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인 교수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펜실베니아 주립대의 ‘샘 리처드’ 교수를 꼽을 겁니다. 매 학기 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강 신청하는 SOC 119 수업은 모든 내용을 유튜브로 스트리밍 하고 있는데, 최근 몇 년간 그의 수업 주제는 단연 ‘한국’과 ‘한류’ 입니다.
한국에서 그가 유명해진 것은 2018년 수업 도중 미국인 학생들에게 우물 안 개구리로 살지 말라면서 BTS와 소주를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됐는데요. 당시 그는 “맥주나 와인 말고 도수가 조금 높은 술 중 가장 인기 있는 술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학생들은 정답을 쉽게 맞히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대학촌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주’를 모른다는 것이 놀랍다!”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는데요. 그의 이 말은 거짓 한 스푼 담지 않은 진실입니다.
작년 초 틱톡에서 ‘크라운미큐티’라는 계정 사용자는 소주를 한 병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합니다. 소주의 쓴맛을 본 그녀는 “이거 술 맞네!”를 몇 번이고 외치면서 영상은 종료됩니다.
한때 한국인은 할리우드 배우가 인터뷰 도중 김치를 먹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고는 했는데, 외국인 여성이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모습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예전 할리우드 배우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김치를 먹어야 했지만, 이제는 소주를 마시는 것이 외국인 사이에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기 때문이죠. 이른바 한류의 힘입니다.
보통 외국인 사이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는 유튜브 ‘먹방’과 틱톡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틱톡에 ‘soju’라고 검색해 보면 관련 영상이 6억 회가 넘습니다.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이 소주를 마시는 모습, 리뷰하는 모습, 한국식 소맥을 제조하는 모습 등등이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축하할 때도, 위로할 때도 빠지지 않는 이 소주는 어떻게 전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을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충북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라는 마을에 가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별다를 것 없는 이 공장이 특이한 것은 이 장소가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이라는 것이고, 더 특이한 것은 이 공장을 운영하는 소유주가 래퍼 에미넴을 닮은 파란 눈의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양조장이라니 믿기지 않겠지만, 외국인이 만드는 이 소주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태생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미국 뉴욕이 고향이니까요.
지난 2011년, 경기대학교 수수보리 아카데미에서는 한국의 전통주 수업이 열렸습니다. 이 과정은 한국에 몇 안 되는 전통주 교육기관으로 막걸리 문화부터 시작해 양조과학, 술 개발 및 교육을 진행했는데요.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는 언뜻 래퍼 에미넴을 닮은 뉴요커 ‘브랜드 힐’이라는 파란 눈의 외국인도 앉아 있었죠. 원래 그는 21살 때부터 양조법을 배우기 시작해 진, 럼, 보드카와 같은 중류주와 다양한 방식의 맥주를 만들었는데, 그 취미를 살려 전 세계 70여 국을 다니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술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다 2011년에 한국에 왔다가 한국 술에 푹 빠졌는데, “이런 나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라면서 그냥 1년간 눌러앉아 한국의 전통주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다 그가 불만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뉴욕으로 돌아간 후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한국 음식의 인기는 대단한데, 함께 마실 술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불만이었습니다. 맥주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인데, 왜 한국 술은 그렇지 못한 지 늘 아쉬웠고, 일본의 사케를 마시자는 친구들에게 그 나라 음식은 그 나라 술과 함께해야 한다며 한국 술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냥 내가 소주를 만들면 어떨까?”라며 한국에서 배운 전통주 제조법을 써먹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머물 당시 전국의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전통주 제조법을 배웠는데, 그렇게 4년의 연구 끝에 탄생한 것이 찹쌀과 9일 발효시킨 누룩으로 만든 증류주 ‘토끼 소주(TOKKI SOJU)’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그가 한국을 방문했던 2011년도 토끼의 해였고, 그는 자신이 만든 소주에 ‘토끼’라는 이름을 지었는데요.
토끼 소주는 출시하자마자 맨해튼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정식’을 비롯한 한식당들에 납품했고, 일부 주류 판매점으로도 유통됐습니다.
