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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입구에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남아 있다? 하마터면 지어질 뻔한 ‘이것’

옛 백제의 세 번째 수도이자 마지막 수도였던 충남 부여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백제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한 유물과 유적이 산재한 문화 관광지입니다. 신라 수도 경주에 버금가는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만큼 유서 깊은 사당이 꽤 많이 세워졌는데요.

충남 부여에 도착해 부소산을 찾으면 ‘부여 삼충사’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백제시대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인데요. 그런데 이 백제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삼충사 앞에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땅굴이 하나 있습니다. 이 땅굴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부여 삼충사 입구에는 의문의 땅굴이 하나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폭 1.89m에 높이 2.18m로 성인 2~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고 그 길이가 무려 45m에 달하죠. 이 땅굴의 목적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시멘트로 지어진 것으로 볼 때 100년이 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백제의 삼충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 사당 입구에는 어쩌다 시멘트로 지어진 땅굴이 들어서게 된 것일까요?

한반도 전체가 일제 탄압으로 고통받던 1937년 4월 당시 제7대 조선 총독인 미나미 지로는 육군 대장 예복을 차려입고 충남 부여에 방문합니다. 그는 하루 종일 부하들을 이끌고 백마강, 부소산, 낙화암 등을 돌아본 후 부소산에 위치한 삼충사 자리에서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이 선 그 자리를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은밀히 진행하던 ‘신궁’을 건설할 자리로 점찍습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일왕에게 이를 보고하는데요. 한일 관계에 있어 분란의 씨앗이 되는 ‘신사 참배’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신사’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을 의미하는데요. 한일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총리를 포함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입니다.

신사 자체는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어 비판할 것이 아니지만 야스쿠니 신사에는 조선을 강제 병합시킨 인물을 포함한 전쟁 범죄자의 이름을 적어 봉안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에는 일본군 최고 통수권자인 일왕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의 영령을 모아 두고 있고, 이들 대부분은 전범자인 것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 총리를 포함한 정치인이 이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일본은 일왕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 전역에 1,141개의 신사를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사는 일반 신사, 국폐사 그리고 관폐사 이렇게 세 등급으로 나뉘게 되는데요. 국폐사는 서울, 부산, 평양 등 8개 주요 도시에 세웠고 관 폐사는 1925년 한양에 세워진 조선 신궁 한 개입니다. 여기서 관폐사는 한 개 더 세워질 뻔했는데요. 짓다 실패한 신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부여 신궁’입니다.

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정신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체 역할을 해 왔는데요. 신사 중 가장 으뜸 신을 모시는 곳이 신궁이라고 이해하면 편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독특한 종교시설을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건설하려던 것인데요.

일본은 서울 남산에도 신궁을 세웠습니다. 조선 신궁인데요. 1925년 일제는 식민 통치를 위해 한양도성을 부수고 허물어가며 남산에 여의도 공원 면적의 두 배가 넘는 규모의 조선 신궁을 건설했습니다. 13만 평 부지에 거대한 돌계단과 참배로를 조성한 신궁은 당시 남산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매년 200만 명 이상이 참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신사는 1945년 일제 패망과 동시에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지난 2014년 남산 정비사업을 통해 그 터가 발견됐습니다.

부여에 건설하려던 신궁은 남산의 조선 신궁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부여에 세우려던 신궁은 남산의 조선 신궁보다 격이 훨씬 높은 관폐 대사 등급으로, 이는 도쿄에 지은 1급 신궁과 같은 격이며 일본의 메이지 신궁보다 더 큰 규모입니다. 관폐대사 신궁을 건립한다는 것은 일왕이 직접 참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여를 일왕이 머물 제2의 황궁으로 만들려던 계획이기도 합니다.

미나미 지로가 부여에 다녀간 후 일본 내에서는 부여 신궁 건설 계획이 급속도로 전개되었습니다. 1939년 7월 31일에는 히로히토 일왕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충남 부여에 신궁을 건설할 것이라고 직접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왜 일본은 서울이 아닌 부여에 일왕이 머물게 될 제2의 황궁을 지으려고 했을까요?

일왕이 라디오에서 부여 신궁 건설 계획을 밝힌 후 1942년 11월 11일, 일본 조경 학계 일인자로 꼽히던 혼다 다케노리라는 인물이 충남 부여에 방문하게 됩니다.

