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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궁이었지만 왕을 낳은 7인의 어머니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공빈 김씨(1553년~1577년)는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의 생모입니다. 그녀는 1572년(선조 5년)에 선조의 서장자인 임해군을 낳았으며, 둘째인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죽게 됩니다.

공빈 김씨는 생전에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그녀가 죽은 후 인빈 김씨가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죽은 공빈의 허물을 들춰내었고, 이에 선조는 공빈을 애도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역경 속에서도 그녀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조선의 제15대 왕에 오르면서 공성왕후로 추존됩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위치는 다시 빈이 되었고, 왕후로서의 시호와 능호도 모두 추탈되고 격하됩니다.

인빈 김씨(1555년~1613년)는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원종의 생모입니다. 그녀는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후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선조의 총애가 모두 인빈에게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때를 틈타 그녀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정철 등을 유배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세자로 올리기 위해 힘썼던 신성군이 임진왜란 도중 사망하게 되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 셋째 정원군은 임해군, 순화군과 더불어 최악의 망나니였기에 그녀는 왕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포기하고, 광해군과의 관계에 힘쓰게 됩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의 공이 컸다.” 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해집니다.

이로 인해 광해군 즉위 후 인빈 김씨에 대한 보복은 없었으며, 그녀의 아들인 정원군 역시 왕실의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인빈 김씨는 1613년(광해군 5년) 59세를 일기로 편안히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능창군(정원군의 3남)이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죽게 되면서 정원군은 화병이 나게 되고,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현재 경희궁) 살던 집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자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복수를 꿈꾸며, 반정에 가담해 결국 광해군을 무너뜨리니 그가 바로 조선 제16대 왕 인조입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추존되어 정원대원군이 되었고, 10년간의 논쟁 끝에 왕(원종)으로 추존됩니다.

희빈 장씨(1659년~1701년)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후궁으로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20대 왕 경종의 생모입니다. 희빈 장씨는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궁녀 출신으로 1680년(숙종 6년)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후 숙종의 승은을 입게 됩니다.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깊어지자, 숙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명성왕후는 새로운 왕비를 들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그녀를 출궁시켰고, 곧바로 삼간택을 통해 인현왕후가 왕비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녀의 3년 상이 끝날 때쯤 희빈 장씨는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후궁으로서 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후 숙종이 희빈 장씨를 지극히 총애하면서 그녀와 인현왕후의 갈등은 점점 깊어집니다.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의 관계는 단순히 왕비의 지위를 둘러싼 대립이 아닌 숙종 대의 붕당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희빈 장씨는 중인 출신이었으나 그의 당숙인 장현이 남인 쪽 인물들과 가까웠으며, 인현왕후는 서인 출신이었습니다.

1688년 희빈 장씨는 숙종의 첫째 아들이자, 훗날 경종이 되는 이윤을 낳게 됩니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윤을 원자로 정하고, 희빈 장씨를 후궁 중 최고 품계인 빈으로 봉하게 됩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이러한 조치들을 극렬히 반대하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빌미로 서인들을 축출하고 경신환국 때 축출되었던 남인들을 등용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입니다.

이때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사가로 내쳐지게 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에 오르게 됩니다. 희빈 장씨는 입궁과 출궁, 그리고 재입궁 등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궁녀에서 왕비에 오르게 되지만, 그녀의 왕비로서의 삶은 불과 5년에 불과했습니다.

숙종은 자신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입맛에 맞게 정치 세력을 바꾸는 환국정치를 펼쳤습니다.

이에 일환으로 남인들을 완전히 축출하고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갑술환국입니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위시키는 동시에 한 나라에 두 왕비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희빈 장씨는 다시 후궁으로 강등됩니다.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희빈 장씨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됩니다.

이에 서인들은 위기를 느끼게 되면서 발빠르게 움직였고, 서인과 손을 잡았던 숙빈 최씨(숙종의 후궁, 연잉군 생모)가 희빈이 취선당의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발고를 하게 됩니다.

결국 숙종은 그녀에게 자진의 명을 내리게 되고, 희빈 장씨는 4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숙종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위태롭지만 끝까지 세자 자리를 지킨 경종은 그녀의 바램대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숙빈 최씨(1670년~1718년)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후궁으로 제21대 왕 영조의 생모입니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 그녀의 천한 신분 때문에 아들인 영조는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라 괴팍한 성격이 되었으며, 경종 독살설과 더불어 그의 콤플렉스의 원인이 됩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녀가 죽자 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 굿을 발고하여 희빈을 사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후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르고 재위 4년만에 후사 없이 사망해 세제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입니다.

숙빈 최씨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영조는 즉위 원년, 어머니를 기리며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라 하였고, 영조 29년 육상궁으로 승격시킵니다.

정빈 이씨(1694년~1721년)는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진종의 어머니입니다. 영조가 아직 연잉군이었을 적에 그의 첩이 되었던 그녀는 영조의 장남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그녀는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5품 소훈이 되지만 1721년 2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영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정비인 정성왕후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로 책봉이 됩니다. 하지만 세자는 10세의 나이로 단명을 하게 되고, 효장이라는 시호를 받으니 그가 바로 효장세자입니다.

세월이 흘러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가 폐서인되고 죽게 되면서, 그의 아들이자 세손이었던 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영조의 첫째 아들이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이 되었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효장세자는 진종에 추존됩니다.

영빈 이씨(1696년~1764년)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황제 장조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슬하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포함한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화완옹주를 제외한 6명의 자식들이 살아생전에 요절했으며, 그중 한 명인 사도세자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으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겪게 되면서 결국 자신의 후궁을 살해하고, 영조의 시해까지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영빈 이씨는 세손(정조)과 며느리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죽게 하는 결정적인 밀고를 하게 됩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고, 그녀는 괴로워하다 아들이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게 됩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친부인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종이 사도세자를 추존왕인 장종으로, 2년 후에는 추존황제인 장조로 추존하게 됩니다.

수빈 박씨(1770년~1822년)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으로 제23대 왕 순조의 생모입니다.

1786년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죽고, 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 또한 만삭의 몸으로 죽게 되자 정조는 커다란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정조는 35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정비 효의왕후와 후궁인 화빈 윤씨 사이에서 모두 자식이 없었기에 왕실에서는 후사를 걱정하게 됩니다.

결국 다음 해에 명문가 규수를 후궁으로 들이는데, 바로 그녀가 수빈 박씨입니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으로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고 빈으로 책봉됩니다.

그리고 4년 후 고대하던 원자가 태어나니 그가 바로 제23대 왕 순조입니다. 그녀는 순조가 11세에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대왕대비 정순왕후(영조비), 혜경궁 홍씨(정조의 생모), 왕대비 효의왕후(정조비)에게 하루 세 차례 문안드릴 정도로 윗전에게 깍듯했고 어질다고 칭송받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렸던 순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조선은 삐걱되기 시작했고,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이 자신의 가문인 안동 김씨를 위해 세도를 부리면서 조선은 점차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청와대 서남쪽에 자리 잡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칠궁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칠궁은 종묘와 더불어 역사적 가치가 큰 곳으로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왕 또는 왕으로 추존되는 이의 생모인 후궁의 신주를 옮겨와 칠궁으로 불리게 됩니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7개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칠궁은 청와대와 맞붙어 있는 궁정동에 위치해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됩니다. 이후 2001년부터 청와대 관람객에게만 칠궁 관람이 허용된 것을 시작으로 2018년 6월 시험 개방 이후 확대 개방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1일 7회 시간제 관람으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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