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올림푸스, 혹은 올림포스라고 불리는 산이 있습니다. 올림포스산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12신이 사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산은 실제로 안개가 많이 껴있고, 1년 중 9개월 동안 산정이 눈에 덮여있어 정상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고 아래에서도 잘 보이지 않아 이런 신화가 만들어지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높은 산에 지은 황금 궁전에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산을 정복한 후 신화 속에 나오는 제우스의 황금 궁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며 더 높은 고산에 신들이 살 것이라 생각했죠.
이런 식으로 고산은 자꾸만 바뀌어 마침내 그리스 북부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 진정한 올림포스가 된 것인데요. 즉,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에 신들이 사는 곳으로 믿게 된 것이죠. 실제로 산꼭대기에는 움푹 파인 평지가 있고 그 뒤로 거대한 암벽이 있는데 ‘제우스의 왕좌’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암벽이 등받이고 평지가 발 디딤대라는 것이죠.
이처럼 거대하고 높은 산은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오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전설 같은 산이 있습니다. 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낮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신들의 산’이라 불리는 곳,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으면 꼭 묻어달라고 유언으로 남긴 바로 그 산이 있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경주로 날아가 보겠습니다. 천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왔던 신라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스토리를 품고 있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스토리는 유독 불교와 관련이 깊은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에 대한 이야기일 겁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 법흥왕 시기로 그는 토착 신앙 대신 불교라는 이념에 입각해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고는 신라 역사상 최초의 절 ‘흥륜사’를 지어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는데 이에 대해 토착 신앙에 기대 신라를 지배하던 6부족 연맹체가 반기를 들었죠.
왜냐하면 불교를 공인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물론 신라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중대한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나선 이가 바로 이차돈입니다.
그는 법홍왕에게 왕명을 사칭해서 사찰을 건립할 때니 자신을 왕명 사칭죄로 처형해 왕권에 저항 신하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리라는 묘책을 제시했습니다. 순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그는 만일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는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단행했죠. 그의 목이 베어지는 순간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고 천지가 진동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하늘로 솟구쳤죠.
신라본기는 ‘법흥대왕 즉위 14년에 소신 이차돈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순교 덕분에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6부족 연맹체는 몸을 굽혔고 이로써 신라에 불교가 자리 잡게 됐죠. 이렇게 불교가 공인된 덕분에 신라에는 불교 유적이 유독 많은데 명산이라 불리는 곳들도 이와 관련됩니다.
보통 경주를 대표하는 산으로 토암산과 남산을 꼽습니다. 토암산은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렇게 불리는 것도 무리가 없고, 남산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내려와 머무는 산으로 잘 알려져 있죠. 남산에서 흘러내린 산 곳곳에 150여 개의 절터, 120여 구의 석불, 10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으니 말할 것도 없는 명산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산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산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경주 월성 동남쪽에 자리한 낭산입니다. 사실 낭산은 높이가 100m에 불과한 높은 언덕 수준이기 때문에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높이입니다.
보통 동서 폭이 좁고 남북을 쭉 뻗은 산세가 이리가 엎드린 모양이라 하여 ‘이리 낭’을 썼다는 설도 있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동쪽의 큰 별을 낭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월성 동쪽에 있는 산이라서 ‘낭산’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얼마 높지도 않은 산은 엄청난 스토리 품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야기일 텐데요.
낭산 꼭대기 정중앙에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릉이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생전 여러 신하에게 내가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그날이 오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죠. 여기에서 ‘도리천’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 꼭대기의 이상 세계를 말합니다.
이곳은 음욕을 끊지 못한 상태이지만 음욕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으며, 번뇌도 인간들처럼 복잡하고 심각하지 않은, 즉 신들의 세계입니다. 실제 당시 신라인들은 당시 도읍의 중심지였던 낭산을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으로 변화시켜서 신라의 서라벌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선덕여왕의 유언을 들은 신하들은 당연히 당황했죠. 아무리 불교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대라고 하더라도 묻어달라는 도림천이라는 장소를 알 리가 만무했으니까요. 신하들이 그곳이 어디인지 선덕여왕에게 묻자, 여왕은 덤덤하게 낭산 남쪽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난 후 신하들은 그 유언을 받들어 낭산에 릉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고 그것이 현재 선덕여왕릉 자리입니다. 낭산은 신라시대 벌써 성스러운 장소로 유명했습니다.
