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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한국의 요청을 무시하던 미국이 후회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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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한 한국인이 이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세계는 비웃었습니다. 가난하고 기술도 부족한 한국에서 선진국도 버거워하는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미국 정부에서는 대놓고 한국 처지에 그런 게 가당키나 하냐며 포기하라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한국인이 세운 회사는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중입니다.

그렇게나 뜯어말리는 미국에서는 이 한국인의 회사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죠. ‘그의 기업이 새 시대를 이끌고 있다. 2023 올해 인물 한국 CEO.’ 심지어 이 기업의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미국 주끼리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을 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한국을 무시하던 미국의 인식을 180도 바꿔버린 이 한국인과 사업의 정체를 알아보겠습니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날 때부터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해야 했는데요. 하지만 농사만으로는 8남매 가족이 먹고사는 것도 빠듯했습니다. 이런 가난이 지독히도 싫었던 소년은 집에서 소 한 마리 판 돈을 훔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고향을 떠나며 다짐했는데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변호사가 되겠다!’ 서울에서 구두닦이, 신문 배달, 우유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미래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는데요. 우연히 점원으로 일하던 쌀가게를 인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연이 소년 속에 잠들어 있던 사업가 기질을 깨워버렸습니다. 쌀가게를 인수한 후 단골이 늘어나고 매상도 상승하고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잘 나가는 가게가 되었는데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변호사가 되려 했던 소년은 잘 나가는 쌀가게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본이 군수품 비축을 위해 쌀 판매를 금지하고 배급제를 실시하며 잘 나가던 쌀가게는 순식간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장사의 맛을 알게 된 청년은 다시 변호사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업을 물색했습니다. 쌀가게를 운영하며 열심히 모은 돈 3,500원으로 시작한 다음 사업은 카센터, 여기서도 그의 재능은 꽃을 피웠는데요.

인수 당시 적자로 허덕이던 카센터가 개업 20일 만에 인수 잔금을 모두 갚을 정도로 잘 나가게 된 것입니다. 카센터까지 성공하자 제대로 자신감이 붙은 청년은 다음 계획을 짜기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청년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이가 없네’

청년의 어이없는 계획은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 판매량은 연간 천 대도 되지 않을 만큼 굉장히 저조했습니다. 수입되는 물량도 적고 너무 비싸다 보니 한국에서 자동차는 아무나 살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현실이 이런데 청년은 수십 번, 수백 번씩 자동차를 조립, 분해하며 자동차 부품부터 엔진구조까지 자동차에 대한 모든 것을 공부해 나갔습니다.

카센터를 운영하며 한국 자동차 생산을 꿈꾸던 카센터 청년, 그는 바로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님이었습니다.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자동차 개발은 맨땅이 헤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 미국 포드와 조립 기술 계약을 맺었고 1년 만에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게 되었는데요. 드디어 자동차를 만드는 기업이 되었지만, 현실은 포드의 부품을 조립 생산하는 기지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던 정주영 회장님은 포드를 찾아가 이번에는 현대와 50 대 50으로 투자해 합작회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는데요.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포드의 입장에서는 이제 겨우 조립을 시작한 한국에서 자동차 개발에 뛰어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투자의 가치를 전혀 못 느낀 것입니다. 한국을 무시하는 듯한 포드의 태도에 제대로 자존심이 상한 정주영 회장님은 포드와 더 이상 함께하지 않겠다고 발표합니다. 그 뒤 어떻게든 직원들과 국산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매일 밤을 새우며 노력했는데요.

몇 년간 맨땅을 들이받다 보니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갖추긴 했지만 역시나 100% 국내 기술로만 자동차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주영 회장님에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73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 조제토 쥬지아로와 협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현대 직원이 이탈리아로 직접 가서 자동차를 만드는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노트를 가지고 직원들과 밤을 새워 노력한 끝에 차체 설계를 끝마칠 수가 있었는데요. 그렇게 마침내 한국에서는 한국의 기술로 만든 완성차 포니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포니를 공개하며 한국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해서라도 반드시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자동차에는 2만여 가지의 부품이 들어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는 데 자동차 사업은 큰 힘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실제로 완성차가 가지는 가치는 어마어마했습니다. 포니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국내시장을 석권했고 마이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 냈는데요. 그리고 곧 에콰도르, 아프리카, 중동 등으로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킬 것이라는 정주영 회장님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던 것이죠.

그런데 1977년 5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주한 미국 대사가 정주영 회장님에게 단독 만남을 요청한 것인데요. 그 만남에서 충격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현대가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한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미국 기업의 제품을 조립 생산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꽤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국내는 물론 동남아까지 현대가 차지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언제까지 한국은 조립 생산국으로만 남아야 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묵묵히 듣고만 있자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 제안을 거절한다면 현대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및 다른 나라에서도 고전하게 될 것입니다.’

포니로 기술력을 인정받았으면 됐지 한국 사정에 한국인들이 언제 차를 살 줄 알고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냐며 포기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협상이 아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망하게 하겠다는 협박이었죠. 마침내 정주영 회장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건설로 번 돈을 써서 실패하더라도 후대들이 자동차를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다면 나는 실패해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 정주영 회장님이 협박에 굴복해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현대는 자동차 산업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소나타, 그랜저, 아반떼, 산타페 등을 차례로 생산해 내며 국내 부동의 1위, 그리고 세계 3위 자동차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자동차는 더 이상 따라가는 기업이 아닌 앞서가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차세대 자동차 시장을 2개 다 선점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수소 자동차에서는 압도적인 1위, 전기자동차는 탑5에 안착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 자동차 잡지인 모터트렌드가 선정한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워리스트 50위 안에 현대자동차의 정의선 회장이 1위를 하며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잡지에서 나온 발표라 더 놀라움을 주고 있는데요. 그리고 지난해 현대의 전기차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치열한 투자유치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탐나는 기업이 된 것이죠.

한국 같은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 산업을 하냐고 했던 미국에서 인정받은 것이라 더욱 뿌듯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모두가 No라고 할 때 정주영 회장님처럼 도전장을 내밀어 보는 불도저 같은 한국 기업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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