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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딱 한 번 등장했던 아프리카 특수부대가 한국에 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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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50년간 지속된 냉전 시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의 특수부대가 등장했습니다. 그 당시 창설된 특수부대들은 여전히 특수한 임무를 맡아 수행하고 있는데, 러시아와 미국이 냉전 시대의 주인공인 만큼 그 위엄은 대단합니다.

가령 구소련의 정보기관인 KGB나 현 러시아의 스페츠나츠 등이 있고 미국은 1987년 아예 ‘미합중국 특수작전사령부’를 두고 산하에 그린베레, 네이비실을 포함 7만여 명에 가까운 특수부대원을 운용하면서 전 세계 85개국에서 특수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북한과 휴전 상황이기 때문에 육해공군 모두 특수부대를 운영하는데 육군 특전사, 707 특임대, 해군 해난구조전대 SSU, 해군 특수전전단 UDT, 해병대 수색대, 공정통제사 CCT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약 80년 전 역사상 단 한 번 존재했던 아프리카 특수부대가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창설된 이들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확립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장 1만 km 떨어진 한국으로 파견됐는데요. 253번 싸워 253승을 거둔 이 전설적인 특수부대를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3명의 노인이 전망대에 올라 북한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북한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꼭 찾아오자며 결연에 찬 듯 말을 내뱉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를 든 노인 3명이 그것도 우리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먼 한국 땅에 와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이들이 바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한국인들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준 특수부대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는 고급 원두로 꼽히는 아라비카 커피의 원산지로 아프리카 최대 커피 생산국입니다. 천혜의 커피 재배 환경을 갖춘 에티오피아는 원래 제국, 즉 황제가 있었지만 1974년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황제가 폐위되고 현재는 대통령이 통치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 그러니까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마지막 황제가 존재하던 시기까지는 오로지 황제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된 황실 근위대가 있습니다.

이들을 메할 세파리라 불렀는데 이들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무래도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황제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장 전투력이 우수한 병력만 모아놨을 것이고 메할 세파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에 건너왔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한국 영토를 폐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당시 UN은 한국을 위해 전 세계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미국, 영국, 호주 등 17개 국가가 병력을 파병해 실제 전투에 나섰고 스웨덴, 인도 등 5개 국가는 의료지원을 통해 부상병을 치료해 줬습니다.

그전까지 교류가 전혀 없었던 국가들까지 나서서 한국을 도와주기 시작했는데, 에티오피아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준 이들 모두에게 감사하지만, 에티오피아는 특별하고 감사한 국가입니다. UN이 전 세계에 파병을 요청했을 때 수많은 국가가 이해득실을 따져 한국전쟁 참가를 두고 저울질했었는데 에티오피아는 오직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참전했습니다.

파병 요청을 받은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짐에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 주거라!

우리 민족이 과거의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라며 메할 세파리의 상당수를 뽑아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해 한국에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는 칵뉴라는 부대명을 하사했죠. 1951년 4월 12일 한국에 칵뉴 부대를 파병할 당시 에티오피아도 태평성대는 아니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에 한국과 똑같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랬듯 유럽 국가들은 배 타고 조금만 내려가면 닿을 수 있는 힘없고 가난한 아프리카를 마음껏 유린했습니다.

이탈리아도 그랬는데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탈리아의 경제와 산업은 모두 무너져버리자 국민적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자 대외 확장정책을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그 먹잇감으로 에티오피아를 선택해 1935년 68만 병력과 3,300문의 기관총, 205대 비행기를 동원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죠.

당시 셀라시에 황제는 이 문제를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해결해 보고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변을 토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 어떤 국가도 선뜻 에티오피아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유럽 국가와 다툼이 생기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죠.

결국 이탈리아와의 전쟁으로 27만 명의 목숨을 잃었지만 절대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저항정신으로 6년 만에 승리를 쟁취합니다. 덕분에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국가로 남았죠. 이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셀라시에 황제는 이때부터 새로운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간 교류도 없었던 저 먼 동아시아의 한국이라는 국가에 자신의 직속 제1근위사단에서 지원자들로 구성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해 보낸 것이고, 이 보병대대는 누구 한 명 강제로 향한 사람 없이 100% 지원병으로 이루어졌죠.

