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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망나니’ 왕자들의 악행들… ‘연쇄살인마’까지 있었다고?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정원군은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로, 생모는 인빈 김씨입니다. 친형인 셋째 형 의안군이 일찍이 요절하고, 넷째 형 신성군도 임진왜란 초기에 요절하여 실질적으로 선조의 셋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습니다.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에게 돈을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는 범죄를 벌이게 됩니다.

또한 정원군의 노비들이 아버지 선조의 형수인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킵니다. 그의 노복들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 것입니다.

혈연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이 납치된 사건임에도 오히려 자기 집 노비의 말을 듣고 말리는 종친들을 되려 혼을 내었으며, 새벽에 돼서야 겨우 풀어줄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원군의 종들은 죽이 떡이 되도록 신나게 두들겨 맞게 됩니다.

한편 선조의 총애하는 후궁이자 정원군의 어머니인 인빈 김씨는 자기 자식 중 유력한 왕위 후보자였던 신성군이 임진왜란 때 세상을 떠나자, 세자인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고 이내 사이가 좋아지게 됩니다. 이에 발맞춰 정원군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광해군 집권 중기까지 종친으로서 합당한 예우를 받았습니다.

선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빈 김씨의 영향력을 고려해 보면 신성군보다 2살 어린 정원군을 다음 왕으로 밀 수도 있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월이 흘러 광해군 8년 정원군의 세 번째 아들인 능창군이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그 자신도 화병으로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광해군일기>의 정원군 졸기에 의하면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이후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능양군이 복수를 꿈꾸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인조입니다. 그리고 인조의 의지로 10년간의 논쟁 끝에 정원군은 대원군을 거쳐 왕으로 추존됩니다.

양녕대군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큰 형입니다. 양녕대군은 세자에 오른 뒤 동생인 충녕대군의 능력이 더 뛰어남을 알게 되어 일부러 방탕한 생활을 하며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대인배로 미화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강제로 취하는 망나니였습니다.

그는 예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누구의 여자인지 가리지 않고 탐하고, 대궐 담을 넘어 사가에 침입해 유부녀를 겁탈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상왕인 정종의 여인까지 건드리고 원로대신 곽선의 첩인 어리를 납치해 아이까지 낳게 하자, 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세자를 교체하기에 이릅니다.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 이후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들의 여인을 건드릴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니지만, 왕위에 오른 동생인 세종의 배려로 여생을 편히 살게 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수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당시 세상을 떠난 세종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게 됩니다. 결국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양녕대군은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극진히 대우받다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임해군은 제14대 왕 선조의 서장자로, 공빈 김씨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친형입니다. 임해군은 한마디로 망나니였습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민간인을 함부로 구타하고 살해했으며 남의 토지와 노비도 마음대로 강탈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측근들을 시켜 민가의 닭과 돼지까지 빼앗을 정도로 악행을 가리지 않았고, 왕자의 품위를 생각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사기 행각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실이나 국가, 또는 관료의 재산에까지 손을 대고 지방에서 서울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선조가 임해군에게 피해를 본 백성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지시하자 백성들이 거리에 뛰어나와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었을 정도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함경도에서 왜군에 사로잡힐 잡힐 정도로 무능했고,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할 정도로 포악했습니다. 심지어 친동생인 광해군 때문에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그를 상당히 미워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았던 임해군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는 끝끝내 자기 아들이라고 감싸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왕이 되자 서인, 북인, 남인 등 각 당파를 초월해 죽이라는 상소가 끝이 없었습니다. 결국 임해군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듬해에 죽게 됩니다.

<광해군일기>에서는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드디어 목을 졸라 죽였다.” <인조실록>에서는 “임해군은 이이첨의 지시로 살해당했다.”

이렇게 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만들어진 시점이 인조반정 이후였기에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당시 광해군의 세력이 임해군을 죽일만한 동기는 충분했습니다.

순화군은 선조의 여섯 번째 아들로, 후궁 순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순화군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잔혹한 성품이었는데, 아버지 선조는 그가 어려서부터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였다고 회상합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가서 미리 파견되어 있던 형 임해군을 만나 함께 회령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워 함경도민에게 패악을 부렸다고 합니다. 결국 두 왕자의 횡포에 분노한 국경인과 국세필이 왜군인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곧바로 왕자들을 사로잡아 왜군에게 넘겨버립니다.

이후 약 1년 넘게 포로 생활을 겪고 풀려났는데, 포로 생활이 원인이었는지 안 그래도 최악이던 성격이 완전히 더 막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황해도 신계에 머물 때는 10대 중반의 미성년자였지만, 신계 주민들에게 트집을 잡아 마구잡이로 때릴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또한 전쟁 말기인 10대 후반부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해 전쟁이 끝날 때는 확인된 피해자만 여러 명일 정도로 완벽한 연쇄살인마가 됩니다.

선조 32년 이후로는 매년 사람을 10명 가까이 죽였고, 오죽하면 마찬가지로 최악의 왕자인 임해군이 순화군의 행실을 꾸짖을 정도였지만, 이에 순화군은 “전 남을 패기만 하지만, 형님은 집과 전답까지 빼앗지 않습니까?”라고 발끈했다고 합니다.

어떠한 범죄를 저질러도 감싸는 아버지 선조로 인해 막 나가던 순화군은 마침내 궁궐에서 궁녀를 겁탈하는 사건을 저지릅니다. 늘 봐주던 선조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는지 순화군의 처벌을 지시했고, 그를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유배지였던 수원에서 온갖 행패를 부려 수원 사람들이 고을을 버리고 떠날 정도가 되자 선조는 순화군의 군호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서울로 소환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서운 게 없었던 순화군은 서울에 잡혀 와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뛰쳐나와 사람을 죽이고 곤장을 치길 밥 먹듯이 합니다. 결국 선조도 더는 참아줄 수가 없어, 금위군을 보내서 붙잡아 가택연금을 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갇혔는지 몇 년간은 별다른 사건 없이 지내다가 풍을 맞아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결국 28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선조는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작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에 기록된 내용이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줍니다.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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