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2006년에 방영됐던 MBC ‘느낌표-위대한 유산 74434’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나요? 서경석, 조혜련, 정형돈, 박정민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인데 여기에서 74,434라는 숫자는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의 개수를 나타냅니다. 일제강점기에 수탈당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냈었죠.
74,434개의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됐다는 의미인데 지금 그 숫자는 229,655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3배 가까이 증가한 이유가 있습니다. 해외에 소재한 문화재와 관련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2012년에는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발족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청 산하에 사실상의 정부 기관이고 불법, 부당하게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 환수를 추진하기 때문에 그 설립 목적에 맞게 최선을 다해 업무를 집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미국의 한 게임 회사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게임을 만든 미국 회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회사는 해외 경매시장에 한국 문화재가 등장하면 수억 원을 지불하고 낙찰받아 한국에 돌려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부 기관도 아닌 미국의 일개 게임 회사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서 자신들의 게임을 가장 사랑해 주기 때문일까요?
보통 역사라고 하는 것은 패자의 기록이 아니라 승자가 남긴 일방적인 기록입니다. 물론 패자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지만, 보통은 승자의 승리를 미화하고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데 집중하죠. 그런 의미에서 1867년 1월 19일 프랑스의 릴뤼스트라시옹에 보도된 서신 역시 프랑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가령 조선인들은 배를 능숙하게 몰아 바다로 나가 해적질을 하는 모습이 마치 말레이시아 바다를 누비는 대담한 해적과 같다거나 강화도를 지나 조선의 수도 서울까지 3천 리를 달렸지만 적대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또는 하지만 우리는 정복하러 온 것이 아니요, 정당한 사죄만을 원했다며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바빴죠.
이 사건은 병인박해로부터, 그러니까 고종 즉위 3년 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는데 조선인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처형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청나라로 탈출해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렸고 그는 그해 9월 7척의 함선과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해 강화도를 점령합니다.
병인양요가 시작된 것이죠. 하지만 극동함대까지 파견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프랑스는 의외로 굴하지 않는 조선군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뒤 철수했는데 조용히 철수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강화도에서 물러나며 외규장각에 보관된 책 340권과 은 19상자를 챙기고 방화를 저질러 전각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왕실 행사를 기록한 외규장각 의궤를 주로 훔쳐 갔는데 지금까지도 완전히 돌려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2017년, 그간 외규장각에 소장되었으나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던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책 한 권이 프랑스 파리 고미술 시장의 경매물로 등장했습니다. 이 죽책은 헌종의 친모이자 고종황제의 양모인 신종왕후 조씨가 효명세자빈으로 책봉된 1819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시대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책봉하고 존호를 올릴 때 그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대나무쪽에 새겨 엮은 문서입니다.
조선 왕실의 전형적인 죽책 형식을 엿볼 수 있으며 당대 최고 전문가들이 제작한 공예품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왕실 의례 상징물이죠. 그런데 한 미국 기업이 약 2억 6천만 원을 지불하고 이를 낙찰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이 죽책을 고스란히 한국으로 가져와 국립고궁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했죠.
그리고 지난 6월 20일 문화재청은 최종 회의를 거쳐 이를 조선왕조 어보어책교명에 포함시켜 국가 지정 보물로 등재시켰습니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과 함께 이 죽책 환수에 나선 기업은 다름 아닌 미국의 라이엇 게임즈라는 회사입니다.
2006년 미국에서 설립된 라이엇 게임즈는 현시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개발사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미국과 한국은 물론 전역을 포함해 전 세계 24개 지사를 운영하고 있죠.
만약 예전 스타크래프트를 개발했던 블리자드처럼 한국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끈 게임 개발사라면 이해가 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게임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을 콕 집어 문화재 환수 사업을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회사가 해왔던 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난 2012년부터 ‘게임은 문화다’라는 슬로건으로 한국의 문화유산 보호 및 지원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석가삼존도’,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 ‘척암선생문집 책판’, ‘백자이동궁명사각호’, ‘중화궁인’, ‘보록’ 등 총 6점의 해외 소재 문화재 환수에 관여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2014년 첫 환수에 성공한 석가삼존도의 경우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트 소재의 허미티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화재입니다. 현존하는 불화 중 도상의 배치가 특이해 학술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평가하고 있죠. 2019년에 환수된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조선 말기 영남지역의 대학자이자 1895년 을미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척암 김도화가 남긴 것입니다.
