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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개발하고, 전두환이 폐기한 핵기술… IAEA가 한국 의심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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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8월,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사톰’이 공개한 영상에서 ‘차르 봄바’라는 폭탄이 등장합니다. 러시아어로 ‘차르’는 황제 또는 군주로 해석되는데, ‘황제 폭탄’이라 부르는 이 ‘차르 봄바’는 인류가 만든 가장 잔인한 폭탄으로 일컬어집니다.

소련은 1961년 10월 30일 오전 11시 33분, ‘노바야 제믈랴’에서 차르 봄바 폭파 시험을 진행했는데, 60년 만에 공개된 영상 속 차르 봄바는 길이 8m, 지름 2m, 무게 27톤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다만 27톤에 달하는 초대형 수소 폭탄이 그대로 낙하할 경우 지진 우려가 있어 4km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투하했죠. 그리고 차후 영상을 분석해 보니 폭발력은 50메가톤이었는데,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한 ‘리틀 보이’보다 3,333배 강력한 수준입니다.

영상에 전부 담을 수 없었지만, 반경 35km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버섯구름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의 7배인 67km 상공까지 치솟았으며, 1,000km 떨어진 핀란드 가정집 창문이 박살 났다고 하죠.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개된 이 영상을 본 많은 한국인은 “소련에 핵무기 기술이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라며 “한국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꿈과 같은 무기”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과연 그럴까요?

지난 1월 30일,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인 ‘스팀슨 센터’에서는 전 세계 핵 전문가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이날 세미나 주제는 단연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따른 한국의 핵무장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 핵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시그프리드 해커’ 박사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핵무기는 즉각 만들 수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미국 최대 핵 연구시설인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지낸 인물로, 북한의 초청을 받아 영변 우라늄 농축 시설과 원심 분리기 시설 등을 직접 둘러본 몇 안 되는 핵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국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핵실험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한국의 어느 지역이 자기 땅 지하에서 핵실험을 허락할지 궁금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은 이미 핵무기 개발을 위한 충분한 기술력에 과학 기술까지 가졌으나, 가장 큰 문제는 핵무기 생산 전 진행될 핵실험 장소가 여의치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실제로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외국 전문가들의 일방적인 주장인 것일까요? 이번엔 한국의 핵 개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역대 한국 대통령 중 핵무기에 가장 큰 관심과 열정을 쏟은 인물은 아마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겁니다. 

1970년대 그는 주도적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설득 속에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최소 1978년까지 자체적인 핵 개발 의지를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안보 전문 연구기관인 노틸러스 연구소가 공개한 미 중앙정보국 CIA 기밀 해제 문서에 나타났습니다. 

1978년 9월 5일에 작성된 CIA 보고서 <South Korea: Public Discussion of the Nuclear Option>에 따르면 당시 박동진 외무장관은 “미국이 남한으로부터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킨다면 한국은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검토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몇몇 언론이 200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9%가 한국이 핵무장했으면 좋겠다는 응답을 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당시 한국의 안보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핵무기를 보유해야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78년 6월에 작성되어 기밀 해제된 또 하나의 보고서 <South Korea: Nuclear Developments and Strategic Decisionmaking>은 한국의 핵 개발 상황을 좀 더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토대로 노틸러스 연구소장 ‘피터 헤이즈’가 <박정희, CIA 그리고 폭탄>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했죠. 보고서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이 최초로 핵무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은 1969년 경입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1968년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특수부대를 침투시키는 도발을 감행하자 박정희는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북으로 치고 올라가고 싶었으나, 미국이라는 존재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죠. 언젠가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뼛속 깊은 두려움이 몰려오던 찰나에 이런 사건이 터지자, 슬슬 핵무기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그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에 엄청난 안보 위기가 터졌습니다. 1969년 당시 미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이 미국은 동맹국들에 안보를 제공하지만, 국가 방위의 1차적인 책임은 그 국가에 있다는 소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겁니다. 이는 한국에 있어서는 상당한 위기였는데, 왜냐하면 한국은 주한미군을 한국 땅에 주둔시킴으로써 대북 억지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에 주둔한 지상군을 점차적으로 철수하겠다는 의미였고, 실제로 독트린 발표 2년 뒤 1971년 3월에는 주한미군 7사단 2만 명이 한국 땅에서 철수했는데요.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이 품속에 품었던 핵무기 개발은 이제 잠재적인 계획이 아니라 당장 착수해야 하는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CIA 한국 지부 총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는 “한국에 우호적이던 미국이 갑자기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시도했던 핵 개발 때문”이라고 털어놨습니다. 

