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년(공민왕 23년) 공민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당시 공민왕이 갑작스레 살해당한 데다 새 왕의 출생에 대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우왕의 정통성에는 흠집이 날 수 밖에 없었고, 고려 왕실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도 크게 무너지게 됩니다.
우왕 3년(1377년) 5월 나이가 어느덧 43이 된 이성계는 지리산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둘째 아들 이방과가 그 뒤를 따르게 되는데, 그는 이 무렵부터 부친을 수행해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동북면의 이성계가 지리산으로 내려간 이유는 왜구 때문이었습니다.
홍건군이 잠잠해지자 왜적이 날뛰게 되는데, 일명 일본의 ‘남북조 내란’ 이라고 불리는 내전에 돌입하면서 대마도나 규슈의 무사들을 통제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해적들은 고려는 물론 중국 해안까지 진출해 백성들을 약탈하게 되면서 고려와 중국 모두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썩게 됩니다.
이성계에게 왜구는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동북면을 떠나서 남쪽 지역까지 싸우러 가야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왜구가 없었다면 이성계는 동북면의 무장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즉, 왜구 때문에 이성계는 동북면의 지역 무장에서 전국적인 무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리산에 침입한 왜적은 몇 번의 승전으로 사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왜적은 200보 거리에서 뒤돌아 몸을 숙인 채, 엉덩이를 두드리며 이성계를 조롱할 정도였습니다. 이를 본 이성계는 화살 한 대를 쏘아 그를 쓰러트렸고, 왜적들이 크게 당황하는 틈에 고려 군사가 달려들어 왜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그해 8월, 이성계는 서해도(황해도)로 달려갔습니다. 왜구가 신주, 문화, 안악, 봉주 등지를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우왕이 찬성 양백익, 도순문사 심덕부 등을 보냈지만 패배하였고,문하평리 임견미도 패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우왕은 선왕인 공민왕과 같이 이성계를 해결사로 택하여 전장으로 보내게 됩니다.
당시 왜구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일본 서남부 영주들 휘하에 있던 군인이었기에 도적 떼로 생각하고 달려들었다가는 낭패하기 십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홍건적을 토벌하러 나설 때나 왜적을 토벌하러 전장에 나서기 전장에 나서기전, 먼저 싸웠던 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기본 전략을 세울 정도로 치밀했기에 또다시 승전을 하게 됩니다.
우왕 4년(1378년) 4월에는 왜적이 승천부(강화도)에 상륙해 개경을 점령하겠다고 호언을 합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개경과 지방의 민심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다급해진 우왕이 대궐 문에 군사를 배치하자 개경의 민심이 더욱 소란스러워집니다. 백성들이 대궐까지 위험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판삼사사 최영은 군사를 일으켜 개경 남쪽 해풍군에 진을 쳤는데, 이는 개경을 방어하기 위한 결사대였습니다.
왜적들은 최영만 무너뜨리면 개경으로 직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중간에 위치한 여러 둔진을 내버려 둔 채, 최영의 중군을 공략했습니다.
최영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사직(국가)의 존속과 멸망이 이 한 싸움으로 결정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분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패배하면서 그 자신도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가 최영의 부장 양백연과 함께 달려가 구원했으며, 그 공격으로 인해 왜적의 진영이 흔들리게 되자, 최영도 전열을 정비해 다시 공격하게 됩니다.
결국 적진이 크게 무너지게 되고, 남은 왜적들은 밤중에 모두 도주하게 됩니다.
우왕 6년(1380년)에 고려를 공격한 왜구는 과거의 왜적과는 달랐습니다. 해적단의 규모가 무려 500여 척에 이르렀으며, 먼저 진포(충남 서천~금강 어귀)를 점령하고 주둔했습니다. 소수의 왜적이 일시에 상륙해 재물을 약탈하고 재빠르게 퇴각하던 과거의 행태와 달랐습니다.
본대를 충청도에 주둔시키고 전라도, 경상도까지 마음대로 휘저으며 노략질했습니다.
여름 내 농사지은 곡식을 강탈해간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판을 뒤덮을 정도로 고려의 백성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연해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었기에 ‘태조실록’ 총서에는 “왜적의 침략 이래,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왕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 도원수 심덕부에게 ‘전함 100척을 주어 왜적을 격퇴하라’고 명했는데, 이 전투가 바로 ‘진포해전’이었습니다.
당시 나세, 최무선 등이 이끄는 고려 전함에는 왜적이 생각지도 못한 비밀무기인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최무선이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 개발에 성공을 하면서 각종 화포를 제조했고, 배에도 실을 수 있게 개량을 시켰습니다.
이를 모른 왜적은 배들을 묶어 흩어지지 않게 고정시켰습니다. 선단을 결속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전략이었지만 서로 묶여 있는 선단은 화포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최무선이 화포로 공격하자 서로 묶여 있던 500여 척에 이르는 왜적의 배들은 대부분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배를 잃은 왜구들이 육지에 상륙해 약탈에 나서면서 내륙 각지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옥주(충청도 옥천)까지 들어온 왜구들이 먼저 상륙해 있던 왜구들과 합세해 상주, 영동까지 약탈을 했습니다.
우왕은 다시 전가의 보도처럼 이성계를 불러 양광(경기 일부 및 충청남북도 일부), 전라, 경상도를 아우르는 삼도도순찰사로 삼아 내려보냈습니다. 그사이 왜적은 무인지경으로 내륙을 유린했고, 경상도 상주에서는 6일 동안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관아 창고들을 불태웠습니다.
