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유배를 간 왕의 딸”
공신옹주(1481년~1549년)는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의 딸로,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 엄 씨였으며, 이복 오빠가 연산군이었습니다. 공신옹주는 1481년(성종12년), 성종과 귀인 엄 씨의 사이에서 태어나 한명회의 손자인 한경침과 14세의 나이로 혼인을 하게 됩니다.
이때 남편 한경침은 청령위에 봉해졌고, 성종은 공신옹주의 하가를 위해 집을 지어주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사가의 위치는 을지로 4가와 을지로 5가를 이어주는 곳에 있었던 청령교(현재는 없음)라는 다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는 공신옹주와 청령위 한경침이 근처에 살면서 불리게 된 이름이었습니다.
한편 공신옹주의 어머니 귀인 엄 씨는 성종의 또 다른 후궁인 귀인 정 씨와 함께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를 폐위시키고 사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연산군이 조선 제10대 왕에 오른 후 1504년(연산군 10년) 폐비 윤 씨의 복위 문제로 인해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되고, 이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며 귀인 엄 씨와 귀인 정 씨를 때려죽이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귀인 엄 씨의 유일한 자식인 공신옹주 역시 무사할 수 없었고, 결국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한 후 폐서인이 되어 아산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공신옹주가 18세 때 세상을 떠난 남편 한경침 또한 직위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아산에서 위리안치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가시나무를 밖에 둘러쳐서 집 밖을 전혀 나갈 수가 없는 가혹한 유배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죽고 죄인의 신분이 되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나갔습니다.
공신옹주는 갑자사화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게 되지만, 유일하게 챙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남편의 신주였습니다. 그녀는 유배지에 남편의 신주를 몰래 가지고 가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무엇을 먹든지 간에 신주에 먼저 바친 다음에 먹습니다.
이후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공신옹주의 작위도 회복됩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올 때 신주를 앞세워 온 그녀의 모습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면서 중종은 공신옹주의 절개와 의리가 뛰어나다며 곡식을 하사하고 정려문을 세우게 합니다. 그리고 <삼강행실속록>에 옹주의 절의를 추가하여 싣도록 명하고, 공신옹주가 유배를 갔을 때 빼앗긴 인천 삼목도를 다시 돌려주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왕실의 지원 아래 편안하게 살았고, 자식이 없었던 옹주는 말년에 외가인 영월 엄 씨 가문과 남편인 한경침의 제사를 위한 후사를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공신옹주는 남편을 그리며 평생을 수절하다가 1549년(명종 4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공신옹주와 한경침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별내지구가 조성되기 전에 발견되었는데, 그녀의 묘는 이미 도굴된 상태라 특별한 유물을 수습하지 못했지만, 백자를 재료로 쓴 백자묘지명을 발굴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그녀가 성화 신축년(1481년)에 태어나서 가정 기유년(1549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