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자원전쟁은 요 몇 년 사이 급격하게 생겨난 개념이 아닙니다. 이미 1910년대부터 자원전쟁은 시작됐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기점이었죠. 이 자원전쟁의 불씨를 당긴 인물이 바로 영국의 윈스턴 처칠입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이 치열하게 싸우던 1911년, 당시 대영제국 해군 제독이던 처칠은 전통적인 해상강국 영국에 심장과도 같은 전투함들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꿀 것이냐는 중대한 결정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간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석유는 석탄보다 부피가 작지만, 훨씬 더 많은 열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전함의 속도를 높일 수 있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데다 작전 반경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영국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대가 상당했습니다. 석유매장량도 충분치 않은데 영국이 과연 전쟁을 끝낼 수 있을 만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석유 대신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웨일즈산 석탄을 쓰는 것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페르시아산 석유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안전하다는 주장.
하지만 처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908년 이란 지역에서 영국이 발견한 거대 유전이 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은 관철됐습니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석유를 연료로 하는 전함이 영국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무리하다시피 도입한 석유추진 전함은 영국의 군사력 우위를 가져왔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승자가 됐는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인류는 본격적으로 석유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석유를 보유한 국가는 부와 명예를, 석유를 가지지 못한 국가는 빈곤과 절망에 빠지는 시대가 된 것이죠.
영국의 이 결정으로 새로운 부와 명예를 거머쥔 국가들이 있는데, 바로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 OPEC입니다. 이들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자신들이 밀던 이집트와 시리아가 패배하자 이스라엘 편에 섰던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고 결의합니다. 이것이 1973년 발발한 제1차 석유파동입니다.
여기다 의도적으로 생산을 줄이자, 국제원유가는 미친 듯이 폭등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산업화로 진입하려는 국가들에는 재앙이 됐습니다. 그렇게 7년 뒤 발생한 제2차 석유파동은 자원이 가진 무서움을 깨닫는 사건이었죠. 석유라는 자원이 국가의 존폐를 결정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여러 국가가 자발적으로 석유의 노예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1세기가 됐고 지금이야 원자력, 풍력, 수력, 태양열뿐 아니라 천연가스까지 등장하면서 석유 의존도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석유는 중요한 자원입니다. 그런데 OPEC에서 입김 좀 분다는 두 국가가 경쟁적으로 한국에 투자하고 나섰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어쩌다 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아람코는 현재 사우디에 추진 중인 석유화학 플랜트를 현대건설에 발주했습니다. 사우디는 현재 동부 주베일 지역에 석유화학 복합단지 공장을 건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중 에틸렌 생산시설인 ‘아미랄 석유화학 콤플렉스 패키지1’과 유틸리티 기반 시설 ‘패키지 4’를 현대건설에 발주한 것이죠.
이 프로젝트는 약 50억 달러, 한국 돈으로 6조 4천억 원에 이르는 초대형 사업인데 이는 한국 기업이 그간 사우디에서 수주한 모든 사업을 통틀어 가장 큰 금액입니다. 당시 계약 서명식은 아람코 본사에서 개최됐는데 이 사업은 사우디를 이끄는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강한 의지가 담겼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11월 모하메드 왕세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양국은 앞으로 미래지향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하고 에너지, 인프라 분야에서 대규모 경제협력을 추진하기로 했었습니다. 언론에 알려진 재산만 2,800조 원에 이르는 사우디 차기 국왕 모하메드 왕세자는 지난 11월 한국을 방문했었습니다.
비공식 세계 1위 갑부가 다녀갔기 때문인지 그가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언론에서 그는 주인공이었습니다. 불과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을 한국에 머물기 위해 식기 1억 원어치를 사들이고 1박에 2,200만 원에 달하는 로열스위트룸을 포함, 400개 호텔 객실을 예약한 것이나, 삼성, SK, 현대차 등 한국 대기업 CEO들을 불러 모아 ‘꿈이 뭐냐?’고 물어봤다는 소문들은 그가 ‘미스터 에브리띵’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던 것은 자신이 640조 원을 들여 추진 중인 네옴시티를 두고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하루 만에 체결된 계약 및 사업양해각서가 무려 26개, 금액으로 보자면 40조 원입니다.
서울 전체 면적의 40배가 넘는 땅에 건설 중인 네옴시티는 3개의 거대한 프로젝트로 이루어졌는데 직선 도시 ‘더 라인’, 바다 위 부유식 첨단산업단지 ‘옥사곤’, 그리고 사막 관광단지 ‘트로제나’입니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석유가 아닌 그린수소와 태양광, 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진정한 미래형 신도시가 머지않아 세워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사업에 한국 정부와 기업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모하메드 왕세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우디만큼이나 한국에 공을 들이는 중동 국가는 아랍에미리트입니다. 지난 1월 15일 아부다비 대통령궁에서 열린 한-아랍에미리트 정상회담 당시 양국은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모하메드 빈 자히드 알 나흐얀 대통령은 한국에 300억 달러, 한국 돈으로 4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폭탄선언을 남겼죠. 워낙에 큰 금액이라서 이 소식이 한국에 전해졌을 때도 과장됐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죠. 그런데 이는 현실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5월부터 한국에 대한 투자에 착수했으니까요.
