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갈등의 시작이었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태종이 원경왕후 여종이었던 효빈 김씨를 건드리는 일이 생긴 겁니다. 실록에 의하면 효빈 김씨는 태종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부인인 원경왕후를 받들던 여인이었으며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당시, 말이 홀로 돌아온 것을 보고 태종이 죽은 것으로 오해한 원경왕후가 자신도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말리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그녀였습니다. 그리고 야사에서는 원경왕후의 시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의 여종이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뛰어난 외모 때문에 신덕왕후조차 그녀를 태조 이성계 앞에 내놓기를 꺼려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어난 미모로 인해 왕위에 오른 태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받게 되고 임신 3개월째에 궁을 나와 사가에 거주하다가 질투의 화신이 된 원경왕후의 핍박 속에서도 아들 경녕군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효빈 김씨를 시작으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태종의 후궁들이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다음에 눈독을 들인 여인은 바로 신빈 신씨로 원래 그녀는 원경왕후가 아끼는 사가 시절 시녀이자 왕비 시절 나인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원경왕후는 화가 났지만 다른 때와는 다르게 그녀를 후궁으로 들여도 구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 바로 그녀와의 친밀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태종은 수시로 궁녀들을 침소에 들게 하자, 결국 폭발한 원경왕후는 가까이한 궁녀들을 심문하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원경왕후를 모시는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쫓아내고 그녀를 교태전에 유폐하다시피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녀를 폐비하려고까지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했습니다. 1402년(태종 2년) 태종은 더 나아가 후궁 제도를 법제화시켰고 곧바로 간택 절차를 거쳐 사대부가 출신의 권씨(후일 의빈 권씨)를 후궁으로 맞게 되는데, 이때 왕비나 세자빈에 준하는 가례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이를 안 원경왕후가 태종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고 말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 사태에 이례적으로 당시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정종까지 나서서 “나는 아들을 못 낳은 마누라라도 해도 오래 같이 살아서 소싯적 정으로 사는데 너는 아들도 많이 낳아준 마누라한테 대체 왜 그러냐?”라고 한 소리 하기도 했습니다. 태종에게 전혀 간섭한 일이 없는 친형 정종도 이 일만큼은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던 것입니다.
결국 태종은 거창한 입궐 행사는 생략하고, 단순히 조용하게 후궁들을 들여보내는 정도로 끝을 내게 됩니다. 이후 태종은 원경왕후와 함께 장인인 여흥 부원군 민제의 집에 함께 방문해 잔치를 베풀며 일시적으로 화해 무드를 조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1407년 태종은 다시금 본색을 드러냅니다. 영의정부사 이화 등의 상소를 시작으로 원경왕후의 형제들인 민무구·민무질의 탄핵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주요 죄목은 1406년(태종 6년)에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에게 왕위를 주려 하다가 철회했을 때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세자를 제외한 다른 왕자들을 없애서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 임금의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병권을 내놓았다고 말한 것 등이었습니다.
이는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로 확대되어 약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그들의 죄목을 발굴하고 실증하는 과정이 거듭되었으며, 결국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1410년, 자결하라는 태종의 명을 받아 사사되었습니다. 그리고 1416년에는 원경왕후의 또 다른 동생이자 민제의 3남 민무휼과 4남 민무회가 불충한 말을 했다는 논란에 휩싸이자 태종은 이들 역시 유배시키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또한 원경왕후의 부모의 운명도 불행하기 그지없었는데 아버지 민제는 자식들이 귀양 가고 집안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속을 끓이다가 1408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 송씨는 아예 아들 넷이 모두 사위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그녀의 친정은 몰락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원경왕후 민씨와의 관계가 이후의 조선 왕과 왕비들처럼 간택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라, 사가에 있던 시절에 맺어진 인연으로 애초에 서로 동등한 관계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원경왕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후기 급부상한 권문세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으로 변방 출신이자 공민왕 대에야 고려에 귀부한 전주 이씨보다 훨씬 고려의 권력 중심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이성계는 넷째(이방간), 다섯째(이방원)를 여흥 민씨 집안 여식과 혼인을 시키게 됩니다.
