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부터 중국 국가 박물관에서 개최한 ‘동방길금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 한중 수교 30주년과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도 공동으로 참여한 상징적인 전시였죠. 그런데 두 달 후 국내 한 언론사 특파원이 박물관을 방문했다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설명용으로 제공한 한국사 연표에서 고구려와 발해가 삭제되고, 고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으로 명시한 것을 건국연대를 ‘알 수 없음’을 뜻하는 물음표로 처리하는 조작을 가한 겁니다.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접한 국립중앙박물관은 부랴부랴 연표 수정과 사과를 요구했습니다만 중국은 역사 연표를 철거하는 미봉책으로 마무리 지어버렸죠.
이러한 중국의 저의는 명백합니다. 고조선 역사 전체를 부정하고 자기들이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여기는 고조선 말기 위만조선만 인정하겠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통째로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역사 도둑질을 버젓이 자행하겠다는 것이죠. 사실 2002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은 지금까지도 암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고구려가 그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오늘날 평안도, 랴오닝성, 지린성을 주무대로 한반도 중부와 남부, 헤이룽장성 및 연해주, 몽골 동부까지 지배했었으니까요. 현 중국 영토를 지배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의 역사로 가져갈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더구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북한까지 있으니 고구려 역사 훔치기는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고구려 역사를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 역사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물이 대부분 북한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땅, 그것도 옛 신라 지역인 경남 의령에서 공사장 인부의 곡괭이에 어마어마한 황금불상 하나가 끌려 나왔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동불상이자, 승려들이 불교 전파를 위해 만든 천 개의 불상 중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북한에서 짝퉁까지 만들기도 했었던 전설적인 불상, 오늘은 국보 제119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도로 공사장에서 가져온 돌덩이가 국보였다든가, 시험 삼아 발굴한 왕릉에서 1만 점이 넘는 보물이 쏟아진다거나, 주꾸미 덕분에 발견된 태안 앞바다 보물선 등의 발굴 스토리는 그 자체만으로 흥미진진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국보급 유물이 오늘의 주인공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일거리가 없어 누구나 한 끼 식사를 걱정하던 1963년, 경남 의령 대의면 하촌리 마을 밖에는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이런 공사에는 으레 인부가 필요하고 인부들은 대부분 인근 마을에서 모집합니다. 당시 40세였던 강갑순 씨는 큰아들 전병철 군과 함께 공사장에 품을 팔러 나왔고 야산 비탈의 돌무더기 제거 작업에 투입됐습니다. 곡괭이를 들고 돌무더기를 파헤치던 중 둘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곡괭이로 걷어낸 널찍한 잡석 아래 네모반듯한 작은 공간이 나왔는데 그 속에 금빛 찬란한 작은 부처가 반드시 누워 있었던 것이죠. 금빛으로 된 불상을 발견하면 누구라도 그러하듯 대단한 물건임을 알아챌 수 있는데, 강갑순 씨 역시 한눈에 대단한 물건임을 직감했습니다.
모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조용히 품에 품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이 나기 시작해 파출소에 불상 발견 사실을 신고했습니다. 불상은 곧 경남도청으로 보내진 후 즉각 문교부에 보고되고 수차에 걸친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가 진행되었죠.
16.2cm 높이의 불상 전체에는 도금이 두껍게 입혀져 있어 생생한 금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고 불상은 둥근 연화대좌 위에 부처님의 소용돌이치는 불꽃 모양을 새긴 광배와 한 몸으로 주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던 전문가들은 정체를 확인한 후 혼이 쏙 빠지도록 놀랐습니다. 발굴 지역만을 고려한다면 이는 신라 금동불로 분류되었어야 하지만 이는 고구려 불상으로 분류된 이유이기도 하죠.
이유는 광배에 새겨진 명문 때문인데요. 광배 뒷면에는 주물이 끝난 후 끌로 새겨 넣은 4행 47자의 해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해석에 다소 견해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연가 7년인 기미년의 고구려 낙랑에 있는 동사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을 비구인 OO이 공양하다.’
이 내용을 대략적으로 풀어보면, 중국 역사에는 없는 연호인 연가 7년 다음에 등장하는 간지인 기미년에 해당하는 것은 479년, 539년, 599년인데 조각 형식과 양식적 특징에 비추어 보면 539년으로 확인됩니다. 낙랑은 현재 평양으로 추정할 수 있고, 동사가 절 이름인지 아니면 낙랑 동쪽의 절이라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절에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제3행에서 보듯 이 불상은 천 개의 불상 중 하나로 그것도 현겁천불 중 29번째 부처인 인현의불로서 조성됐음이 나타납니다. 즉, 평양의 한 절에서 천 개의 불상을 만들었는데 그중 29번째 불상이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것이죠. 나머지 999개의 불상의 행방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러한 명문이 없었다면 ‘신라 불상 특유의 단순성과 거친 조형성이 돋보이는 작품’ 정도로 불렸겠지만, 광배에 새겨진 명문 덕분에 고구려 불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면서 유명하기는 하지만 고구려 역시 불교가 성행했습니다.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한 직후인 375년에 벌써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었고, 18년 뒤에는 평양에 구사를 지었습니다.
또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며 동명성왕의 무덤도 함께 옮기고 무덤 옆에 웅장 규모의 정릉사라는 대사원을 건립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들 사찰에 어떤 양식과 도상의 불상이 안치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에서 발견된 불상은 대부분이 5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인데요. 이는 삼국의 고대국가 형성기에 전래된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까지 그만큼 긴 시간이 걸렸음을 뜻합니다.
