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텍스트 YouText 글로 읽는 동영상

터키 대지진으로 재조명되는 ‘형제의 나라’의 역사… 무려 1,500년이라고?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튀르키예 터키

지난 2월 6일, 규모 7.8의 강력한 지진이 터키와 시리아를 강타하며 발생한 희생자 수가 2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지진 발생 후 72시간이라는 골든타임까지 지났음에도 어떻게 해서든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는 구조대의 필사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고, 전 세계 각국은 구조대를 파견해 대재앙을 수습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사망자 수가 2만 명을 넘어서면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사망자 규모를 넘어섰는데, 부디 더 이상 희생자 수가 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사고로 희생된 분들을 애도하며 유가족분들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얼마 전 한 구독자분께서 “터키에서는 우리나라를 형제 나라라고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던데, 왜 우리만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지 궁금하다.”라는 취지의 질문을 남겨주셨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질문하신 것이지만, 최근의 사고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터키가 진짜 형제의 나라가 맞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콘텐츠가 될 것 같습니다.

우선 터키는 작년부터 ‘튀르키예(튀르크인의 땅)’라는 이름으로 국가명을 변경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던 ‘터키’가 영어로는 ‘칠면조’를 뜻하고, 이 단어가 ‘겁쟁이’를 뜻하기도 해 불만 여론이 높아 아예 ‘튀르크인의 땅’이라는 의미인 ‘튀르키예’로 변경해 버렸습니다.

그럼 튀르키예와 한국은 언제부터, 어떻게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요? 그 긴 역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지난 2018년 한국과 튀르키예 양국에서는 1년의 시차를 두고 개봉한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아일라’라는 영화인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터키 병사 ‘슐레이만’과 전쟁 중 부모를 잃은 고아 ‘김은자’ 씨의 실화를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인데요.

실화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튀르키예는 한국전쟁 당시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젊은이를 파병한 참전국입니다. 튀르키예의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사건 중 사상 처음으로 자국의 젊은이를 파병해 한국전쟁에 개입했는데, 이 덕분에 양국은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 뒤, 튀르키예는 의회의 동의 절차를 생략한 채 최초 4,500명 규모의 파병을 결정했고, 즉각 UN 안보리에 통보했습니다.

1여단은 장교 259명, 관리자 22명, 부사관 395명, 병사 4,414명 등 총 5,090명으로 구성됐고, 이들이 10월 초 한국에 도착하는데요. 일반적으로 튀르키예는 한국전쟁에 22,006명을 파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최초 파병 이후 추가로 계속해서 파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참전국들과 조금 달랐던 것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 재건을 위해 지속적으로 한국으로 군인을 보냈다는 점입니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매년 1개 여단씩 총 10개 여단을 파병했고, 1961년부터 1966년까지는 소규모 부대로 이루어진 소대를 파병했는데요.

1971년까지 머물면서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하고 수백 명의 전쟁고아에게 쉼터와 식량을 제공했죠.

전쟁 당시 전투병으로 참전한 튀르키예의 젊은이 741명 사망, 166명 실종, 2,068명이 부상당했는데, 이는 참전국 중 미국, 영국에 이어 3번째였습니다.

부산의 UN군 묘지에는 462구의 튀르키예 군인이 잠들어 있는데, 이들이 튀르키예로 송환되지 않은 것은 전사하면 24시간 이내에 군복을 입힌 상태로 전쟁터에 묻는 튀르키예 풍습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파병 당시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최초 파병을 결정한 것은 1950년 7월 18일이고, 4,500명의 파병군이 모집된 것은 약 9월 중순입니다. 이 사이 튀르키예에서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시위의 이유는 “형제의 나라에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왜 파병이 늦어지냐?”라는 것이었습니다.

‘터키 민족 학생연합’은 “자유와 인류애를 실현할 의무가 있는 터키 민족에게 내려진 기회”라며 서둘러 파병을 촉구해 한국을 도울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의 파병이 결정된 겁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참전국을 수소문할 때 가장 먼저 파견 의사를 밝힌 국가였던 만큼 한국에서 튀르키예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잠시 언급했듯 튀르키예인들의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는데, 이슬람교도는 이장하지 않고 전쟁 중 사망하면 24시간 이내에 곧바로 전쟁터에 시신을 묻는 풍습이 있는데요. 그래서 현재 UN군 묘지에는 462구의 튀르키예 전사자가 안치되어 있는데, 참전 기념비에는 특이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잃은 날짜가 대부분 1950년 11월 29일이라는 점입니다. 11월 29일 하루에만 218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튀르키예 병사가 희생당한 것일까요?

그 원인은 중공군에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한국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100만 단위가 넘어서는 대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곳곳에 투입됐습니다.

산발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던 중공군은 11월 27일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는데, 동북부의 장진호와 남서부의 군우리가 주공격지였습니다. 그중 ‘청천강 전투’라고도 불리는 군우리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UN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전세가 재역전된 시점에 일어난 격전을 말합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투에서 미군 제9군단 제2사단에 배속된 튀르키예군 제1여단은 군우리와 순천 간 협곡지대의 와원, 신립리, 개천, 덕천 등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육탄전으로 맞서 중공군에게 5,0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안겨주면서 미 제8군이 철수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였고, 튀르키예군은 한국전쟁 전체 사망자 수의 40%를 이 전투에서 희생당했습니다. 육탄전까지 불사했으니까요.

