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한 왕의 딸”
숙정옹주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딸로, 어머니는 중종의 후궁인 숙의 김 씨였습니다. 1525(중종 20년) 숙의 김 씨의 유일한 딸로 태어난 그녀는 1534년(중종 29년) 10살의 나이로 한 살 많은 능성 구 씨 구한(능천부원군 구수영의 손자)과 혼인하게 되고, 구한은 능창위에 봉해집니다.
남편인 구한은 시문에 능했으며 문인화를 그리는 재주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구한이 입궐했을 때 중종은 절구를 지으라고 명했고 이에 즉석에서 시를 지었는데, 그가 지은 시문의 운치가 빼어나자 왕은 이를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고 그를 더욱 아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중종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자주 그를 궁궐로 불러들여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때마다 왕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군신 간의 격식을 버리고 장인과 사위 간의 정을 나누게 됩니다.
그의 성품은 온화했고 용모와 자태가 단아했다고 전해지며, 젊은 나이에 부마로서 이미 부귀하게 되었으나 스스로의 몸가짐을 낮추어 남에게 지극히 겸손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숙정옹주와 금슬도 좋아 3남 3녀를 두게 됩니다.
이러한 완벽한 남편을 가졌던 숙정옹주는 어느 정도는 재물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534년(중종 29년) 음력 7월 20일, 숙정옹주는 약 100여 년간 훈련장으로 사용된 국유지인 광주의 정금원의 땅을 떼어 달라고 요청하여 받게 되었는데, 사헌부의 상소로 인해 다시 국가에 돌려주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1538년(중종 33년)에는 옹주의 집의 크기가 규정에서 6칸을 초과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어 중종의 명으로 허물었는데, 그 규모만 줄이고 담장 등에 부리는 사치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고 하여 계속해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참고로 <경국대전>에 따르면 당시 허용되는 집의 규모는 대군의 집이 60칸, 왕자(군)와 공주의 집은 50칸, 옹주 및 2품 이상의 관리는 40칸, 3품 이하면 30칸, 일반 백성들은 10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남편 구한은 승승장구했으며, 명종의 즉위에 많은 공을 인정받아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위사원종공신이 되고 종2품상 자의대부로 올라가게 됩니다.
또한 1555년(명종 10년)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음식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한 관서인 사옹원 제조에 임명되었고, 1558년(명종 13년) 명나라 사신이 와서 세자를 책봉할 때 사신을 대접하는 일을 맡아서 실수 없이 잘 처리한 공으로 정2품하 통헌대부로 승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해 7월 부마 구한은 갑자기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고, 이에 놀란 명종이 어의를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5세였습니다.
이렇게 남편 구한이 죽고 34살에 과부가 된 숙정옹주는 1564년(명종 19년) 대왕대비 문정왕후에 의해 40세의 나이로 사사되는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알고 보니 숙정옹주는 남편 사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사위와 간통을 저질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달이 난 것이었습니다.
왕실에서 숨기고 싶어 했을 만한 이런 일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은 의외였는데, 이는 옹주가 죽은 지 2년 뒤이자 대왕대비 문정왕후가 죽은 지 1년 뒤인 1566년(명종 22년) 명종이 그녀의 큰아들 구사근에게 벼슬을 내린 것이 발단이 됩니다.
당시 사관은 이러한 왕의 처사에 매우 못마땅해한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큰아들 구사근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에 굳이 숙정옹주를 언급하며 사위와 간통하여 대내로부터 사약을 내려 죽었다는 사초를 남기게 되면서 이는 결국 실록에 실리게 됩니다.
이러한 숙정옹주와 구한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29-1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