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왕을 때린 최악의 왕비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1259년~1297년)는 고려의 제25대 왕 충렬왕의 제1 비로, 고려의 첫 원나라 출신 왕비이자 세조 쿠빌라이의 공주였습니다.
그녀는 고려가 원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하면서 처음으로 혼인 관계를 맺은 왕비로, 1259년 음력 6월 28일에 원 세조 쿠빌라이 칸과 후궁인 아속진가돈의 딸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녀의 성은 보르지긴(패아지근) 또는 기악온이었고, 이름은 쿠틀룩 켈미쉬(홀도로게리미실 또는 홀독겁미사)였으며, 증조할아버지가 바로 칭기즈칸이었습니다.
이렇게 제국대장공주 이후 고려의 왕은 원나라 황족 또는 귀족 가문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진짜 황제의 직계로 고려에 시집을 온 경우는 그녀뿐이었으므로 공주의 권세가 얼마나 컸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며느리 계국대장공주의 경우는 황제의 딸이긴 했으나, 추존황제의 직계였습니다.
제국대장공주의 아버지 쿠빌라이 칸은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로, 칭기즈칸의 4남인 툴루이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몽골제국의 이름을 대원제국으로 고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으며, 고려와 동남아시아 등을 정복하고 일본 원정을 한 황제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제국대장공주는 16세 때인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11일,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39세의 고려의 세자 왕심(충렬왕)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음력 6월 고려 제24대 왕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됩니다.
원래 충렬왕은 1260년(원종 원년)에 이미 신종의 증손녀인 왕씨(정화궁주)와 결혼했고 왕 씨는 이미 태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 그녀보다 14년이나 늦게 혼인한 제국대장공주가 상국인 원나라의 공주라는 이유로 제1비의 위치를 차지하며 왕 씨는 제2 비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공주는 이해 음력 10월 고려에 들어왔는데, 그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충렬왕은 같이 귀국하면서 원나라식으로 변발하지 않은 신료들을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1275년(충렬왕 원년) 제국대장공주가 거처하는 궁과 전을 각각 경성궁, 원성전이라 하였으며 공주를 위해 부를 설치하였는데, 그 이름을 응선이라 하고 안동 경산부를 탕목읍으로 삼아 관속을 두게 합니다.
여기서 탕목이란 목욕물을 데우는 데 쓰는 땔감을 말하며, 결국 이는 목욕하는 데 드는 비용을 의미했습니다. 과거 중국에선 왕이나 세력가의 딸이 시집을 갈 때 목욕비에 보태 쓰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두둑이 떼어 주었는데, 여기서 목욕 비용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고 실제로는 품위유지비 또는 비자금 성격의 재산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도 제국대장공주의 품위유지비나 비자금 용도로 경상북도 안동 및 그 일대를 목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녀의 사유지로 삼게 하였고, 이재에 밝았던 공주도 자기 탕목읍에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이후 제국대장공주는 원성전과 응선부를 중심으로 잣과 인삼, 은, 모시를 원나라의 강남에 수출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의 흙을 가져와 강화에서 직접 도자기를 굽도록 하여 질 좋은 도자기를 수출하기도 하는 등 사사로운 경제 활동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하지만 수출하는 물품이 부족할 때는 환관을 각지에 보내어 구하게 하였는데, 특산품들이 생산되지 않는 곳에서도 빠짐없이 거두어들여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혼인으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1275년(충렬왕 1년) 고려의 관제는 모두 한 단계 격하된 형태로 개편됩니다.
이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가 되었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이부와 예부가 합쳐져 전리사가 됩니다.
한편 제국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을 오면서 원나라에 있던 자신의 시종들을 그대로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고려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몽골의 풍습을 유지하면서 고려 왕실에 몽골 풍습이 만연하게 됩니다.
그 밖에 그녀는 연회를 즐기기를 좋아하였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연회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공주와 친분이 있으면 큰 죄를 지어도 금방 풀려나곤 했는데요. 몽골어 통역관 출신의 조인규가 대표적 예로, 그는 국가 재물을 횡령하고 죄 없는 사람을 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주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에서 금방 풀려나게 됩니다.
이후 조인규는 승승장구하여 자신의 딸을 충선왕의 왕비(조비)로 시집을 보냈고, 관리로서도 최고위인 문하시중을 지내게 됩니다.
공주는 혼인 다음 해인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9월 30일, 사판궁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훗날의 충선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지만, 대부분이 요절해 성년이 된 건 장남인 충선왕뿐이었습니다. 이해 음력 12월, 공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게 됩니다.
이 연회에서 충렬왕은 명을 내려 제국대장공주와 제2 비인 정화궁주의 자리를 같은 위치에 놓이게 했는데, 이에 공주는 자신과 정화궁주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분노하여 결국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게 만듭니다.