실제로 2005년 공개된 CIA 보고서 <한국: 핵 개발과 전략적 의사결정>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74년 12월 ‘890 계획’이라는 암호명으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책임 아래 미사일 팀, 핵탄두 팀, 화학탄두 팀을 구성해 수십 명의 국내외 과학자 및 기술자가 핵무기 연구에 착수한 겁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미국이 1976년 “핵 개발을 중지하지 않으면 한국과 모든 관계를 중단할 것”이라며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포기했죠.

그런데 미국의 압박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을 신뢰하게 된 사건도 이때 일어났습니다. 바로 판문점 도끼 사건인데요.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던 그해 8월 18일, 한국인 노무자 5명은 북한 쪽 초소에 대한 시야가 가린다며 UN군 제3초소 앞에서 가지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를 미군 병사 6명과 한국군 5명 등 11명의 UN군 장병이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호위하고 있었는데요. 2명의 북한군 장교와 10명의 북한군이 다가오더니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군 장교는 시야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며 이를 무시했는데, 잠시 후 트럭을 타고 북한 병사 20명이 몰려오더니 도끼를 빼앗고 곡괭이를 휘두르는 등 일방적인 리치를 가하기 시작하죠.

결국 이 사건으로 미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마는데요. 사건은 단 4분 만에 종료되어 미 기동타격대가 도착했을 때 북한군들은 이미 군사분계선 너머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이에 불같이 화가 난 미국은 핵 탑재가 가능한 F-1 전투기 20대를 한반도에 배치하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는 F4-24대가 출격했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북한 해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무력시위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을 충분히 압박하지는 못했지만, 박 전 대통령을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아마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이 한국을 돕겠구나…”라면서 확신을 갖게 된 것이고, 이에 핵 개발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1977년 1월 취임한 ‘지미 카터’는 대선공약으로 주한미군 제2사단 철수를 내세웠는데, 이에 대한 미 의회 및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추진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산업화도 완성하지 못했고, 모든 분야에서 취약한 상황에서 북한의 도발까지 걱정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니까요.

어쨌든 공포감은 특정 행동을 불러오기 마련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다시금 핵 개발 프로그램을 꺼내 들기도 했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알로 시해되기 전까지 말이죠. 

이 역시 당시 CIA 기밀문서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2차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이 원했던 것은 지금은 기를 쓰고 반대하지만, 결국에는 핵 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스라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 1974년 프랑스와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는데, 프랑스는 미국이나 소련 등과 같이 핵 보유를 제한하는 것보다 전 세계적으로 핵 보유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전 세계적인 핵 보유가 결국에는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봤고, 이스라엘 역시 1950년대 프랑스가 도와준 덕분에 핵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편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핵 개발이 88% 이상 완료됐다. 1983에는 핵무기가 완성될 것 같다.”라고 밝혔었는데, 충청북도 괴산군의 우라늄 광산에 대한 개발도 진행했었습니다. 이 광산은 유사시 핵무기 제조에 즉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우라늄-235의 함유량이 낮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얻은 것도 있습니다. 핵 개발에 대한 의중을 표하고 3개 팀으로 나눠 핵 개발을 진행하는 등의 과정에서 1978년 한국이 사거리 180km의 백곰 미사일을 개발해 낸 겁니다. 이는 의정부에서 평양까지 직선거리에 해당하는데, 일단 미사일의 존재 자체로 북한에는 상당한 위협이 됐죠.

핵 개발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니, 일단 북한까지 핵을 날려 보낼 미사일이 먼저 준비된 겁니다. 실제 핵무기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당시 오원철 경제 수석은 이미 핵연료 재처리 기술도 확보하고 있었고, 핵심 부품들도 이미 밀반입에 성공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다만 1979년 10월 26일 이후로 한국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핵기술을 그대로 폐기했는데, 이는 전두환의 역할인데요. 박정희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그는 미국의 환심을 사고, 그의 지위를 인정받을 목표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해 버리면서 결국 88%에 달했던 핵 개발은 12%를 남겨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시금 핵무기 개발 논란이 터진 것은 2004년입니다. 당시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대뜸 “한국이 우라늄 0.2g을 농축했다.”라며 실험 내용과 기술 수준 등에 대한 사찰을 실시한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콘텐츠에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이 쥐도 새도 모르게 추출했던 0.2g의 우라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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