000여 명의 왜군을 전멸시켰죠. 그런데 이때 바다로 빠진 왜군의 시신이 울돌목의 빠른 물살에 휩쓸려 떠다니다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 바닷가로 쓸려왔습니다. 당시 내동리 주민은 파도에 의해 해변으로 쓸려온 100구가 넘는 왜군 시신을 전부 거두어 양지바른 야산에 묻었죠.
사실 이건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인이 왜군에 가진 분노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내동리 주민에게 그들은 단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불쌍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시신을 전부 거둬 머리를 일본 쪽으로 향하도록 두고 정성을 다해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야산은 ‘왜인에게 덕을 베풀어 주었다’라는 의미의 ‘왜덕산’으로 불리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민간의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녕 조 씨’ 족보에 등장하죠.
조선인이 자기 조상을 고이 거둬 묻어주었다는 사실은 히구마 다케요시라는 히로시마 수도대학 교수에 의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수장된 왜인의 고향인 에히메현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는데요. 이 말을 들은 일본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조선에서 이순신 장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조선인이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고 묘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둘러 조상들의 묘를 찾아 위령제를 지냄과 동시에 내동리 주민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기 위해 왜덕산을 방문하기로 합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NHK 방송사도 2006년에 취재를 하러 왔던 겁니다.
그리고 그해 8월 15일, 무려 409년 만에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군에 대한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후손들은 그들의 영령을 위로했고 이후 매년 이곳을 찾아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왜덕산을 통해 한국인의 근본적인 생명 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었죠.
지난 2020년 일본 교토에서는 또 다른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이번 영령의 주인은 조선인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희생당한 조선인이었는데요. 그 장소명이 특이합니다. ‘이비총’, 한국어로 풀면 귀와 코를 묻어둔 무덤입니다. 귀 무덤 또는 코 무덤이라 불리는 곳인데요. 오로지 조선인의 귀와 코로 만들어진 이 무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다시 임진왜란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선은 대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강한 조선의 반격으로 전황이 교착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에게는 장수들을 독려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이라는 전라도의 선비가 남긴 ‘간양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히데요시가 모든 장수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둘이지만 코는 하나이니 마땅히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머리를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 한 사람이 한 되씩으로 하되, 소금에 절여 나에게 보내라. 코의 수효가 채워진 이후에야 생포로 인정하겠다”라고 썼습니다. 사람의 머리보다 코가 부피, 무게로 봤을 때 훨씬 가볍다는 반인륜적인 발상에서 나온 결정입니다.
왜군은 전공을 올리고자 남녀노소는 물론 갓 태어난 아기까지 마구잡이로 희생시켰고, 무자비함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가토 기요마사는 ‘청정고려진각서’라는 문서에서 “일본인 한 사람당 조선인의 코가 3개씩 할당됐다. 그 코를 고려(조선)에서 검사관이 검사한 뒤에 큰 통에 넣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는 일본의 오사카성으로, 이곳의 천수각에는 1597년 10월 1일로 찍힌 특이한 영수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 영수증은 전라도 지역으로 출정한 나베시마 가츠시게 군대가 전라도에서 절취한 코 3,369개를 바치고 받은 것인데요. 조선에 머물던 히데요시의 측근이 코를 수령했음을 증명하는 영수증을 써 주고, 이를 술통에 담아 일본으로 보내 히데요시가 직접 검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2012년 ‘한국동북아논총’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 종군 승려 경념은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 것은 없다. 일본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고을마다 가득했다. 조선 사람이라면 어린이부터 부녀자의 코까지 모두 잘라 대바구니에 담았고,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라고 썼습니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 명예교수는 진도문화원이 개최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무덤’ 학술 대회에서 “일본의 사료 등을 검토한 결과 베어져 묻힌 코의 수는 56,476개로 추정된다. 왜장 한 명당 평균 6,275명의 조선인 코를 베었다는 것인데, 이 숫자의 3배가 넘는 왜장이 돌격부대장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베어간 조선인 코의 숫자는 드러난 숫자의 3배인 20만 개로 추측된다”라고 밝혔습니다.
적게는 5만 개, 많게는 20만 개가 넘는 코로 만들어진 ‘비총’은 알려진 곳만 총 5곳입니다. 후쿠오카 1곳, 대마도 1곳, 오카야마 2곳 교토 1곳입니다. 과연 그 후손은 자기 조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어느 학자는 ‘비총’ 즉 ‘코 무덤’이라 부르고 또 어느 학자는 ‘이총’ 즉 ‘귀 무덤’이라고 부르는데요. 정확한 명칭은 코 무덤이 맞습니다. 정유재란 후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통치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통신사 외교를 시작하면서 주자학을 기초로 일본의 통치 철학을 수립했습니다.
당시 하야시 라잔이라는 유학자는 “본디 이 무덤은 코만 묻혔는데 조선 통신사의 숙소가 이곳이 가까운 곳이다. 그들에게 혐오감을 덜 주기 위해 코보다 귀가 나을 것 같으니 이총(귀 무덤)으로 바꿔 부르자”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때부터 근현대까지 출판된 안내서 대부분이 이를 ‘귀 무덤’으로 쓰면서 일반 명칭이 됐으나 실제로는 ‘비총’이 맞습니다.
이는 외국인이 보기에도 잔인했던지 이 무덤에 대한 철거를 요청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 논문에 의하면 “1920년경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크로아티아 부부가 조선과 중국 등을 방문하는 도중에 교토의 비총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편지를 보내 철거를 요구한 적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덤이 현재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 요구는 수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전쟁에서 탄생한 2개의 무덤은 그 취지와 목적으로 보자면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덕산의 무덤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 태어났으나, 코 무덤에서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일본이 이러한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