1세기 남짓한 한국 고대 조각사의 공백기를 깨고 우리나라 조각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으로 그 상징성을 인정받아 1964년 3월 30일 국보 제119호로 지정됐죠. 그런데 초반에 말씀드렸듯 현재 대한민국에서 고구려 관련 유물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고, 또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국보급 고구려 금동불상이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국내 문화재 도난 사건 중 가장 엽기적인 사건이 이 금동불상에게 발생했습니다. 국보 지정 3년 뒤, 1967년 10월, 불상은 덕수궁 미술관 특별전시실 2층 제3전시실에서 전시됐습니다.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관람하도록 했죠.
그런데 10월 24일 오전 10시 30분 미술관 경비원이 개관하고 전시실을 둘러보다 온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젖어버릴 만큼 오싹함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진열장 가운데 하나가 뒤로 밀려나 있고 내부가 텅 비었는데 금동불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더 놀라운 점은 당시 미술관 안에 120여 명의 관람객이 자유롭게 관람 중이었다는 사실인데요.
즉시 진열장 앞으로 뛰어간 경비원은 불상 대신 푸른색 볼펜으로 휘갈겨 쓴 쪽지 한 장만 발견했는데 쪽지에는 ‘문화재관리국 국장님께 직접 알려라. 오늘 밤 12시까지 돌려주겠다고. 이는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얕은 수작을 부리다 죽은 자식 불알만지는 격 되지 말고 이따 11시경에 국장께 알리겠다. 지문 감정은 의뢰할 필요 없다.’ 경비원은 즉각 미술관과 대한문을 폐쇄하도록 조치하고는 경찰에 신고했는데 도난 확인 후 13분 뒤의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120여 명의 관람객이 있는 미술관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대담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요?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각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 국제공항과 국제항만을 봉쇄한 후 철저한 검문검색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면서 11시경 국장에게 알리겠다는 범인의 쪽지를 믿고 기다렸죠. 그러다 11시 30분이 되어 한 통의 전화가 국장에게 걸려 왔는데 목소리는 기껏 30대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범인이오. 미안하오. 약속대로 돌려주겠소.’라는 말만 남기고 통화는 끝, 오후 3시 또다시 전화를 건 범인은 유네스코 회관 태궁다방에 쪽지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쪽지를 확인해 보니 생활이 곤란해 일시적으로 사건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후 6시 다시 전화를 건 범인은 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전화를 끊었고, 마침내 밤 11시 5분 마지막 전화가 걸려 옵니다. 범인은 ‘순금인 줄 알았는데 아니고 세상도 떠들썩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 견디기 힘들다. 한강철교 제 3교각 16번과 17번 받침대 사이 모래밭에 숨겼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죠.
국장은 운전사를 깨워 한강철교로 향했고 실제로 제3교각 밑 모래밭에서 비닐봉지에 쌓인 불상을 발견했습니다. 도난당했던 국보 제119호가 12시간 만에 돌아온 겁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엽기적인 사건의 범인은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고 의문점만 남았습니다.
그가 남기고 싶었다는 세계 신기록이 무엇인지, 관람객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상을 훔쳤는지, 그리고 그것을 굳이 돌려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온갖 추측만 나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북한이 이 불상 짝퉁을 만들었던 일도 있었으니까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작업이 한창이던 때 우리와 북한의 관계는 꽤 나쁘지 않았습니다. 당시 우리 민족화해협력범국민위원회는 북한의 문화보존지도국과 함께 사업을 벌이기도 했죠. 이를 통해 북한의 고구려 유물 227점을 서울에서 전시하는 2004 남북 공동 기획 고구려 문화전이 열렸는데요.
다만 유명 박물관 섭외에 실패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한 상가 건물 컨벤션홀에서 전시됐습니다. 북한에서 온 고구려 유물을 선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죠. 북한 정부에서 보낸 유물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였던 동국대 장충식 교수는 2004년 저서 ‘한국 불교미술 연구’를 통해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라고 소개된 연간7년명금동일광삼존상에 대해 뭔가 의심스럽다고 언급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중국이 한국에 있는 불상 2개를 베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외형적으로 북한의 불상은 서울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계미명금동삼전불입상과 동일합니다. 부처의 형상과 자세, 의상, 옷 주름, 연꽃잎 모양의 광배, 광배의 소용돌이 문양과 용 모양 장식, 받침대 문양까지 완벽한 쌍둥이죠. 물론 당시 동일한 불상을 여러 개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문제는 광배에 새겨진 명문입니다.
당초 우리 학계에서는 국보 제119호 불상의 명문을 제입구회 현세불로 판독했었는데, 그 뜻은 29번째 현세의 부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훗날 제입구 인현의불로 읽어야 한다고 수정됐죠. 그런데 북한의 불상은 이걸 처음 판독했던 대로 제입구회 현세불이라고 적은 겁니다.
당초 틀리게 판독한 부분까지 그대로 베낀 것이죠. 실제로 명문까지 똑같은 유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중요한 건 2004년 5월 4일 서울 온 북 고구려 불상은 가짜라는 관련 기사가 나갔음에도 반박 기사나 인터뷰는 없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가 살아있는 북한에서도 베끼는 유물이라니요.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고구려의 유물과 기록은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만은 북한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고구려의 유물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중국의 동북공정도 힘을 잃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