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텍스트 YouText 글로 읽는 동영상

일본 사무라이의 기원이 한국..?

한류 반응 일본반응 해외반응 디씨멘터리 백제 사무라이 싸울아비 일본 일본 반응 한국 한국 해외반응 해외 반응 해외 외국인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에드워드 조지 불워 리튼이 자기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인데 이후로 다양한 사람들이 인용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확히 어울리는 국가가 둘 있는데, 하나는 한국, 다른 하나는 일본입니다.

보통 한국은 선비의 나라라고 부르고,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마크 피터슨이라는 미국인 학자는 이 선비의 존재가 조선왕조 500년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비는 매일 책상에 앉아 책이나 읽고 탁상공론이나 즐기는 고리타분한 인물로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역사에서 선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왜냐하면 실천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죠. 임진왜란 등을 비롯한 국가적인 위기가 도래하면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 의병장 중 선비 출신이 많았습니다. 노비와 평민은 선비 출신 의병장을 따라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선비는 만백성의 모범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다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공부했고, 왕조나 가문이 무너질 때도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결국 펜을 든 선비들이 존재한 덕분에 칼에 위협받는 위기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무너진 적은 없죠. 반면 일본은 칼의 나라 또는 사무라이의 나라라고 불립니다. 사실 이 사무라이라는 것은 일본을 나타내는 표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근대에 시작됐습니다.

서양 문명과 조우한 일본은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와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무라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호명했습니다. 사무라이가 걸어가는 길, 즉 무사도 역시 이 시기 일본의 전통으로 재발견되고 재정립되었죠. 그렇다면 일본을 나타내는 표상인 사무라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무라이라는 단어는 모신다는 뜻의 한자 모실 시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한자 뜻으로만 보자면 사무라이들은 신분상으로는 귀족이면서 귀족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경호원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죠. 이들이 일본에서 주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인데 미나모토 요리토모라는 인물이 실권을 장악하고는 오늘날 도쿄 서남부에 있는 가마쿠라에 쇼군의 정부인 막부를 세웠는데 이때부터 일본은 일종의 군사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평생 한 곳에 목숨 거는 자세’를 뜻하는 ‘잇쇼켄메이’는 사무라이적 정신의 근간이자 일본적 정신성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후 원래 경호원이었던 그들은 점차 일정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영토를 소유하게 되면서 봉건시대의 영주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소작농 제도를 이용해 농민을 지배하면서 토지를 관리하고 때로는 확대하고 다시 후손에게 증여하는 역할을 자신의 숙명처럼 여기는 삶을 살아왔죠. 사실 사무라이는 칼을 두 자루씩 들고 다니는 이미지로 정형화되어 있는데 원래 이들은 승마와 활을 중시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말에 올라 활을 쐈고 승부가 나지 않을 때만 칼을 썼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미지 ‘칼 두 자루를 든 모습’이 자리 잡은 것은 전국의 영주들이 영토전쟁을 벌이던 16세기 센고쿠 시대인데, 불순물이 많은 모래에서 추출한 철을 주원료로 칼을 만들다 보니 부러지기 쉬워 비상용으로 한 자루를 더 휴대하게 됐고 그것이 강렬한 이미지를 풍기다 보니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됐죠.

원래 사무라이라는 계급은 원하면 누구나 될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면서부터는 신분 이동이 제한됐습니다. 그때부터 신분 대물림은 물론 막대한 특권을 누리게 됐죠. 아래에서 좀 더 설명하겠지만 우선 사무라이라는 것이 백제시대의 무사 집단 ‘싸울아비’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최근 몇십 년간 일본인들은 이 주장 때문에 상당히 불쾌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일본 고유의 전통에 조센징 뿌렸다’라는 말로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것인데, 자신들이 유지, 발전시켜 온 사무라이가 어느 날 갑자기 고대 한반도에 어느 국가에 존재한 무사 집단을 모방한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요.

사실 사무라이라는 단어가 싸울아비라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해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2002년 한국에서는 ‘싸울아비’라는 영화도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무라이는 싸울아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싸울아비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62년입니다. 11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서울 중앙방송에 사극 ‘강강술래’를 연재하던 김영곤 작가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는데 기사에는 ‘배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작자 김영곤 씨는 옛날 무사를 싸울아비라는 현대어로 바꿔놓은 것만도 선생 아닌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고 자랑 아닌 겸손을 앞세우고 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김영곤이라는 인물이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연속극에서 싸울아비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썼고 한자어 무사를 멋들어진 한국어로 바꾼 것입니다.