지난 5월 22일 기획재정부는 아랍에미리트가 한국의 에너지, 정보통신기술, 농업기술, 생명공학, 항공우주, K-컬처 등 6개 분야를 우선 투자 대상으로 선정한 후 20억 달러, 한국 돈으로 2조 6,000억 원에 대한 투자 검토에 착수했습니다.
이를 위해 아랍에미리트의 무바달라와 아부다비투자청, 아부다비개발지주회사, 아부다비투자위원회 등 4개 국부펀드는 5월 중순 방한해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났고, 아랍에미리트 은행과 국영 석유기업인 아부다비내셔널올컴퍼니까지 한국을 찾았죠. 사실 이번 투자 착수는 지난 1월 한-아랍에미리트간 정상회담에서 약속된 300억 달러에 대한 착수금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착수금 규모가 엄청난데요.
아랍에미리트가 중국에 약속한 전체 투자 규모가 약 6조 원인데 그의 약 40%에 해당하는 금액을 착수금으로만 한국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전체 투자 금액 1조 5,000억 원과 비교해도 거의 2배 가까이 많죠. 다만 이 20억 달러가 어느 곳에 투자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국 합의에 따라 비밀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이제 이번 투자를 시작으로 양국이 합의한 40조 원에 대한 투자가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인데 우리 정부는 현 대통령 임기 중 40조 원을 전부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둔 상황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결정을 내린 인물은 한국과 유독 인연이 깊은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입니다.
이 인물을 알려면 용어를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요. 아랍에미리트는 영어로 UAE라고 표기하는데 영어에서 알 수 있듯 연합국입니다. 한 개의 국가가 아니라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지만, 움알쿠와인, 라스알카이마, 푸자이라 등 7개 토후국이 모여 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UAE가 OPEC 정도로만 인식됐을 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토후국 중 하나인 두바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바이가 그나마 있는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도시개발에 투자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변모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부다비는 덜 알려졌습니다.
아부다비는 7개 토후국 중 가장 큰 형이면서 UAE 전체 면적의 87%를 차지하고 있고, 석유매장량의 95%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고작 석유매장량 4%에 불과한 두바이의 인지도가 높아지자, 큰형이 나서기 시작했는데 그 전면에 나선 인물이 바로 알 나흐얀 대통령입니다. 언젠가 고갈될 석유 경제에서 탈피해 두바이의 모든 명성을 가져오겠다며 아부다비를 전 세계 문화 중심지로 변모시킨다는 포부를 내세우면서 말이죠.
보통 알 나흐얀을 UAE 왕세제라 불렀는데 이는 잘못된 호칭입니다. 사우디의 경우 국왕 통치 체제이기 때문에 국왕의 아들 모하메드 빈 살만은 실제로 왕세자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UAE는 왕이 아니라 연방공화제입니다.
그리고 알 나흐얀 가문이 큰 형으로 아부다비를 통치하고 있고, 아부다비 통치자가 UAE 대통령을 맡습니다. 지금은 전 대통령 셰이크 할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이 사망하고 현재 대통령이 됐죠. 보통 우리가 갑부의 표상으로 영국 EPL 맨시티의 구단주 만수르를 떠올리는데 만수르는 현 대통령의 셋째 동생입니다. 둘이 친형제 관계, 그러니까 만수르의 부는 큰 형의 부에 비하면 조족지혈인 겁니다.
왜냐하면 알 나흐얀 가문은 영국 더타임스가 보도하기로 순자산 최소 400조 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니까요. 그런데 현 대통령인 그가 전면에 나서면서 특히 한국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일례로 무기분야에 한국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죠.
아마 한국이 얼마 전 호주에 레드백을 수출하기로 한 것이나, 작년 폴란드가 엄청난 양의 한국산 무기를 수입한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폴란드 이전 단일무기 판매 신기록은 UAE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 1월 한국으로부터 천궁을 4조 원어치 수입해 운용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2021년 11월 UAE 국방부는 한국과 상의도 없이 대뜸 트위터 공식 계정을 통해 한국산 중거리지대공미사일을 구매할 계획이라며 계약 규모는 약 35억 달러 상당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중동 국가가 금액까지 명시하고 한국산 무기 구매 계약 내용을 밝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는데 두 달 후 실제 계약이 체결됐죠. 이미 2017년부터 천궁을 구매할 의향을 밝혀왔었는데 UAE의 요격미사일 시험장을 건설하는 방안까지 깊이 있게 논의됐었습니다.
이후 천궁-2에 대한 개발이 완료되고 한국군에 실전배치 되자마자 UAE는 4조 원을 투입해 잽싸게 수입해 갔습니다. 한국 정부나 기업이 한국의 특정 산업에 투자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겁니다. 특혜 논란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외국 정부는 다릅니다. 자신들이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분야에 원하는 만큼 투자할 자유가 있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UAE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어떤 산업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성장하게 될 분야를 예측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산업은 투자금을 자양분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앞으로 돈 많은 외국 정부가 한국에 더 많은 투자를 실행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