도수는 23도이고 가격은 조금 높지만, 미국 언론 <블룸버그>가 “전통 방식으로 한국 소주를 만드는 미국인”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한국인 사이에서는 뉴욕에 가면 꼭 사 오거나 맛봐야 하는 인증품이 됐습니다.
그러던 브랜드 힐 대표는 2019년, 충북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에 양조장을 만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한국으로 가져왔는데요. 그가 충주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식품이 그러하듯 원재료가 상당히 중요한데, 소주를 만드는 재료인 찹쌀을 수급함에 있어서 생산량이 많고 품질이 우수한 충주가 제격이었기 때문이죠.
또한 자신이 한국의 주류 시장 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소주의 주 시장인 한국에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야 하고, 그 방법으로 한국 재료를 사용하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일본의 사케가 그랬던 것처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 그의 원대한 목표이기도 한데요.
한편 한류가 거대한 물결을 이루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사이에서 소주의 인기는 대단합니다. 한국 편의점이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방문 장소로 급부상했는데, 그 편의점에서 꼭 사야 할 것이 바나나우유, 불닭볶음면 그리고 참이슬이라고 합니다.
한류가 일찍이 자리 잡았던 일본에서는 코로나로 봉쇄 조치가 취해졌을 때 ‘도한(渡韓) 놀이’가 유행했었습니다. 한국 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호텔 방을 빌려 한국에 온 것처럼 행동하며 달래는 놀이였는데요. 한국 과자를 사놓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소주를 마시는 독특한 놀이가 잠시 유행했었습니다.
이런 자국민들을 본 <아사히 신문>은 “소주야말로 인생의 비애와 애증을 표현하는 한국 드라마의 명조연”이라며 소주 열풍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하이트 진로의 발표에 따르면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대일 수출액은 2019년 대비 23% 증가했고, 자몽과 청포도 등 과일 향 소주의 판매 비중도 2019년에 비해 5배나 증가했다고 하죠.
그럼 좀 더 멀리 나가 볼까요? 하이트 진로의 미국, 중국, 러시아 매출은 최근 3년간 급격히 증가했는데, 올해 상반기 매출이 758억 원으로 2019년 297억 원, 2020년 453억 원, 2021년 653억 원인 점을 감안했을 때 이미 상반기에 전년도 전체 매출을 앞질렀습니다.
이렇다 보니 영국 주류 전문매체 <드링크 인터내셔널>은 한국의 소주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로 선정했고, 21년째 이 기록은 바뀌지 않고 있는데요.
그런데 소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동남아 지역에서 소주를 상징하는 녹색병에 ‘건배’, ‘태양’, ‘참좋은’ 등과 같은 한글이 적힌 짝퉁 소주가 등장한 겁니다. 일단 한글이 기재되면 한국 상품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은 점을 악용한 건데요.
태국과 캄보디아 등지에서 판매되는 ‘건배’는 제품 라인도 다양합니다. 15도의 ‘건배 프레시’부터 복숭아, 젤리, 요거트 등으로 그 맛 역시 다양합니다. 태국의 에너지드링크 회사인 ‘카라바오’의 자회사는 ‘태양’이라는 제품을 생산해 유통하고 있는데, 이 역시 녹색병에 한글 라벨을 부착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참이슬의 짝퉁이 등장했는데, ‘참좋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녹색병의 글자체까지 참이슬을 고스란히 본뜬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인기의 척도는 그 짝퉁의 등장 여부로 가늠한다고 봤을 때 짝퉁 소주는 아마 한류가 종식되지 않는다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제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가 왔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소주의 세계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그 한계는 분명하다고 지적합니다. 중국의 백주, 일본의 사케 등과는 달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주임에도 인지도가 낮고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저렴한 주류라는 이미지에서 그치지 말고 고급화에도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일품진로나 화요, 그리고 최근 많아지기 시작한 고급 증류주가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더 다양한 고급 소주가 등장해 전 세계로 수출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팬데믹 사태는 전 세계인에게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지만, 묘하게 한국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한국 영화, 드라마, 음악 등 콘텐츠의 집중적인 소비가 일어났고, 이는 봉쇄 완화와 동시에 관광수요로 이어집니다.
당연히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수억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대기 중이라는 의미인데, 그들이 부디 안전하고 즐겁게 소주 한 잔 즐기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