신라 실성왕 12년인 413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가을 8월에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는데 바라보니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마땅히 이곳은 복 받은 땅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렇듯 신라인들에게 토착 신앙의 성지였던 낭산은 불교가 유입된 이후 사천왕사와 망덕사 등 여러 사찰이 들어서면서 불교의 성지로 바뀌었고 왕들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무덤과 개인이 소망을 비는 기도처로도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연을 가진 낭산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를 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낮아 언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엄청난 신라의 문화유산이 몰려 있어 파도 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곳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우선 산기슭에는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터가 있고, 반대편 동남쪽 기슭에는 사천왕사 터가 있습니다.
670년 경 신라와의 연합을 깬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신라 조정에 도달하자 문무왕은 급히 고승을 모셔 방책을 물었습니다. 이에 명랑법사가 소환됐는데 그는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워야 한다는 충고를 했고 제대로 형태도 갖추지 못한 절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명랑법사는 고승 12명과 함께 문두루의 비법을 썼는데 당나라와 싸우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에 당나라 전함이 모두 침몰해 버렸죠. 이듬해 5만 대군이 재차 쳐들어왔을 때도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런 절터가 낭산 남쪽에 있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낭산을 바라보며 신문왕릉, 망덕사 터, 효공왕릉이 있고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새겨진 보물 ‘마애보살삼존 좌상’도 낭산 남쪽에 있고, 신라시대 대학자 최치원의 고택 독서당, 백결선생의 흔적 등 작고 낮은 뒷동산 수준이지만 엄청난 문화재가 즐비하죠. 그런데 잊을만하면 낭산에서는 유적과 유물 발굴 소식이 전해집니다.
2016년부터 낭산 일대를 발굴해 온 성림문화재연구원은 황복사에서 다양한 건물터와 유물 1,000여 점을 찾아냈습니다.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인데 1942년 황복사지 3층 석탑 해체 때 나온 사리함에서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임을 뜻하는 글귀가 나와 신라 왕실의 사찰일 것 추정됐었죠.
당시 석탑 해체 과정에서는 금제여래입상과 금제여래좌상이 연달아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었죠. 이에 경주시는 2016년부터 낭산 일대 과수원과 경작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시작했는데 그 결과 효성왕을 위한 미완성 왕릉과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와 도로 등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8월부터 진행된 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 대석단 기단 건물터와 부속 건물터, 그리고 화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 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가 발견됐죠. 출토된 1,000여 점 이상의 유물 대부분은 토기와 기와였는데 대체로 7~9세기 것들입니다.
화려한 장식을 수놓은 신장상의 화상석, 치미, 기와 등이 확인돼 격조 높은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을 증명했는데요.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7점의 불상 유물은 전 황복사 터가 7~10세기까지 신라 왕실 사원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연구원은 낭산 일대를 중심으로 거대한 신라 왕실 사원이 조성돼 그 옆 평지의 대찰 황룡사와 쌍벽을 이루며 경주왕경의 경관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절터에서 확인된 건물이나 주변 도로 터 등의 배치 구도를 감안할 때 남산의 동쪽에 해당하는 현재 보문동 지역도 통일신라시대 방리제가 실시된 계획도시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됐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에는 200평이 넘는 대규모 인공 연못의 바닥과 호안 석축을 확인했고 바닥에서는 절을 뜻하는 사를 비롯해 10여 개 글자가 쓰인 목간 1점과 눈금이 새겨진 나무자 등 목제유물들도 찾아냈죠. 그런데 낭산이 최근 큰 유명세를 치르고 있기도 합니다. 경주 여행코스 중 하나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인데 이유는 돌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반 낭산 기슭, 1,000여 평 땅에 작은 암자 ‘약사암’을 꾸린 김 모 씨는 우연히 발견한 돌들을 법당 안에 모셔뒀는데 이 법당을 알게 된 방문객들이 자꾸 돌에 대고 소원을 비는 겁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전국에서 건강 회복을 비는 사람들, 소원성취를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낭산 일대는 핫플이 됐습니다.
매달 방문객이 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작은 법당치고는 굉장한 홍보 효과를 누리는 것이죠. 약사암은 관광객들이 촛불 시주로 놓고 가는 돈을 모아 설이나 추석, 초파일에 이웃 돕기 성금으로 쾌척하며 사회에 환원하고 있습니다.
혹 경주에 가실 일이 있다면 낭산에 들러 약사암에 들러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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