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한참 전 세계가 시끄러울 때 유례없는 성장을 경험한 넷플릭스는 직접 투자해 제작한 오리지널 시리즈로 큰 재미를 봤습니다. 특히 한국 작품에 투자해 큰 호응을 얻자, 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오리지널 시리즈를 제작했는데요. 물론 일본 작품에도 투자해 2021년 2월에는 ‘사무라이의 시대’라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공개했습니다.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6세기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등을 심도있게 다뤘는데 이렇게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를 제작한 것은 세계에서 통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내는 점이 서양인들에게는 뭔가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지만, 역사적인 고증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한국인들에게는 오히려 모욕적이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당시 조선의 임금 선조가 궁에서 곤룡포가 아닌 일반 선비 복장을 한 채로 등장시켜 초라한 왕조로 전락시켰고, 임진왜란의 주역을 조선 의병장 곽재우로 등장시키고 그가 입은 붉은 의복은 마술사들이나 입을 것 같은 처녀들의 월경혈을 물들여 만들었다고 묘사하지를 않나,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아예 제대로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큐 속 전문가라고 등장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죠. 물론 어차피 한국인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입니다. 누군가는 사실로 믿게 되는 그런 류의 작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편향되지 않은 객관적인 사실을 묘사했어야 하지만 넷플릭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사무라이를 주축으로 한 왜군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일어난 소름 돋는 만행을 하나 살펴볼 예정입니다. 유물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조차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했던 바로 그 사건입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는 왜군이 끌고 온 함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총사령관으로 왜군 1만 8,700명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고 14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 끝에 부산진은 힘도 못 써보고 함락됐습니다. 이후 왜군은 곧바로 동래성으로 진군합니다. 4월 14일 오전 10시, 동래성에 이른 왜군 선발대 100명이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며 항복을 종용합니다.
송 부사는 유키나가의 항복 권유에 ‘싸우다 죽을지언정 길을 내줄 수는 없다’라는 답을 목판에 적어 성 밖으로 던졌습니다. 주위에서도 송상현에게 물러나자는 권유했지만 그는 ‘성주가 자기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싸움에 임할 준비를 마칩니다.
하루 뒤 조총을 든 왜군은 고립무원에 빠진 동래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송 부사는 통나무로 방어책을 세우며 왜군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총은 그 한자에서 알 수 있듯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기였기 때문에 활을 주무기로 하는 조선군은 조총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죠. 동래성은 순식간에 함락됐고 왜군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1668년 민정중이 작성한 ‘임진동래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이 일시에 다투어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적고 있죠. 이런 대혼란 속에서 조선군 병사와 백성들은 막대기와 괭이, 낫을 들고 끝까지 싸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하는 병사와 이를 막으려는 백성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맞붙은, 그러니까 전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이 동래성 전투는 그로부터 413년 뒤 모든 비밀이 풀렸습니다. 해골이 몇 구 발견되면서 시작됐죠. 2005년 부산 동래구 수안동을 지나는 지하철역 조성 공사 중 질서 정연하게 쌓인 석축 두 줄을 찾아냈습니다. 그간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해자가 발견된 겁니다.
해자란 동물이나 외부인, 특히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 주위로 둥글게 파서 만든 일종의 물웅덩이로, 가령 기마병이든 병사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 가까이 다가와야 하는데 해자는 적이 성 가까이로 접근하는 것을 막습니다. 물웅덩이를 건너려 노력하는 사이 적을 섬멸시킬 수 있는 방어시설이죠.
그런데 이 해자 발굴 장소는 동래읍성에서 고작 50m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간 동래읍성 해자는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어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녔죠. 이에 즉각 정밀 발굴조사가 이어졌는데 이 조사 과정에서 깜짝 놀랄만한 유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해자에 매몰된 흙을 걷어내고 바닥 쪽으로 내려가니 방어용으로 박아둔 나무 말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붓으로 하나하나 걷어내자, 진흙 속에 묻혔던 활, 화살촉, 창, 갑옷과 투구 등 전쟁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정신없이 끌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조사단을 경악하게 한 것은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인골들이었습니다.
