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러분은 한국사에서 사라져 버려 반드시 찾아야 할 역사적인 무기 세점의 존재를 알고 계시나요?
그 첫째는 이성계가 쓰던 ‘어궁’이고, 둘째는 이순신 장군이 쓰던 ‘쌍룡검’이며, 셋째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때 사용한 ‘M1900 권총’입니다.
이성계 어궁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장수 시절부터 수많은 전투에 사용하던 실전용 활로써 일제강점기까지 함흥본궁에 남아 있었으나 6.25 전쟁통에 불에 타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쌍룡검은 1910년 한때 왕실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가 소장고로 들어갔으나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죠.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에서 사용한 M1900 권총은 존 브라우닝이 만든 역사상 최초의 자동 권총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얼빈 안중근기념관이나 한국 독립기념관에서도 이와 전혀 상관없는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전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공판 기록에는 M1900이 증거품으로 제시되었으므로 이것이 의거에 사용된 실제 무기입니다.
공판의 증거품으로까지 제시됐던 이 총이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고, 일본 측은 ‘관동 대지진 때 분실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일본 측에서 의도적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세 점의 무기는 실물 사진이 남아 있다는 점, 그리고 모두 실물이 사라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 무기들은 실전에서 역사를 바꾼 무기이면서 각각 활, 칼, 총으로 대표되며 한국의 무기 발달사에서도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여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활 만큼이나 귀신같이 다뤘던 전설적인 장검의 한 자루 있습니다만, 이 장검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보통 우리 조상을 두고 오랑캐들은 ‘신궁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올림픽에서 양궁 종목을 대한민국이 석권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활을 귀신같이 쏜다’는 의미인데요. 이 신궁의 원조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였습니다. 사실 변방 출신인 이성계를 단번에 스타로 만든 것은 그의 활쏘기 실력이었습니다.
고려 북방과 남방을 넘나들며, 고려를 괴롭혔던 홍건적과 왜구를 단 번의 실패도 없이 격퇴한 그는 곧 백성들의 우상이 됐죠. 그중 그의 활쏘기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려주는 실화가 남아 있는데요.
고려 말 왜구는 고려 사회를 극도의 혼란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당시 왜구가 고려를 침략한 횟수가 무려 378회로 알려졌는데, 약 1380년경 선박 500여 척으로 충남 서천에 침입했던 왜구는 최무선의 화포 공격에 모든 배를 잃었는데요.
오히려 내륙 지방으로 침투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이 왜구를 막을 적임자로 이성계를 꼽았는데, 이성계에게도 이 전투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왜구는 10대 정도로 앳된 얼굴에 아지발도라는 적장이 이끌었는데요.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자유로의 전장을 누비는 무예실력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그를 생포해 부하로 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결투를 미루고 있었는데, 점차 늘어가는 아군 피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아지발도에게 활을 겨누고는 회심의 한 발을 쐈습니다. 화살은 그대로 날아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꿰뚫었죠. 당황한 적장이 다시 투구를 고쳤었으나, 이성계가 날린 또 한 발의 화살은 반대편 투구 끈마저 끊어버렸습니다.
당황한 아지발도에게 이성계의 부와 이지란이 전광석화 같은 기습을 퍼부었고, 결국 조선 땅에서 목숨을 잃고 말죠.
이 전공으로 이성계는 당당히 조정에 입성했고, 조선을 건국하는 밑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로 마음먹고 고려 우왕에게 휘두른 것은 ‘활’이 아니라 ‘칼’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몇 년 전 개봉한 ‘도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땅속에 숨은 유물을 도굴해 돈 벌어먹고 사는 도굴꾼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꽤 흥미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눈길이 갔던 유물은 단연 ‘전어도’ 였습니다. 강동구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가 휘둘렀다고 알려진 ‘조선판 엑스칼리버 전어도’가 강남 한복판 선릉에 묻혀있다며, 이를 도굴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죠.
다만, 현실적으로 이 선릉이라는 곳은 군대 사단 1개 병력을 전부 투입해도 도굴이 불가능한데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 왕릉은 유독 검소해 부장품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더구나 조선 9대 성종의 능인 선릉은 이미 임진왜란 때 도굴 당해 부장품이 있어도 전부 사라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어도라는 검의 존재는 실제 사실입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두 자루가 소장되어 있죠.
박물관은 이 칼에 대해 ‘왕이 사용한 것이라 전해지는 칼’이라고 짧게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칼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칼인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상태로 말이죠. 아마 여러분들도 ‘위화도 회군’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려 말 1388년 우왕의 명을 받아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압록강 가운데 위치한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과 최영 등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쿠데타를 말합니다. 이 사건으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촉발됐죠.