지구 전체를 다 준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과 바꿀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지구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 자신의 목숨인데, 이는 튀르키예인들도 같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모국도 아닌 멀고 먼 극동까지 달려와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습니다.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그저 최선일만큼 미안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특이합니다. 한국전쟁에는 총 16개의 국가가 참전했는데, 그중 튀르키예만은 형제라고 부르니까요.

사실 한국으로의 파병 결정은 그 내부 사정에서 기인합니다. 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는 600년 이어온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지속적으로 서방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국제무대에서 자유주의로도, 공산주의로도 쏠리지 않고 철저하게 중립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전쟁의 화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립을 고수한 대가로 전후 전 세계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하며 소련의 위협은 커져만 갔죠. 소련은 중립을 고수하던 튀르키예를 유럽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지속적으로 유혹했는데, 소련의 군사기지를 공여해 달라는 것과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공동으로 관리하자며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튀르키예의 입장에서 보자면 딜레마였는데요. 자신들의 영토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요한 위치이기는 하지만, 유럽에는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국가들이, 유럽 바로 옆 소련 근처에는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국가들이 포진해 있어 잘못했다가는 전쟁의 원흉이 될 위기였으니까요.

결국 선택은 자유주의 진영이었습니다. 자유주의란 자고로 정치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하는바, 1당 체제에서 벗어나야 했는데요. 결국 튀르키예는 공화인민당에서 탈당하거나 제명된 인물들이 모여 1946년 ‘자유경제와 민주정치 체제 수호’를 외치며 민주당이 창당됩니다.

양당 체제로 전환되고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터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NATO에 가입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NATO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데, NATO는 1949년 미국이 유럽 국가들과 연합해 체결한 집단 안전보장조약입니다. 소련을 견제할 목적이었죠.

그러나 튀르키예의 지리적인 위치가 독특한데, 아시아 쪽으로 영토의 97%, 유럽 쪽으로 영토의 3%가 걸쳐 있습니다. 만약 튀르키예가 NATO에 가입하지 못하면 소련이 튀르키예를 공격해도 혼자서 맞서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하지만 NATO에 가입하면 회원국들은 조약 제5조에 따라 집단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습니다. 즉, 회원국 중 어느 국가라도 외부의 공격을 받는다면 이는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회원국 전체가 지체없이 공격이 가능해집니다.

이에 튀르키예는 1950년 5월 11일, 처음으로 NATO 가입을 공식적으로 신청했고, 1950년 8월, 두 번째 가입 신청서를 냈으나 모두 거부당했죠.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애매한 지리학적 위치와 더불어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으로 파병을 발표했음에도 서방국들의 신뢰를 얻어내지 못했죠.

하지만 군우리 전투에서 신화에 가까운 성과를 올리면서 1951년 9월, NATO는 튀르키예를 회원국으로 승인했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에 참전해 중공군에 맞서 목숨 바쳐준 고마운 나라가 튀르키예였고, 튀르키예의 입장에서는 NATO 가입의 결정적인 교두보가 된 한국전쟁으로 자신들의 평생 안전을 보장받게 해 준 고마운 나라가 한국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서로를 ‘형제의 국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한국과 터키는 무려 1,500년 이상 연결된 관계라는 점을 잘 아시나요? 한국과 현 튀르키예와의 관계는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튀르키예는 한자로 표시하면 ‘돌궐’인데, 이는 ‘튀르크’를 의미하며, ‘튀르키예’는 ‘튀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혼인해 우호관계 이상의 돈독한 동맹관계를 유지했었고,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유민들은 돌궐족으로 망명하기도 했는데요. 이로써 고구려인의 피가 돌궐족에 남아있는 겁니다.

역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흉노족’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기원전 4세기 후반, 몽골고원은 흉노족이 통일해 다스리고 있었는데, 흉노의 기마군단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국가들에는 사신과 같았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흉노족을 막기 위함이었죠.

그러던 흉노족은 분열을 일으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어느 순간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역사에 전면으로 등장합니다.

서기 374년경 훈족의 왕 ‘아틸라’는 동로마, 서로마, 갈리아, 이탈리아를 차례로 침공하면서 거대한 국가를 건설했는데, 훈족의 등장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촉발됐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그야말로 세계사를 뒤흔든 사건이었죠.

하지만 아틸라가 사망하면서 빠르게 등장했다가 갑자기 퇴장하는 초원의 방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800년 뒤 전무후무한 정복자 ‘칭기즈칸’이 등장합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한 점령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정복한 땅은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한 모든 땅을 합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습니다. 몽골 제국을 통일한 후 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까지 역사상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했죠.

하지만 그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새로운 아시아의 군대가 유럽을 침투합니다. ‘오스만 투르크’인데요. 바로 흉노족에 이어진 돌궐족, 즉 투르크인입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끝까지 진격했는데,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 우즈벡족,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투르크맨족, 아제르바이잔족, 위그르족을 남겼습니다. 바로 이들이 전부 튀르크인의 후예입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튀르키예를 거쳐 마지막 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까지 점령하며 또다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죠. 그리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당시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프를 이스탄불로 고쳐 수도로 삼은 후 현재 튀르키예 영토에 정착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겁니다.

1922년 건국한 터키공화국이 바로 오스만 투르크 대제국이죠.

한국과 튀르키예를 제외하면 아마 하늘 아래 1,500년 동안 우호관계를 이어 온 나라는 없을 겁니다.

국제 관계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것이 아주 오래된 국제 질서이지만, 한국과 튀르키예만큼은 지난 1,500년을 그래 왔던 것처럼 영원한 우방이기를, 그래서 현재 튀르키예가 겪는 대재앙의 아픔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