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에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곡이 있습니다. 제가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로 배 채우거나 초근목피의 그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닙니다만 제 아버지 세대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지난 가을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심은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4, 5월이 되면 극도의 배고픔을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풀뿌리를 캐 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그 시기를 견뎌내셨고 1960년대를 살아내신 많은 분이 그러했죠.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롭게 태어나거나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약 85개국인데 그중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습니다. 세계은행 기준 1962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은 110달러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죠.
심지어 현재 최빈국에 속하는 아프리카 브룬디나 소말리아, 콩고도 한국보다 잘 살았고, 잠비아는 한국보다 10배 더 잘 살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웠던 시기 한국의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준 이들은 독일로 파견된 파독 광부 및 간호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과거사위원회의 역할이 컸습니다. 물론 2014년 개봉한 국제시장의 역할도 상당했죠.
2008년 과거사위원회는 1960, 70년대 한국의 광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파견 근로자로 일하면서 임금의 일부를 고국으로 송금함으로써 한국의 경제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며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억 153만 달러로 그 시절 총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로 한국의 경제 발전에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죠.
그런데 이 비슷한 시기에 20배 가까운 외화를 벌어들인 한국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단순 비교가 어렵겠지만 당시 태평양 한가운데서 어마어마한 외화를 벌어들이던 참치잡이 원양어업을 좀 알아볼까 합니다.
1957년 8월 15일 오전 10시, 인도양 니코발아일랜드에서는 한국인 선원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함성을 듣고 뛰어간 선장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하얀 파도를 가르며 90kg에 달하는 거대한 참치 한 마리가 낚싯줄에 걸려 배 위로 끌려 올라왔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참치를 포획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지금이야 세계 1위의 참치 원양어업 기업도, 미국 내 1위 참치캔 브랜드도 한국이 가지고 있고, 40척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양어선을 보유한 참치 강국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미약했습니다. 전쟁 후 4년 뒤 1957년 6월 29일 한국 최초의 원양 출어라는 부푼 꿈을 가득 안은 선박 한 척이 선원 27명과 함께 부산항을 떠나 인도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원양어업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선박이 있는데 이날 출항한 지남호입니다. 원래 지남호는 원양어업을 위해 건조된 선박은 아닙니다. 이 선박은 1946년 미국 정부가 시애틀 수산시험장의 연구 활동을 목적으로 건조한 종합시험 조사선으로 3년 뒤 우리나라가 원조자금 32만 6천 달러를 지불하고 도입했습니다.
250톤급의 디젤엔진을 장착한 지남호는 냉장실, 방향탐지기, 수신탐지기, 어군탐지기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고 할 만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한국은 이 선박을 인수해 원형어업에 썼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를 건져 올리라는 의미로 지남호라는 선명까지 지어줬죠.
사실 큰 관심을 받으며 한국으로 들여왔지만 1957년 출항 때까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왜냐하면 국내에서는 250톤급 선박을 어선으로 활용하거나 이 최첨단 장비들을 사용할 만한 경험 있는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제동산업이 1951년 지남호를 인수하면서 원양 출어를 꿈꾸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출항 전 지남호가 잡은 어획물을 구매할 외국업체를 찾았지만 ‘과연 한국이 참치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며 대부분 거절했으니까요. 그러다 사모아의 한 통조림 회사가 구매할 계획을 알려오며 1957년 첫 출항을 떠나게 됐죠.
부산항을 떠난 지남호는 우선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입항해 약 열흘간 원양으로 나가는 데 필요한 부분을 수리하고, 연료와 선용품, 음식 등을 보충했습니다. 그리고 대만 가오슝에 도착해 첫 낚싯줄을 던져봅니다만 결과는 당연히 실패! 원양에서 참치를 잡는 어업방식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선망어업, 또 다른 하나는 연승어업입니다.
선망어업은 직사각형의 그물로 참치 떼를 둘러싸서 잡는 방식이고, 연승어업은 긴 밧줄인 연승에 수천 개의 낚싯줄을 매달고 그 끝에 미끼를 아 참치를 잡는 방식입니다. 당시 지남호는 연승어업 방식을 썼습니다만 선원들에게는 참치를 잡는 노하우도 없고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죠.
그러다 첫 성과를 낸 곳은 인도양입니다. 당시 연료를 살 돈이 부족했었는데 싱가포르의 유일한 한국인 무역 회사가 연료 구매대금을 빌려줬고 이 돈으로 연료를 채워 인도양으로 떠났죠. 그리고 마침내 출항 48일째인 8월 15일 광복절에 처음으로 참치 한 마리를 잡아 올렸습니다.
사실 이날 잡은 것은 참치가 아니라 청새치라는 어종이었는데 이렇게 거대한 청새치를 본 적이 없는 선원들이 이를 참치라 불러서 그렇습니다. 그 크기가 무려 90kg에 달했죠. 이 소식은 즉각 국내에 알려졌고 이후 8월 30일까지 조업을 계속한 결과 하루 평균 700kg가량의 참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10월 11일 부산으로 귀항했죠. 첫날 잡은 청새치는 즉각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그가 경무대에서 남긴 기념 촬영 사진이 대통령 기록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원양어업이 본격화된 겁니다. 당시 인도양에서 잡은 참치는 국가적인 관심사였습니다.