이후 TV, 라디오, 소설, 영화 등에서 이 단어를 쓰면서 원래 존재하던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생겨났죠. 그리고 1981년 김용운 교수는 한 신문사에 기고한 칼럼에서 사무라이가 옛날 한국에서 건너간 싸울아비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부여족이나 고구려의 지배층은 무사들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이 사용하던 옛 한국말이 그대로 전해져 사무라이로 이어져 왔다고 했죠.

물론 이 역시 정확한 근거자료가 제시된 것은 아니고 단지 주장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시대에는 실제로 싸울아비라는 무사 집단이 존재했을까요? 그런데 이조차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싸울아비는 백제의 특수부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특수부대가 존재하기는 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조의선인’이나 ‘개마무사’가 있었고, 신라에는 ‘화랑’이 존재했었는데 당연히 백제에도 이러한 특수부대는 존재했을 겁니다. 다만 그 이름이 명확히 전해지지는 않고 통상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의 5만 대군을 맞아 작렬하게 전사한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를 싸울아비라고 부르기는 합니다.

결론적으로 백제의 싸울아비가 일본의 사무라이가 됐다는 주장은 조금은 과한 억측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비록 사무라이가 백제의 싸울아비에서 유래한 것은 지어진 이야기지만 사무라이의 본산에는 한국과 관련된 슬픈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일본을 지탱해 온 사무라이는 무가, 즉 무술 집단입니다. 조선에서는 문에 좀 더 중점을 두었지만, 일본에서는 무를 중시해 왔습니다. 일본에서 무가의 본산은 ‘가마쿠라’라는 지역인데,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곳입니다. 가마쿠라는 일본 최초의 무신정권 막부가 들어선 곳이면서 불교문화의 본산이기도 합니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본산도 가마쿠라, 살생을 업으로 삼은 사무라이의 본산도 가마쿠라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불교문화 발상지인 만큼 가마쿠라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불상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가마쿠라 다이부스쓰’, 한국어로 가마쿠라 대불입니다.

워낙에 유명한 불상인 덕택에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두 딸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찾기도 했다고 하죠. 어쨌든 높이 13.4m에 12톤의 무게를 가진 불상의 나이는 850살인데, 이 불상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247년입니다. 당시 나무로 제작했으나 태풍에 무너져 5년 뒤 다시 청동으로 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요.

가마쿠라 대불은 여타 불상과는 달리 자세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과도하게 크고 얼굴도 각진 사각형 형태이기 때문에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데 이 대불 뒤에 한국의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명성황후가 자기 아들, 즉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경복궁에 세웠던 법당 ‘관월당’인데요.

아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모성애가 스민 건물입니다. 그런데 경복궁에 세웠던 이 건물은 어쩌다 일본에 건너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버려진 것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건물 앞 표지판에 나타나 있습니다.

‘단청으로 채색된 이 건물은 원래 서울 조선 왕궁에 있던 것으로 1924년 스기노 키세이 씨에 의해 이곳에 기증되었습니다. 가마쿠라 33관음 영장의 23번째 절인 이곳에는 에도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조 관음보살입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이죠.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한국 궁궐에 있던 관월당을 왜 일본인이 일본에 기증하느냐 말이죠.

사건의 발단은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4년 조선 왕실은 조선척식은행에 이 관월당을 담보로 대출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행은 악화일로를 걷는 재정 상황을 타개하고자 야마이치증권이라는 회사에서 융자받아 파산을 면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 야마이치증권을 설립한 이가 바로 스기노 키세이 재벌인데 융자에 대한 답례품으로 관월당을 받게 됩니다.

그는 즉각 이 관월당을 해체해 일본에 있는 자기 개인 별장으로 이택했고 이후 시간이 흘러 사찰에 기증한 겁니다. 그러나 2010년경 부당 환수를 주장했던 한국의 자승 스님이 일본의 니오카 료코 스님과 약속해 한국으로 돌아올 것으로 보였으나 이후로 별다른 진척이 없어 아쉬운 상황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상당수를 반환받았습니다. 문화재 대략 1,500점과 더불어 2011년에는 조선왕실의궤를 반환받았죠.

그러나 일본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문화재가 산적해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무엇이 반출됐는지도 모를 만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문화재청에 따르면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가 15만 점이 넘는다고 하죠. 그리고 그중 절반가량이 일본에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스민 소중한 문화재를 반드시 되찾아와야겠습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