그녀의 집안은 이성계의 사돈이자 이방원의 처가로서 가문의 운명을 모조리 걸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막대한 지원 사격을 퍼부었고 원경왕후 민씨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 이방원이 권력을 잡는데 큰 공훈을 세운 여걸이었습니다. 원경왕후가 대신들 앞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대드는 등의 행동들이 가능했던 것이 그녀가 남편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종이 처남 4명을 모조리 죽이고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처가를 박살 낸 다음, 원경왕후를 찍어 누른 극단적인 행보가 그녀와 그녀 집안의 막강한 힘이 권력으로 뿌리내려 왕권을 깎아 먹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극약 처방이 아니면 도저히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원경왕후 민씨와 여흥 민씨 집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만 바라보고 살 수밖에 없었던 원경왕후는 1418년에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망나니가 되어버린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셋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 이로 인해 형제간에 분란이 일어날까 봐 끝까지 반대했다고 합니다. 사실 원경왕후는 태종만큼 맏아들 양녕대군을 매우 사랑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원경왕후에게 있어 양녕대군은 18살에 결혼해서 10여 년간 낳은 6명의 자식들(3남 3녀) 중 아들만 셋 다 죽는 고통을 겪다가 30살 때 낳은 아들이었기에 왕비가 아닌 어머니로서 그야말로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세상 전부와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양녕대군 이후 3년 내로 낳은 아들들인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역시 예뻐하며 길렀다고는 하지만, 낳은 순간부터 태종, 원경왕후 부부의 모든 것이었던 양녕대군을 향한 개인적 애정과는 같을 수 없었습니다.
충녕대군 이도(세종)가 세자가 된 그해에 태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원경왕후도 왕대비가 되었으며 후덕왕대비의 존호가 올려집니다. 하지만 1420년(세종 2년) 원경왕후는 말라리아를 앓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으며,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당시 태종은 절차를 간소화하자며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권유했는데, 세종은 다른 건 상왕 뜻을 따라도 이건 그렇게 못하겠다며 원경왕후를 헌릉에 안장할 때까지 쭉 상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태종도 승하하면서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헌릉에 쌍릉의 형식으로 나란히 묻히게 됩니다. 이렇게 왕과 왕비에 오른 후 최악의 부부관계를 보인 그들은 결국 죽어서야 곁에 있게 되었는데, 이는 아들 세종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는 화해하여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 효심에서 나온 의도였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원경왕후와 태종의 사이가 끝을 향해 달렸지만, 그녀는 의외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 중 하나입니다. 원경왕후의 자식들은 공식적으로 4남 4녀이지만,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요절한 세 명의 아들과 1412년에 태어나서 요절한 아들을 포함하면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참고로 출산 후 4명의 아들들을 잃은 시점을 보면 고려 말, 조선 건국 초 혼란기 때(3명)와 남편에 의해 친정이 몰락하는 시기로(1명) 가장 원경왕후가 심리적으로 힘들 때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자식들 중 양녕대군과 막내 성녕대군을 끔찍이 아꼈고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부부가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왕과 왕비에 오른 뒤 극단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졌지만, 원경왕후가 40세를 넘긴 이후에도 태종과의 사이에서 정선공주(1404년생), 성녕대군(1405년생), 그리고 요절한 왕자(1412년생) 이렇게 3명이나 더 낳은 것을 본다면 정말 둘 사이는 알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마지막 아이가 태어났을 때인 1412년이면 원경왕후가 48세로 엄청난 노산이었을 때이고, 심지어 왕비의 동생들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후인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는 전형적인 애증 관계의 부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원경왕후는 조선 왕조에서 정희왕후, 문정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왕비로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성격 또한 담대하고 괄괄한 여장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왕으로 만들면서 모든 것을 가지게 되지만 조선왕조에서 손꼽히게 잘난 남편 때문에 여자 문제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친정마저 풍비박산 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한국사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살았던 왕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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