두개골과 목뼈가 함께 발견됐고, 팔뼈, 다리뼈, 무릎뼈 등이 연결된 상태로 발견됐는데 이는 죽은 직후에 유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의 인골이 사망 직후 버려진 것이죠. 물론 전쟁이라는 특성상 남녀노소 누구나 희생당할 수 있습니다만 조사단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어린아이의 인골 1개체도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분석해 보니 아이의 인골은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어린 만 5세 미만의 유아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인골에는 총이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어린 아기가 일본군 조총에 무참히 죽은 겁니다.
그리고 유골들은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20대 여성으로 밝혀진 두개골은 두 번이나 칼로 벤 흔적이 있었는데 한 번의 칼놀림으로 이마뼈를, 또 한 번의 칼놀림으로 정수리를 벴습니다. 상처의 흔적으로 유추해 볼 때 왜군이 왼쪽에 선 상태로 무릎 꿇고 앉아 고개 숙인 여성을 칼로 벤 겁니다.
이렇게 왜군에 의해 마음대로 베어진 아이와 힘없는 여성들을 포함한 동래성 전투의 희생자들은 죽은 직후 물웅덩이에 버려진 겁니다. 그런데 이 피해자들은 전부 조선인이었을까요? 이 역시 확인이 가능합니다. 당시 발굴된 남성 인골의 평균 신장은 163.6cm, 여성 인골은 153.4cm였습니다.
당시 왜인의 평균 키는 남성 155.1cm, 여성 143cm로 조선인들이 왜인들보다 약 10cm가량 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피해자들의 100%가 조선인이었다는 유추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적게는 81개체, 많게는 114개체의 인골이 발견됐지만 일본군의 흔적은 단 한 점, 54cm 길이의 국지창 하나가 발견됐을 뿐입니다.
실제로 당시 왜군을 따라 조선에 왔던 종군승 케이넨이 펴낸 ‘서정일기’에는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천여 명, 포로 500여 명의 전과를 올렸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지 않았음에도, 겪은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참혹한 살육의 증거였죠.
임진왜란 후 15년 뒤 1607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부임 후 4월 15일 아침 느닷없이 천지를 진동하는 곡성에 휩싸였습니다. 깜짝 놀라 늙은 아전을 불러 영문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 놀랍습니다. ‘임진년 당시 왜적이 몰려와 이날 동래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살려고 성안으로 몰려든 백성들이 몰살을 당했습지요. 그래서 이날만 되면 살아남은 백성들이 집마다 상을 차려 죽은 이를 제사 지낸답니다.’ 이안눌은 이 일을 ‘사월십오일’이라는 장시에 담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비가 제 자식 곡을 하고요, 아들이 제 아비 곡을 하지요. 할아비가 손자 곡을 하고요, 손자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 하면,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살아 있는 이는 모두 곡을 합지요.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네.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에서 유골이 출토된 것은 동래읍성이 처음이었습니다. 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므로 가히 놀라운 발견이었고, 발굴 조사단에게도 인생 딱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발굴이었지만 그 누구도 발굴 당시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못했습니다.
발굴을 책임진 당시 정의도 학예실장은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낼 때 눈물을 흘렸다’라고 밝히기도 했죠. 사실 동래성에서 인골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동래성 전투 145년 후 영조 때 동래성을 고치다가 인골을 발견한 기록이 남아있기도 한데 최소 12명분의 것으로 당시 성을 고치던 동래부사 정언섭은 ‘임진전망유해지총’을 통해 ‘형제를 알 수 있는 인골만 대충 열둘이지만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라고 적어두었습니다.
정 부사의 발견 이후 다시 280년이 흐른 2005년 이번엔 지하철 건설 공사장에서 다시 인골이 발견됐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죽은 이들의 혼이 200년 간격으로 되살아나는 것일까요. 다시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강해져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