기세가 오른 왜적은 북상을 하게 되는데, 이성계와 맞닥트린 곳이 바로 황산이었습니다. 사기가 오른 왜적들은 동북면에서 온 이성계가 안중에도 없어 보였습니다.
이성계는 가장 앞에 서서 왜적과 맞서 싸웠는데,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곧바로 다른 말로 갈아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또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서 이성계는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다리의 화살을 뽑아버리고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게 됩니다.
당시 왜적 중에는 십오륙 세 정도 되는 용맹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흰말을 타고 달리면서 창을 휘두르면 고려 군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졌기에 고려군은 그를 두려워하며 ‘아지발도’ 라고 부르며 피했습니다.
심지어 아지발도는 갑옷과 투구로 목과 얼굴을 감싸 화살을 쏘아 맞힐 만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궁이었던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투구의 정자를 화살로 쏘아서 맞추어 투구 끈이 끊어지게 만들었고, 깜짝 놀란 아지발도가 급히 투구를 바르게 썼지만 이성계가 다시 맞추어 투구가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그 틈을 타서 쏘아 죽이니 적군의 기세가 단숨에 꺾였습니다. 이를 본 고려 군사가 일제히 달려들자 전세가 바뀌게 되면서 왜적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고려군은 이들을 추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냇물이 왜적의 피로 물들어 물을 그릇에 담아 맑아지기를 기다렸다 마셔야 할 정도였으며, 1600여 필의 말을 얻고 무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노획합니다.
이성계는 군악을 울리고, 여러 광대에게 나희를 베풀게 해서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했는데요. 군사들이 바친 왜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였습니다.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자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 동쪽 천수사 앞에서 영접할 정도로 공훈을 인정받았는데요. 이 전투가 바로 이성계를 전국적 무장으로 각인시킨 황산대첩이었습니다.
조선을 개창하기 12년 전인 우왕 6년(1380년)의 일로 당시 이성계는 고려를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이 영웅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릴 줄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이성계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지배질서가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원나라가 무너지고, 일개 빈농 출신인 주원장이 중원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옛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고려의 450년 왕업이 무조건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이성계를 찾은 서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정도전의 운명도 크게 변하게 됩니다. 새롭게 우왕을 추대한 이인임은 친원 정책으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초원으로 쫓겨간 북원에 국서를 보내 우왕의 즉위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친명파였던 정도전은 발끈하며, 뜻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도당에 글을 올려 반대를 했습니다.
‘공민왕이 친명 정책을 내세웠으니 이를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인임 일파는 정도전 등이 작성한 글을 각하하고,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정도전이 격렬히 항의하자 권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곧바로 유배길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같은 주장을 펴서 함께 유배되었던 정몽주를 비롯한 다른 친명사대부들은 다음 해에 유배가 풀리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정도전만 제외된 것을 보면 그는 이인임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귀양길에 오른 뒤에야 정도전은 진짜 세상인심을 알게 됩니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뻔질나게 오던 친구들의 발길이 끊겼으며, 그의 부인도 남편을 원망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다행히도 친구들이 비워버린 그 공간을 채워준 것은 유배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수도인 개경에서 벼슬 살던 사대부가 소재동까지 흘러온 이유가 유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개경의 친구들이 모두 외면한 정도전을 소재동 사람들은 받아주었습니다.
정도전은 소재동 사람들은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게 새롭게 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 농민과 천민들이 본 세상은 달랐습니다. 권력층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세상, 그 세상이 정도전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왕 3년(1377년) 유배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게 중도부처 되면서 고향 영주로 돌아왔지만 왜구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 정처 없이 피난 다니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정착지로 여겼던 부평부 남촌에서 서당을 열고 마음을 다잡지만 그마저도 재상 왕씨가 별장을 짓는다는 이유로 헐어 버리면서 또다시 유랑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해안도 아닌 내륙 지방의 백성들이 왜구 때문에 도망쳐 다녀야 하는 나라, 왜구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서 자신의 사익을 위해 서당을 헐어 별장을 짓겠다는 재상들, 이런 나라에선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었습니다.
너른 천지에 그를 받아 주는 곳이 없었기에, 그는 북방길에 오르게 됩니다. 우왕 9년(1383년) 가을, 정도전은 북방 함주로 향했는데, 이는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때 성균관 박사를 역임한 정도전을 이성계가 문전 박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서 모두 이 만남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무릇 임금(이성계)을 도울 만한 것은 (정도전과)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었다.’ 정도전을 알아본 이성계는 군막 안으로 그를 끌어당겼습니다.
정도전은 경서만 공부한 유학자가 아니었고, 이성계도 활만 쏘는 무장이 아니었습니다. 이성계는 역사를 좋아했고, 풍수에 능했으며, 웬만한 사대부 못지않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에게는 이성계가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새 왕조 개창에 대한 방안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이 전부터 느끼던 갈증이 무엇인지 정도전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가 필요했습니다.
정도전의 머릿속에는 천 리 밖 계책을 결정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고, 이성계에게는 그 계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일곱 살 어린 정도전을 기꺼이 스승으로 삼았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군으로 삼게 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자체로 고려 왕조를 폭풍 속으로 몰고 갈 조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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