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을 따라 내려가면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강을 막고 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데 산과 계곡, 기암괴석이 마치 거북이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반구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반구대에는 거대한 그림이 한 편 그려져 있습니다.
높이 약 5m, 너비 약 8m의 거대한 바위에는 배, 그물, 작살, 방패 등 사냥과 물고기잡이에 필요한 도구를 비롯해 개, 호랑이, 표범, 사슴, 멧돼지, 여우, 늑대 등의 들짐승과 물개, 상어, 거북, 고래 등의 바다짐승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탈을 쓰고 있는 주술사, 그물이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짐승 등 구체적인 실제 모습들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죠.
그런데 이 그림이 무려 1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 조상들이 1만 년 전부터 그린 예술작품인 겁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림을 좋아하시나요? 그림은 선이나 색채를 써 사물이나 이미지를 평면 위에 나타내는 아주 단순한 예술이지만 우리 인류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듯이 문자를 쓰기 전부터 문자를 대신해 기록의 도구로 그림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 그림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을 창조해 냈습니다. 지난 콘텐츠에서 저는 한국의 도공들을 납치한 일본이 도자기로 어떻게 유럽 시장을 장악했는지 설명해 드렸습니다. 도자기 무게와 금 무게를 동일하게 책정해 구매했을 만큼 어마어마한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로써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을 얻었다고도 말씀드렸죠.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조선인 도공들이 일본에서 만든 ‘이마리 자기’ 등의 일본 도자기가 엄청난 사치품이었는데 당시 유럽 귀족들이나 부르주아들은 ‘도자기 전시용 방’을 별도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시다시피 도자기는 잘 깨집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수출하려면 도자기를 종이에 포장할 필요가 있었는데 일본 도자기 상인들은 특이하게 이 포장지에 일본의 풍속화를 그렸습니다.
사실 하나하나 그렸다기보다 목판화 그림들을 찍어서 포장지로 썼죠. 이를 우키요에라고 합니다. 일종의 풍속화인데 17세기 일본 에도시대에는 서민들이 가볍게 풍속화를 그리거나 기모노 입은 여성의 나체를 그리는 등의 유행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하얀 포장지가 아니라 이렇게 이국적인 느낌의 그림을 포장지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일본 상인들은 이를 적극 활용해 도자기 포장지로 썼죠. 그리고 이 그림들은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를 최초로 주목한 인물은 펠릭스 브라크몽이라는 화가였는데 판화에 사용할 종이를 구하러 인쇄소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우키요에를 보게 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이를 친구였던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에게 소개했는데 이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죠.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우키요에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였고 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반 고흐 역시 ‘비 오는 다리’라는 우키요에를 따라 그렸습니다.
그저 그런 화가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인 반 고흐가 우키요에를 진지하게 따라 그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간주하고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했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어쨌든 한국인 도공들이 만든 일본산 도자기가 유럽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고, 그 도자기를 포장했던 포장지가 반 고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임진왜란 때 우리가 잃은 것은 비단 도공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 반 고흐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조선인 중 서양인들이 제발 한 점만 그려달라며 줄 서서 기다리던 화가가 한 명 있습니다. 신윤복이나 김홍도가 국내에서 유명했다면 그는 오히려 서양에서 더 유명했던 인물인데요.
지난 2023년 1월 30일 CNN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대단한 작품 하나가 경매에 낙찰됐음을 보도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7세기 유럽, 특히 영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안토니 반 다이크라는 화가가 남긴 ‘성 히에로니무스를 위한 습작’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310만 달러, 한국 돈으로 약 37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세로 95cm, 가로 59.5cm 캔버스에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의 나신을 담았는데 현존하는 반 다이크의 대형 실물 습작은 전 세계에 단 2점뿐이라고 하죠. 그중 하나가 경매에 나온 겁니다. 원래 이 그림은 2002년 앨버트 B. 로버츠라는 그림 수집가가 뉴욕의 한 농장 헛간에서 새똥이 묻은 상태로 발견해 이를 73만 원에 사들였다가 경매로 나온 것인데 워낙에 귀중한 작품이다 보니 37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때때로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림은 작가나 그 희귀함에 따라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하는데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소’를 주요 소재로 삼았던 이중섭 화가의 그림 104점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죠. 물론 한반도에는 역사적으로 대단한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영화 ‘관상’의 포스터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기초로 했고,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인내와 끈기의 상징이었던 소를 주요 소재로 삼은 이중섭이라는 화가가 있었고,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 화백은 132억 원이라는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쓴 ‘우주’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죠.
그런데 19세기말 부산에서 활동했던 대단한 화가 김준근에 대해서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독일 함부르크로텐바움 박물관, 뮌헨 오대륙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세계문화박물관,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덴마크 국립박물관, 러시아 모스크와 국립동양박물관,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 등 대단한 박물관이 전부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조선시대, 특히 중, 후반기를 망국의 역사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사실 영, 정조 시대는 융성한 부활의 시간을 이뤄냈습니다. 18세기 조선은 문화, 정치, 경제 등 두루두루 세계 최정상급 선진국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치욕을 딛고 일어나 문화, 정치, 경제면에서 절정을 구가했으며, 가장 찬란했던 15세기의 조선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었죠. 그리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0년을 기점으로 빛나던 조선은 기울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급기야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부산, 원산, 인천이 강제 개항을 시작했죠. 그리고 그곳에 기산 김준근이 있었습니다. 김준근을 두고 흔히 ‘수수께끼 화가’라고 부르는데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일생은커녕 생몰연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품은 위에서 보셨듯이 한국보다 유럽에 더 많이 남아있다는 점인데요.