그는 부소산 삼충사 앞 전망을 내려다보며 “주위는 넓고 앞은 활짝 트여 천연 풍경이 좋은 데다 유구한 역사가 흐른 자취는 숭엄하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본래 신원 계획의 목적은 영원히 변치 않는 대자연의 숲을 만드는 데 있다. 지금 당장은 인공적인 시설을 만든다고 하여도 장차 천연 상태로 돌아가게 하여 우아한 원시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자면 먼저 신성한 곳을 택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거기에 신궁과 숲을 만들어 존엄한 신이 계시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다시 말해 부소산 일대는 주위가 넓고, 앞이 활짝 트여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구한 역사가 흐르며, 대자연의 숲을 만들기에 가장 적합하기에 부여 신궁을 지을 적합한 장소로 선택된 겁니다.

부여 신궁은 공정률 80%까지 찍었던 실제 건물입니다. 일본은 1939년 신궁 공사를 시작하면서 1년에 약 9만 명을 공사에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공사 인력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습니다. ‘제국의 성업’이라는 미명으로 조선의 초, 중, 고, 대학생 및 공무원을 전부 동원해 공사를 추진했는데요. 다만 일본이 무리하게 진주만을 공습하는 바람에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44년 중반부터 부여 신궁 공사는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일제 패망과 함께 공사는 중지되었고, 신궁을 짓던 자리 위에 백제 충신을 기리는 삼충사가 들어섰죠. 다만 아직까지 삼충사 입구 지하에는 당시 건설된 45m 길이의 지하 땅굴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기준 최신 자재인 시멘트가 사용되었으나 그 목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유사시 대피 목적, 귀빈들만 드나들 수 있는 비밀 통로로 추정되나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일제 잔재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부여 신궁은 공정률 80% 상태에서 중단되고 철거되었기 때문에 만약 일본이 2, 3년만 늦게 항복했다면 현재 부여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백제의 숨결이 흐르는 부여에 건설하려던 신궁의 규모는 어땠을까요? 조사된 바에 따르면 당시 신궁 부지는 무려 6만 5,000평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축구장 약 25개 크기의 규모입니다. 건축비 역시 놀라운 수준인데요. 신궁의 신축 비용은 24만 원이 책정됐습니다. 충남도청 신축 비용이 당시 16만 7,40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궁을 얼마나 화려하게 지으려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당시 민가 150호에 920명에 불과한 시골 마을 부여를 일본이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로 만들려고 계획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시가지 계획까지 세워 두었죠. 현재 부여가 읍 단위임에도 신작로가 넓게 뚫려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故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일제가 부여~논산 간 고속도로를 계획했었다고 밝혔습니다. 1940년대 독일을 제외한 국가에서 ‘고속도로’라는 단어는 아주 생소했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 신궁을 키우려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여~논산 고속도로를 만들어 일본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몰려들 참배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부소산 일대를 호텔 등의 숙박 시설이 들어선 한반도 최고의 관광도시로 만들려던 것입니다. 실제로 1930년대 서울 최고 백화점으로 불리던 ‘화신 백화점’의 소유주 박흥식은 관광호텔을 지을 계획으로 이 지역 땅을 매입하기도 했습니다. ‘마쓰우로’라는 일본 부동산 회사는 마구잡이로 부여 땅을 매입하기도 했는데요.

한양에 신궁이 있음에도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고 한 것에는 일본의 야비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이 우리 민족의 얼을 말살하려던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민족 말살 정책인데요. 일제는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의미의 내선일체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해당 정책에 따라 조선과 일본은 하나이므로 조선인도 황국신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것을 강제했습니다. 일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요하고 전국 곳곳에 신사를 세워 신사 참배를 의무화했었죠.

일본은 일본이 백제와 상당히 끈끈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일본서기, 고사기를 포함한 건국 신화와 전설을 토대로 일본의 많은 지식인은 일제 강점기 전부터 백제의 수도 부여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다 1929년부터 일본 내에서 고대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순치보거적 관계’, 즉 두 국가가 매우 긴밀하게 의지하는 관계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에 10년 뒤 1939년, 일본 중앙 정부에서 부여에 부여 신궁을 건설하여 이를 관폐대사로 정할 것을 승인한 것이죠. 이는 조선총독부 고시 제503호를 통해 공표되었습니다.

내선 일체를 통한 식민 지배 합리화를 목적으로 부여에 힘을 집중시킨 일본은 번듯한 신작로를 닦고 신궁을 실제로 지었으며 4,000만㎡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를 통한 한반도 영구 지배를 꿈꿨습니다. 다만 그 염치없는 계획은 일제의 패망으로 헛된 소망이 되었죠.

현재 신궁 건설 과정에서 남은 이 땅굴의 처리 방안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부여군은 이를 일제 잔재로 보고 철거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지를 두고 고심 중입니다. 광복 후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일제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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