잠시 후 정화궁주가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술잔을 올리자 충렬왕이 돌아보면서 눈짓하였는데, 공주는 이를 두고 “어째서 나를 흘겨보십니까? 정화궁주가 나에게 꿇어앉아 그러는 것입니까?”라며 쏘아붙이며 연회는 곧바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5월에는 충렬왕과 공주가 흥왕사에 행차하였는데, 이때 그녀가 흥왕사에 있는 금탑을 궁궐로 뺏어오며 그 금탑의 장식을 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던 시종(홀라대, 삼가)이 훔쳐 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공주는 원래 이것을 해체하여 사적으로 쓰고자 했는데, 충렬왕이 이를 만류했지만 제국대장공주가 말을 듣지 않자 왕은 울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충렬왕과 공주가 다시 흥왕사를 방문하자 흥왕사의 스님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공주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같은 해 음력 12월에는 어떤 이가 당시 고려 다루가치로 와있던 석말천구의 관사에 익명서를 투입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날 석말천구는 이러한 사실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에게 고하였는데, 그 익명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게 하고 있으며, 제안공을 비롯한 43명이 불궤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한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제국대장공주는 나장가에 정화궁주를 가두게 하였고, 정화궁주의 곳간인 부고를 봉쇄해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공주는 대신 유경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는 감동하였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정화궁주 등을 모두 석방합니다.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에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천효사에 갔는데, 공주가 시종들이 적다는 이유로 도로 돌아오는 바람에 충렬왕도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때 공주는 분에 못 이겨 충렬왕을 지팡이로 구타하였으며 얼마 후 화가 조금 풀려 다시 천효사에 가게 되지만, 다시금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는 이유로 또다시 욕을 하고 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7월 29일에는 원종의 제2 비인 경창궁주와 그 아들 순안공 왕종이 저주를 행한다는 무고가 올라오게 됩니다. 당시 저주의 내용은 경창궁주가 자신의 아들 순안공을 제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게 하여 왕위에 오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충렬왕은 측근들을 시켜 경창궁주를 국문하고 순안공에 대해서는 친국까지 하였으나, 대신들이 경창궁주 모자를 용서하기를 청하여 충렬왕은 이들의 재산을 적몰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그리고 절차상 상국인 원나라의 지시를 기다리게 되지만, 분노한 제국대장공주는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이들의 재산은 공주에게 몰수됩니다.
이후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9월 16일, 경창궁주가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순안공은 구음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한편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 원 세조가 충렬왕을 부마국왕으로 정식 책봉하였으며, 1282년 (충렬왕 8년) 음력 8월에는 세조가 충렬왕에게 옛 송나라의 의관 연덕신을 하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덕신은 정력이 강해지는 약인 조양환을 충렬왕에게 만들어 바치게 되는데요.
이때 고려의 천문가인 오윤부가 “이 약은 왕의 몸에 좋지 못하니 삼한의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자다.”라고 충언하지만 결국 충렬왕은 약을 먹었고, 이후 결혼 초에 해마다 태기를 보이던 공주는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서 부마국인 고려로 시집온 막장 공주라고 알려지게 되지만, 그녀의 난폭한 행동은 초기에 집중되어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문제의 흥왕사의 금탑도 남편인 충렬왕이 병이 들자 금탑으로 인해 제액이 낀 것이라는 신하들의 간언에 흥황사로 돌려주었고, 왕권이 안정되자 잦은 사냥을 나가며 국고를 낭비하고 민폐를 끼치던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국사에 힘쓸 것을 말하는 등 확 달라진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또한 1293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가기 전 연회가 화려하게 열리자, 공주는 “여기 있는 맛난 음식들은 백성들의 피땀이니 돌아오는 길에는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환심을 사려는 짓은 하지 말라.”라는 등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 자체도 매우 엄하고 밝아 자신의 측근 중 잘못을 하는 자가 있으면 초기와는 달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제국대장공주의 결혼 초, 충렬왕에 대한 난폭한 모습은 고려의 풍습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고, 향수병과 산후우울증에 심지어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니 폭주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후 1294년 (충렬왕 20년) 음력 6월 29일, 공주는 조카인 원 성종에 의해 안평공주에 봉해지고, 1296년 원나라에 가 있던 아들 충선왕이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로 가서 세자의 혼례를 치르고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297년(충렬왕 23년) 공주는 원나라에서 환궁하자마자 수강궁 향각에 머물면서 시종에게 활짝 핀 작약을 하나 꺾어오라고 시켰으며, 이후 이 작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흐느끼더니 얼마 후인 음력 5월 9일에 그녀는 병이 들게 됩니다. 이후 음력 5월 12일,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는 현성사에 행차하지만, 그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음력 5월 21일,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능은 고릉이며, 같은 해 9월에 장목인명황후의 시호와 정민장선인명태후의 시호를 받았으며, 1298년(충선왕 즉위년) 음력 8월 14일에는 아들 충선왕에 의해 정식으로 인명태후로 추존됩니다.
또한 1310년(충선왕 2년) 공주의 증손자뻘인 원나라 무종이 그녀를 황고 제국대장공주에 추봉하였고, 이해 음력 9월에 충렬왕과 함께 태묘에 부묘됩니다.
한편 공주가 사망하고 약 두 달이 지난 1297년 (충렬왕 23년) 음력 7월 27일, 충선왕은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임금의 총애를 투기하는 자들의 탓이라 하며 충렬왕이 총애하던 후궁 무비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둔 후 예쁜 과부 하나(훗날의 숙창원비)를 아버지에게 바칩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충렬왕 사후 충선왕부터 창왕까지 모두 그녀의 후손으로 왕통이 이어지게 되며, 제국대장공주 이후로 등장하는 원나라 출신의 왕비들도 모두 그녀와 혈족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후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날 때까지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황족과 결혼한 자에게만 돌아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