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전설의 도시, 경주는 1970년대 어마어마한 변화의 물결에 휩싸입니다. 1971년 6월, 한국 최초의 제철소인 포항 제철에서 고로 점화식에 참석한 후 귀경길에 오른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경주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경주를 찾는 관객이 늘고 있다”는 보고는 흐뭇했지만 눈에 보이는 경주의 모습은 허망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불탑과 방치된 불상, 관리되지 않은 고분 등은 찬란했던 신라의 향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죠. 그리고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당시 ‘정소영’ 청와대 경제 수석 비서관에게 “경주를 세계인들이 찾아올 문화 관광지로 조성하라”는 친필 특명을 내립니다.
이것이 1971년 8월 13일에 확정된 ‘경주 관광 종합 개발 계획’입니다. 이 계획에 포함된 수많은 사업 중에는 옛 경주 시청 앞 도로와 첨성대 지역을 연결하는 계림로 도로 공사도 함께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도로 양쪽에 배수관을 설치할 땅을 파내다 상상도 못 할 유물 하나가 출토됩니다. 신라시대 유물이기는 한데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한반도에서는 만들어본 적도 없는 물건인지라 고고학자들은 고민에 빠졌는데요. 이 물건은 어떻게 경주 한복판에서 발견된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1903년 12월 17일,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실험이 하나 진행됩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시골 마을 언덕에 선 두 아이는 ‘플라이어’라고 이름 붙인 275kg짜리 기계를 옮겨두고 과연 이 고철 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기로 했는데요. 동전 던지기로 누가 조종간을 잡을 것인가를 결정했고, 형 윌버가 조종간을 잡습니다. 나무와 천으로 만든 조종석에 오른 윌버가 경사로에 설치된 철로를 따라 15m 정도 달린 후 이 고철덩어리는 드디어 하늘을 날았습니다. 3초의 비상, 이는 조류가 아닌 인류가 난생처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 하늘에 머문 시간이었고, 이는 인류 역사를 바꿔버렸습니다.
2차원에서 생활하던 인류의 생활 반경은 이제 3차원으로 확장됐고, 이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하늘에 1분 이상 머물렀던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라이트 형제가 뿌린 비행기라는 씨앗이 인류사에 등장했고 현재 연간 25억 명 이상의 인간이 여객기를 타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죠. 그런데 비행기가 없다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데 1973년, 경주에서 발견된 유물은 아무리 둘러봐도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비행기가 없었다면 도저히 발견될 수 없었을 물건이니까요.
신라 시대의 거대한 왕릉이 자리 잡은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는 너비 10m의 2차선 도로 ‘계림로’가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한 신라의 유물이 발견된 곳이 이 평범한 도로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칼 한 자루, 바로 한국 고대사 최대 미스터리 황금보검입니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주를 방문할 때까지 경주는 신라시대의 보물을 간직한 도시였지만, 왕릉과 유적지 주변으로 개발이 진행되면서 많은 무덤이 훼손되는 상황이었죠.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찾는 관광지를 만들라”는 특명 이후 경주는 관광도시로 빠르게 변신을 시작합니다.
도로를 재정비하고 왕릉을 정비했는데 그중 ‘계림로’는 가장 중요한 공사 구간이었습니다. 그 주변에 첨성대와 고분들이 산재해 있어 시급히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요. 옛 경주 시청부터 첨성대까지 2km에 이르는 계림로를 정비하던 중, 이 아래에서 신라시대 무덤들이 다량으로 발견됩니다. 배수로 공사를 위해 하수관을 매설하던 중 무덤의 흔적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무려 55기의 무덤들이 발견됐고, 각 무덤에 1부터 55까지 번호를 붙였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주체가 되어 발굴을 담당했는데요. 1번부터 시작한 발굴 중 14번째 무덤 ‘계림로 14호 묘’는 시작부터 호기심 덩어리였습니다. 돌무더기가 발견됐으니까요.
지하에서 돌무더기가 발견됐다는 것은 이른바 ‘적석목곽분’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4세기에 잠시 유행했다가 사라진 형태이지만 이 적석목곽묘 밑에서는 항상 놀라운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적석목곽묘란 나무곽을 만들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둔 형태인데, 이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누구라도 함부로 도굴을 시도했다가는 돌무더기에 깔려버리게 됩니다. 신라 시대 유물 중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상당한 유물들이 이 적석목곽묘 아래에서 발견됐고, 대표적으로 금관총, 천마총, 금령총 등이 이러한 형태입니다. 어쨌든 이 돌무더기를 걷어 내고 발굴을 시작하자, 유독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금으로 용무늬를 입힌 ‘말안장 꾸미개’, 유리로 장식한 ‘금동 말띠드리개’,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화살통’ 등등 국보급 유물이 무려 270점이나 발견됐죠.