같은 해 환수된 백자이동궁명사각호는 조선 19세기에 왕실 및 관청용 도자기 제조장인 분원 관요에서 제작한 사각호입니다. 바닥 면에 정조의 딸이자 순조의 누이인 숙선옹주의 궁가로 추정되는 이동궁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19세기 궁가에서 사용된 백자를 직접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입니다. 그간 기록으로만 볼 수 있었던 이동궁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게 됐죠.
특히 작년에 환수된 보록은 왕실 유물로 조선 왕실의 의례용 도장인 어보를 보관하는 상자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종묘로부터 이관한 312건의 보록과 인록이 소장돼 있는데 현존하는 보록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대로부터 순종 대까지 300여 년에 걸쳐 제작된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도장집이 아니라 왕과 왕비를 위한 의례에 따라 제작된 만큼 왕실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상징하죠. 원래 보록은 한 영국 회사가 경매를 통해 구입한 후 재판매 협상 중이었으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21년 12월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후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영국 현지에서 이 회사를 상대로 한국으로 환수해야 할 당위성을 전달하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매입할 수 있었죠.
물론 라이엇 게임즈가 국내 환수 절차를 전반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원래 라이엇 게임즈는 미국 회사인 만큼 한국이 빼앗겼거나 외국이 불법적으로 탈취한 문화재를 환수하는 것에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저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의 책임을 다한다는 생각에 문화유산의 보존 처리와 안내판 개선, 청소년 역사 교육 등의 사회공헌 사업을 펼쳤을 뿐이죠.
그러나 이런 활동으로 꽤 큰 보람을 느낀 라이엇 게임즈는 우리만 할 수 있는 사회공헌 사업을 찾아 집중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그때 다른 한국 기업들은 잘 나서지 않는 사회공헌 활동이 있는데 함께 해보지 않겠냐며 문화재청의 제안을 받습니다. 그렇게 2014년 석가삼존도를 미국에서 환수해 오면서 인연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됐고 벌써 7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썼죠.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에 구기향 사회환원사업 총괄은 외국계 게임사가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이유를 묻는 말에 문화의 뿌리인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지원하며 젊은 세대의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왜 좋은 일을 숨어서 하냐는 주변의 질문에 이제는 다른 기업들도 이런 좋은 취지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가 경험한 일과 노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죠. 이런 활동은 본사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한국 지사 차원에서 시작된 사업으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이런 활동을 지원하는 등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 것은 전 세계 24개 지사 중 한국이 유일하다고 하죠. 물론 미국 본사 역시 이러한 활동을 상당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진행된 문화재 지킴이 후원 약정 당시 본사의 반응을 묻자 ‘본사를 비롯해서 굉장히 많은 지사들에게 지속해서 좋은 이런 활동들에 대한 예시를 설명했고 그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뜨거운 반응을 계속 보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크게 지지하고 있다.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사회 환원 사례로 소개되고 있으며 다른 지사에서도 벤치마킹해 자신의 나라에서도 도입하고자 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라고 밝혔습니다.
한때 라이엇 게임즈는 중국 자본이 투자되었다는 이유로, 또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걱정했지만, 광복 70주년 특별전 및 창경군 궁중문화 활용 콘텐츠 전시 후원과 세계유산 영상 제작 및 홍보 지원 등 전시 활동, 2020년 10월 21일 한복의 날에는 국가 무형문화재 4인 및 한국화 작가와 함께 온라인 전시 ‘아리따운 우리 한복 전’을 통해 한복의 아름다움과 그 제작 과정을 알리는 데 앞장서며 이런 논란을 불식시켰습니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명실공히 라이엇 게임즈는 문화재 사회공헌 분야의 대표 기업이다. 이 소중한 인연을 잘 이어가 지속할 수 있는 문화재 보호 성과를 함께 이뤄나가도록 최선의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대한민국, 정확히는 한반도의 역사는 기구했고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교훈도 얻었지만 정말 많은 것들을 잃었죠. 한때는 언어와 문자를, 한때는 존엄성을, 심지어 역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우리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그 오랜 기간에 걸쳐 해외로 반출된 우리의 문화재는 마음처럼 쉽게 환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 콘텐츠를 제작하며 제 마음속에 박힌 한마디는 문화재청이 처음 라이엇 게임즈에 제안했을 때 다른 한국 기업에서 나서지 않는 사회공헌 활동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라이엇 게임즈처럼 수많은 한국 기업이, 수많은 외국기업의 지사들이 더욱 전면으로 나서서 우리의 슬픈 역사를 보듬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조금 더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