이 전 대통령도 직접 청새치를 가져온 심상준 제동산업 대표를 만나 너무 수고했다며 응원하면서도 이 일이 너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참치잡이로 큰돈을 벌던 일본이 우리를 방해할까 봐 우려했던 겁니다. 그래서 지남호의 참치잡이 성공은 상당 기간 엠바고로 설정되기도 했죠.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참치를 조금씩 잘라 주한 외교관들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제동산업은 어획물 50톤 중 5톤을 미국에 수출해 참치 수출의 길을 열었는데요. 1960년대 초 한국 경제는 참혹한 수준으로 전쟁을 겪으며 그나마 있던 산업 시설마저 붕괴됐고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아무런 기반 시설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원양어선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외교 관계도 수립하지 않은 나라까지 진출해 오대양을 누비며 귀중한 달러벌이를 했습니다. 참치, 명태, 오징어, 꽁치, 민어 등의 원양 어획물은 어차피 해외 자원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출품에 수반되는 원자재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외화가득률 100%에 달했습니다.
단 1달러의 외화가 귀중하던 시기 우리 원양어선들은 경제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죠. 어쨌든 지남호가 1957년 원양어업을 시작한 이래, 전 세계 오대양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원양 어획물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1975년에는 50만 톤을 돌파했고, 1992년에는 최고치인 102만 3,926톤을 기록했죠.
어선수도 1958년까지 지남호가 유일했는데 1977년에는 850척까지 급증했습니다. 이들의 외화 벌이는 실로 대단했는데요. 지남호가 1957년 시험조업 후 1958년부터 1979년까지 벌어들인 외화가 약 20억 달러로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가 벌어들인 외화의 약 20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1971년 당시 우리나라 총수출액의 5%를 차지할 정도로 금액 면에서 기여도가 상당했죠. 물론 외화벌이 규모만으로 파독 근로자들이나 중동 근로자들과의 역할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1960, 70년대 원양어업이 현대의 반도체 산업처럼 당시 우리나라의 블루칩 산업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 선원들의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대양의 거친 파도와 싸우며 힘겹게 물고기를 잡았고 많은 선원의 희생이 뒤따랐죠. 해외에서 조업하다 순직한 원양 선원들을 안장한 해외 원양 선원 묘지는 스페인 라스팔마스, 테네리페, 사모아, 수리남, 타히티, 피지, 앙골라, 세네갈 등 모두 8개소로 300명이 넘는 영령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외에 안장된 분들도 계시지만 사망 후 고국으로 이송되어 안장된 분들과 아직 파악되지 못한 분들도 있을 수 있어 순직한 선원들의 수는 몇 배는 더 될 겁니다.
에너지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지구에 모든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자원의 한정성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는 양을 정해두지 않고 무분별하게 이용했는데 그 결과 현재 대부분의 자원은 머지않은 미래에 고갈을 앞두고 있고 동물과 식물은 멸종위기를 맞고 있죠. 참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90년대 들어 남획에 따른 다랑어 자원 고갈의 우려가 제기되면서 대양별 어획 쿼터제가 도입되기 시작했죠. 이를 참다랑어 쿼터제라고 부르는데 해역별로 그 해역에 속한 국가 간 연간 포획할 수 있는 양을 정해두고 정해진 양만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물론 한국은 이 쿼터제를 꼼꼼하게 지키고 있죠. 그래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참치 양식입니다.
즉, 잡아먹는 시대가 아니라 키워 먹는 시대로 접어든 겁니다. 참치 양식은 전 세계에서 소비량이 가장 많은 일본이 앞섰습니다. 참다랑어의 자원 고갈을 예상한 일본은 이미 1970년대부터 몸값이 가장 비싼 참다랑어 양식에 도전했는데요. 호주, 멕시코 등도 1990년대부터 어린 참다랑어를 포획해 양식에 도전했는데 일본이 전 세계 시장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어린 참다랑어를 포획해 성어로 기르는 축양 방식으로 생산 중입니다. 양식은 크게 완전 양식과 축양이 있습니다. 완전 양식은 말 그대로 참다랑어 새끼를 길러 어미로 키운 후, 수정란을 얻은 후 이를 키워 다시 수정란을 얻는 겁니다.
즉, 수정란부터 성어까지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죠. 이 분야에서 성공한 국가는 현재 일본이 유일합니다. 다른 방식은 축양방식이라 하는데 이는 어린 참다랑어를 잡아 성어로 키워 출하하는 겁니다. 완전 양식과는 다르죠.
현재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축양방식을 사용 중이고 한국의 경우 201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포획한 어린 참다랑어를 어미로 키워 수정 및 부화까지 성공했으나 어미까지 성공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조만간 성공해 낼 것으로 예상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참다랑어를 소비하는 일본 시장도 공략하고 국내에서도 좀 더 저렴한 참다랑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