그런데 정말 놀라운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굴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 오후, 전 세계 모든 주목을 이끈 ‘황금보검’이 그 주인공입니다.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을 뜻하는 ‘군계일학’이란 어쩌면 이 장면을 위해 태어난 사자성어가 아닐까 할 정도로 훌륭한 유물 중 단연 으뜸이었죠. 이제까지 신라 시대 유물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다른 형태의 황금 칼 한 자루가 나온 겁니다. 이 칼에는 ‘황금보검’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는데 이 칼이 가진 형태는 전 세계에서도 극소수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황금보검의 크기는 36cm로 칼의 몸집 대부분이 부식됐지만, 칼집과 손잡이에는 화려한 황금이 수놓아졌습니다. 표면에는 다양한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는 석류석과 유리질을 녹여 장식했습니다. 장식의 중간과 외곽에 금 알갱이를 붙여 화려함을 가미시켰는데요. 한반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독특한 석류석과 유리 장식이 말하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당시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별한 황금보검이 나왔지만 어떻게 이것이 한국에서 발견된 것일까를 설명할 전문가가 없었던 겁니다. 당시 한국의 고고학계에는 이러한 유물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보고서도 작성하지 못했고, 이 유물의 ‘계림보검’이라는 이름만 붙인 상태로 40년이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계림로 14호 묘’에 대한 발굴 보고서를 발간함과 동시에 특별전 ‘황금보검을 해부하다’를 개최하게 됩니다. 우선 황금보검과 같은 형태의 검은 전 세계적으로도 3개에 불과할 만큼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중 하나가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키질 석굴’입니다.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족 언어로 ‘돌아올 수 없는’이라는 뜻인데 한 번 잘못 들어갔다가는 죽음에 이른다는 무서운 사막입니다. 그리고 이 사막에는 고대 벽화로 유명한 ‘키질 석굴’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벽화 중 하나에서 황금보검과 유사한 검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검은 1928년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에’에서 출토됐습니다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의 한 공사장에서 정체불명의 유물 조각이 출토됐는데 당시 전문가 들은 이 조각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65년 뒤 한국의 경주에서 황금보검이 출토된 후 이 유물 조각이 황금보검 장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따라서 한국에서 출토된 황금보검은 이러한 형태의 보검 중 유일하게 실물 원형으로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렇다면 실크로드에서만 발견된 이 보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 보검의 원산지에 대해서 상당히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는데, 일본의 유명 미술 사학자 ‘요시미츠 츠네오’는 “모르기는 몰라도 이 보검은 로마 문화권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황금보검 중 가장 놀라운 부분은 3개의 태극무늬입니다. 보통 태극무늬 안에는 다른 문양을 새겨 넣지 않고 태극무늬 자체를 문양으로 사용하지만, 보검의 태극무늬 안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각 공간에 매우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새겨 넣은 인물은 이 무늬를 자주 사용했고, 의도적으로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러한 디자인 기법은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통 ‘켈트파’라고 부릅니다. 켈트인들은 주로 현재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을 본거지로 하는 유럽인들이었는데요. 따라서 이 보검의 원산지가 유럽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재료 역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데요. 태극무늬를 포함해 황금보검에 촘촘히 박힌 석류석은 일반적으로 ‘가네트’라는 보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껏 한국에서는 단 한 차례도 발견된 적 없는 석류석이 발견된 것도 놀라웠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로돌라이트’라는 광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어로 장미를 뜻하는 ‘로도’와 돌을 뜻하는 ‘라이트’가 합쳐져 이름 지어진 이 ‘로돌라이트’는 석류석 중에서 유일하게 보라색을 띠는데 3캐럿 이상의 원석을 채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황금보검 곳곳에 박힌 이 석류석은 작은 태극무늬에 박힌 것만 2캐럿이 넘고, 검 전체를 살펴봤을 때 적어도 수 십 캐럿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 산출됩니다.
사실 인도나 스리랑카산 석류석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황금보검의 석류석의 주산지는 ‘보헤미아’, 즉 현재 체코이며 체코의 국가 보석도 바로 ‘로돌라이트 석류석’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이러한 석류석은 찾아볼 수도 없고, 체코 등 중부 유럽에서만 채취되는 석류석 장식이 신라 유물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황금보검은 누금 세공 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이 기법 때문에 황금보검이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누금 세공 기법이란 수많은 금 입자와 금 세선을 이용해 제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좁쌀만 한 아주 작은 금 알갱이를 이용해 제작하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금 세공 기술입니다.
이러한 누금 세공 기법은 주로 흑해 그리스에서 발달해 페르시아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기법은 어떠한 제품을 보고 눈으로 익힐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좁쌀만 한 금 구슬들을 작품 위에 빼곡히 채워 넣기 위해서는 땜질을 해야 하는데, 구슬 하나하나마다 얇은 합금판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강한 불을 가하면 땜 재료가 먼저 녹아 금구슬이 완전히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이 기술은 순간적으로 눈으로 보면서 불 조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경험이 필요하고 거의 장인 수준이 아니면 흉내도 낼 수 없죠.
따라서, 그리스에서 발달한 이 누금 세공 기법이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까지 전해졌고, 신라인이 이를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황금보검의 기법이 너무나 장인스러웠던 겁니다. 만약 황금보검의 직접적인 이동이 있었다면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당시 켈트 지역이든 중부 지역이든 통치하던 국왕이 직접 신라로 사절을 보내 가져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왕이 보낸 사절이 직접 유럽으로 가 하사 받은 보물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상인은 배제됩니다. 전 세계에 단 3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보물 중의 보물을 감히 상인들이 함부로 들고 와 팔지는 않았을테니까요.
황금보검의 제작국이 어디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다만 도로 공사 중 출토된 이후 황금보검이 말해 주는 사실은 단순합니다. 하나는 고대 신라가 저 멀리 유럽까지 연결됐던 국제 국가였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신라가 작은 한반도에서 존재했다 사라진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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