아마 역대 한국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해외에 판매한 작가이자 최초의 한류 예술인으로 볼 수 있는데 이유는 그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서양인들에게 풍속화를 그려 팔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의 그림은 유럽에 878점, 북미에 138점, 아시아에 480점 등 약 1,600점 정도가 해외에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확인된 것만 이 정도 숫자입니다. 개인이 소장한 작품까지 더한다면 아마 족히 2,000점은 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활동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그림은 독일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의 소장품입니다.
독일의 한국학 학자 융커는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에는 고종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가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김준근의 풍속화가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 김준근의 그림을 어떻게 하사받았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가 조선에 거주한 1882~1885년 사이 김준근의 그림을 수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기록보관소와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인류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된 김준근의 풍속화는 메리 슈펠트가 1886년 부산의 초량항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메리 슈펠트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이끈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의 딸로, 이들은 고종의 초청을 받아 1886년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김준근 화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그녀는 부산으로 내려가 그에게 풍속도 한 점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1895년 출판된 ‘한국의 놀이’ 서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김준근이 1886년경 부산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 주독일조선 총영사로 재직했던 마이어 등이 김준근의 그림을 구매해 소장하다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볼 때 김준근이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원산, 부산의 초량항 등 개항장에서 활발하게 그림을 그려 팔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김준근은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과 같이 한양 등 중앙무대가 아니라 초량, 원산 등의 개항장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당시 기차가 없었던 시절임에도 미국 외교관의 딸이 직접 부산까지 내려가 작품을 주문했을 만큼 상당히 유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김준근의 그림은 왜 어쩌다 서양인들, 특히 고위층이 앞장서서 구입하게 된 것일까요? 그의 그림 속 특징 때문입니다. 김준근의 풍속화에는 농사짓는 모습, 혼례 모습, 선배들이 기생들과 노는 모습 등 18세기 풍속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만 19세기말의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형벌, 제례, 장례식 등은 김준근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주제들이었죠. 사실 먹고살기 바쁜 조선인들이 자주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굳이 그림으로까지 주문해서 감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시 조선의 풍속을 외국에 소개하고 싶은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제들이 흥미로웠고 구매로 이어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준근 풍속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그림에는 전통 풍속화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풍자와 해학 넘치는 표정이 없습니다. 노동자, 광인, 어린이, 거지, 하층 여성, 장애인, 처벌을 받는 사람 등을 그리면서도 놀이의 즐거움과 긴박감, 노동의 건강함과 고달픔, 형벌의 고통, 심지어 목이 달아나는 절명의 순간에도 무심한 표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김준근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그림을 그려주는 김준근의 풍속화를 보며 서양인들은 “너희는 열등하다. 그러니까 서양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이 그의 작품이 서양인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그림이 서양인의 한국 연구에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가치 자체도 뛰어났죠. 그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은 ‘천로역정’이라는 작품인데, 이는 1895년 국내 최초로 번역된 서양 문학작품인 ‘천로역정’의 조선어판 삽화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이 1678년에 쓴 작품으로 주인공인 기독교인이 온갖 역경을 딛고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다뤘습니다. 그런데 김준근은 이 책이 한국에서 번역되자마자 흠뻑 빠져버렸고 이 번역본에 넣을 삽화 42장을 그렸습니다. 정말 특이한 것은 서양에서 쓰인 소설이지만 조선어판에 넣기 위해 조선식으로 고쳐서 그렸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를 서양인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갓을 씌워 그려버렸죠. 굉장히 이질적일 수 있지만 한국 최초로 그려진 한국인 형상의 예수상이 김준근의 손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당시 선교사 C.C. 빈톤은 해당 삽화를 두고 해부학상 인물 묘사가 훌륭하여 조선 최고의 선묘화를 능가할 정도라며 외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호평받을 것이라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삽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순례를 시작할 때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의 주인공의 모습이 천국에 가까이 갈수록 의복이 달라집니다. 일반 시민에서 전투 무관으로, 상급 무관으로, 임금으로 신분이 달라지는데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믿음이 충만해지면 신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그림으로 표현해 냈죠.
전 세계 많은 국가 중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잘 모르던 1894년, 독일 함부르크 공예박물관은 기산 김준근의 전람회를 열었습니다. 2003년 3월 24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의 풍속도 49점이 약 4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고, 2006년에는 캐나다와 덴마크에서 ‘기산 전시회’가 잇따라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는 해외에서 잘 알려졌지만, 국내에서는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무명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학계는 그의 그림이 주로 노동자, 걸인, 하층민, 장애인 등을 주로 다루는, 즉 서양인들의 우월적인 시선에 따라 그려졌으며, 이는 조선의 문화를 훼손하는 행위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불편한 시선이 존재하다 보니 그의 그림이 그림 그 자체로 재평가받기는 어려웠을지는 모릅니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고민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김준근은 사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서양의 반 고흐나 에두아르 마네처럼 예술혼을 불태우는 화가는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의 풍속화를 좋아하는 서양인이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하면 그림을 그려주고 밥 벌어먹고살던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죠. 그리고 후대에 와서 그 그림들이 생각지도 못한 호평을 받게 된 겁니다.
우리가 보여주고 싶지 않던 것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일으키고 있는 한류 속의 ‘더 글로리’나 ‘기생충’과 같은 작품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19세기말 조선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연구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