그날 위화도에서 회군하기로 결정하고 부대에 회군을 명령했을 때, 이성계의 손에 들려 있었던 칼이 바로 전어도입니다.
물론 지어진 이야기겠지만 이성계 ‘전어도’에는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조선의 도읍 한양을 이성계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무학대사의 스승은 나옹대사라는 인물입니다. 그가 어린 무학과 함께 함흥을 지나다 한 묏자리를 보고 ‘가히 왕의 자리로다’라고 낮게 읊조렸는데 이 말을 이성계의 종이 듣게 됩니다.
종은 이 사실을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에게 고했고, 이자춘은 나옹대사를 찾아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아무리 물어도 입을 굳게 다물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죠.
스승의 묵묵부답이 답답했던 어린 무학은 이자춘에게 그 자리를 알려주었고 이자춘은 즉시 묘를 파헤칩니다. 묘를 파헤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춘은 1m가 족히 넘는 금빛 찬란한 칼 한 자루를 발견하는데요. 칼자루 끝은 용머리로 되어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이게 바로 이성계에게 전해진 전어도라고 하죠.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우왕을 베었는데, 그때 이 전어도가 반으로 쪼개졌다고 하죠. 이후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새로 만들어 바쳤다고 하는데요.
이 모조품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립고궁박물관에 모셔진 겁니다. 물론 이때 깨진 실제 칼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모조품이라고는 하지만 그 제작자가 태종 이방원인 만큼 그 역사적인 가치는 결코 뒤처지지 않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어도는 길이가 147cm에 도신은 92cm, 자루 길이가 55cm라고 합니다. 칼집 길이만도 103m라고 하니 가히 장검 중에서도 장검이 아닐 수 없는데요.
손잡이는 상어 가죽으로 보이는 어피로 감싸고, 머리에는 용두를 조각했는데 채색한 후 붉은색 매듭끈을 드리워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의 검 중에 사라진 것은 또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 1950년 3월 27일 ‘산업신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에서 유물이 대거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도했습니다. 신문에 따르면 전주 시내 경기전에서 이태조(이성계)의 유품인 용두검 2자루, 향로 2개, 촉대 4개가 도난당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은 잡혔는데, 그는 고철을 팔아 연명하던 윤막동이라는 인물입니다.
범인은 잡혔으나 용두검을 포함한 도난품은 이미 고물상에 팔린 뒤였죠. 그는 생각보다 치밀했습니다. 혹시 훔친 물건임을 알아볼까 훔친 유물 파손한 후 진흙을 묻혀 원형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한 후 고물상에 한 근당 150원에 팔아치웠죠. 장물을 매입한 고물상 역시 이를 장물인지 모르는 상태로 다른 고물상에 팔아버렸죠.
범인도 잡혔고 매각한 사실까지 확인했으나 문제는 ‘장물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유물 중에는 용두검, 즉 용의 대가리로 장식한 검이 두 자루 있었지만 이 역시 행방이 묘연했고, 두 달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통에 용두검은 끝끝내 발견하지 못했는데요. 이 내용을 추적한 이는 시민 기자 김경준 씨로 이 검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합니다. 그는 전설 속에 전해지는 전어도가 혹시 용두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어도 역시 손잡이 부분에 용두를 조각했고, 사라진 용두검 역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용두를 조각한 장검이기 때문에 형태로 봤을 때는 두검이 비슷하니까요. 하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물어본 결과, 두 칼이 동일한 유물일 가능성은 없다고 못 박았는데요. 박물관 측은 창덕궁에 소장됐던 전어도를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경기전에 소장된 용두검과는 동일한 물건일 수 없다고 했죠.
사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박물관 측은 전어도 역시 어떤 왕이 쓴 것인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조차도 확인할 방법이 없고, 이방원이 이성계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합니다. 그래서 현재도 홈페이지에는 ‘왕이 사용한 것이라 전해지는 칼’이라고 써, 그 사용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죠.
어쩌면 전어도보다 용두검이 이성계가 실제로 사용했던 칼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경기전은 대대로 이성계 어진을 포함한 유품을 보관해 왔기 때문에 실제 유품일 가능성이 더 높죠. 다만 위에 언급한 이성계의 어궁이나 전어도, 이순신의 쌍룡검, 안중근의 권총은 실물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으나 용두검은 1950년 신문에나 등장했을 뿐, 그 형태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양을 가늠하는 것도 힘듭니다.
아쉬운 것은 이 용두검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설사 알아도 이 검이 분실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지금 어느 누군가의 개인창고에 귀하게 보관되고 있을지, 어느 엿장수의 가위가 되어 엿을 자르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언제가 되더라도 이 칼이 꼭 대중 앞에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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