미군 수송선을 타고 지부티항을 출발해 약 3주간 항해를 마치고 1951년 5월 7일 한국 땅을 밟은 칵뉴부대 1진을 시작으로 에티오피아는 총 5차에 걸쳐 총 6,037명을 파병했습니다. 이들은 미군 제7사단 32연대로 편입되어 한국전쟁에 투입됐는데 사실 그들에게 한국은 지옥과도 같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과 아프리카의 기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죠.

특히 태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었을 강원도 한겨울 추위를 견뎌냈습니다. 연평균 25도 이상의 고온을 자랑하는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병사들이 이렇게 힘들게 한국을 지켜준 겁니다. 그런데도 칵뉴부대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남은 건 총 253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는 점인데요.

투입 직후 치른 9월 강원도 화천군 화천 적근산 전투, 이듬해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단 한 차례도 고지를 내주지 않고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워줬습니다. 탱크 한 대도 없이 253전 253승을 기록했고, 총 6,037명 중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가 생기기는 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사자의 시신은 에티오피아의 풍습에 따라 전부 수습해 고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에 부산의 UN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없죠. 워낙에 용맹하게 싸우다 보니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검은색 피부를 가진 용병들이 저승사자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그리고 칵뉴부대의 활약은 그들을 지휘했던 미7사단장 아서 트루도가 기억합니다.

‘한국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칵뉴부대보다 더 잘 싸우고 더 용맹한 부대는 없었다. 그들은 전투에서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고 임무를 완수했다. 그들은 무사히 때로는 부상 당하거나 전사자가 있었지만, 출동한 전원이 귀대했다. 그들은 전쟁 내내 포로 한 명 없었고 따라서 포로를 교환할 때도 대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영광스러운 진기록을 세웠다.’라고 말이죠.

한국전쟁에서 칵뉴부대의 전투방식은 일반 전투부대와 많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소대가 적에게 포위되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는 병사가 아니라 장교와 부사관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진입로를 열어준 후 부대원들이 전진해 적군을 섬멸시켰습니다. 또한 포로가 발생하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쫓아가 결국 구조해 냈죠.

그래서 아서 트루더 7사단장이 언급했던 것처럼 단 한 명의 포로도 발생하지 않았던 겁니다. 어쨌든 이러한 활약 덕분에 칵뉴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2회,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1회,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2회 등 무공훈장 58회, 미국 은성훈장 1회 등 각종 훈장 20회를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 후 부대원들은 전부 에티오피아로 복귀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류애가 넘쳤던 그들 중 일부는 3년 더 한국에 남아 비무장 지대 순찰 및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의 재건을 도왔고, 특히 전쟁 중이던 1953년에는 경기도 동두천에 암하라어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세운 후 전쟁고아를 돌봤습니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잠을 잘 때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 곁을 지켜줬죠.

이후 1963년 에티오피아는 한국과 정식 수교를 체결했고, 1968년에는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우표로 나오기도 했는데요. 한국 정부는 어려운 시기 도와준 감사함을 잊지 않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직접 수여하기도 했죠.

그렇게 목숨 걸고 한국을 위해 싸워줬지만, 그들이 에티오피아로 돌아갔을 때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목축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에티오피아에는 이후 7년간 끝 모를 가뭄이 시작됐고 키우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국민소득이 채 80달러가 되지 않을 때 에티오피아는 무려 3천 달러를 넘었지만, 가뭄으로 국가 전체가 휘청거렸습니다.

더구나 1974년 쿠데타로 공산주의 정부가 세워지자, 정부는 6.25때 미국을 도와 북한군과 싸웠다며 참전용사들은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됐죠.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또 일부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세대의 가난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넘어가 끊을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 빠져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은 힘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요.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 쉬퍼로우 게브레 볼드 씨는 한국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비록 온몸에 총탄이 박히고 팔, 다리를 잃었지만,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싸운 자부심으로 한평생 살아왔습니다. 가난과 고통, 멸시가 대물림되어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있지만 한국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라고 말이죠.

저는 ‘감사함을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은 어쩌면 지금 북한 주민들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6.25 발발 73주년하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태어나 처음 겪는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며 한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준 에티오피아 및 17개국 참전용사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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