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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OO’ 연구 매진한 한국 천재가 엉터리 일본 학계 참교육, 일본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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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재미주의입니다. 자신들이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을 까맣게도 모른 채 일본 대표 학자들은 엉터리 논문을 세계 학회지에까지 발표하며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학계의 거목이던 학자 ‘마쓰무라’ 역시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오류를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한국인 천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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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일본 학자들의 오류를 눈치챈 이 한국인은 곧바로 제대로 된 논문을 써서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로부터 이런 편지 한 통이 날아온 것인데요. “당신의 논문은 학회지에 실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류 범벅인 일본 학자들의 논문도 실렸는데, 오히려 제대로 된 한국인의 논문이 거부되었던 이유… 그건 그의 논문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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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평양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에 태어나게 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워낙에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 덕분에 소년은 어릴 때부터 학자를 꿈꾸며 자랄 수 있었는데요. 이렇게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3개의 고등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공부에 매진했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소년은 일본 최고 농업 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 농림 학교’로 진학해 학문에 더 매진했습니다.

소년은 이렇게 공부에 미쳐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허했다고 하는데요. 그건 자신이 이렇게 공부해도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천재라고 해도 오랜 꿈이었던 학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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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신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왔던 일본인 지도 교수에게 자신이 처한 슬픈 현실을 털어놓게 되었는데요. 그의 말을 귀담은 듣던 지도 교수는 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줬다고 합니다.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누구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법이다. 그러니 조선에 가서도 네가 좋아하는 나비를 계속 연구하거라…”

그 충고는 꿈을 잃었던 소년을 한국의 파브르 ‘석주명’으로 각성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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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돌아온 석주명은 송도고보의 박물 교사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지만, 그는 교수님의 충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의 나비를 연구해라.”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나비 연구에 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매일 나비 채집과 연구를 위해 전국을 헤집고 다녔다고 합니다. 산을 얼마나 많이 헤집고 다녔는지, 사람들에게 약용 뱀을 잡는 땅꾼으로 오해받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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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일본 곤충 학계의 거목인 학자 ‘마쓰무라’가 <일본 곤충 대도감>을 간행했습니다. 학계에서 워낙 유명한 인물이 내어놓은 책이니, 석주명 박사는 이 책을 바탕으로 자신이 수집했던 나비의 종을 확인하려고 했는데요. 그런데 책을 보던 석주명 박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에서 심각한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이죠.

당시 마쓰무라뿐만 아니라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오류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죠. 오로지 석주명 박사 혼자 눈치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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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명하지도 않은 조선인인 자신이 무작정 잘못된 내용을 짚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석주명 박사님은 그 누구라도 단번에 설득할 만한 증거를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는데요.

안 그래도 전국을 다니며 나비를 채집하는 탓에 나비에 미친 사람이라고 불렸는데, 이때부터는 더 심각하게 나비 연구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같은 종의 나비를 수백, 수천 마리 채집하여 일본 학자들의 범한 오류를 바로잡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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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자들은 같은 종의 개체변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이라고 명명하여 종을 늘려 놓았습니다. 즉, 동종이명이었던 것이죠.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고 신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며 자신들의 연구 성과만 내고 있었던 일본 학자들…

그래서 석주명 박사는 모든 나비를 다시 연구하며 동종이명을 가려내는 작업을 시도했고, 1936년, 1937년, 1942년 세 번에 걸쳐 발표한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에서 16만 7,847마리의 날개 형태, 무늬, 띠 그리고 앞날개의 길이 등을 조사해 일본에서 발표한 배추흰나비의 학명 20여 개를 제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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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을 진행하던 중 석주명 박사는 세계적인 지질학자 ‘모리스’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모리스는 석주명 박사가 채집한 것을 보고 감탄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엄청난 양의 표본과 디테일 때문이었죠.

석주명에게 제대로 반하게 된 모리스는 직접 미국 박물관과 교류를 주선해 주었습니다. 미국 박물관에서도 석주명 박사의 연구를 보자마자 인정하면서 연구비 지원까지 해 주게 되었는데요. 덕분에 석주명 박사님은 재정적인 어려움 없이 더 나비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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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영국 왕림 아시아 학회로부터 편지 한 통이 석주명의 앞으로 날아오게 되었습니다. 아시아 학계에 실을 조선산 나비 전체를 논문으로 써 달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이미 한반도에 있는 나비는 통달했던 석주명 박사님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논문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에서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 논문은 학회지에 넣기 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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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써 달라고 해 놓고 이게 무슨 막말인가 했는데, 그 이유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석주명 박사의 연구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학회지에 싣기보다는 책으로 출간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는데요. 그렇게 논문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한국산 접류 총 목록>입니다.

이 책이 출판되자 일본 곤충학자들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가 계획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여기에 반박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석주명 박사의 연구는 과학적 근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그냥 반박이 불가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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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우리나라 나비의 동종이명이 무려 921개에 달하고 있었는데요. 석주명 박사님이 이 중에서 무려 90%가 넘는 844개를 정리해 버렸습니다.

“마쓰무라 논저는 모두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한 편도 문자대로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 석주명 박사가 일본 곤충학계의 거장 마쓰무라를 이렇게 대놓고 비판했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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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접류 총 목록>에서 한국 나비를 255종으로 분류한 공로를 인정받아 석주명 박사는 전 세계 30명밖에 되지 않는 만국 인시류 학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세계적인 학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죠. 또한 <한국산 접류 총 목록>은 한국인 저서 최초로 영국 왕립학회 도서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 후 국립 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을 맡게 되면서 1947년엔 조선 나비를 248종으로 분류해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놀러 온 것은 이 모든 업적이 석주명 박사님이 30대에 이룬 것이라는 겁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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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천재는 일찍 죽는다고 하던가요. 석주명 박사님은 너무 젊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이 남침하면서 서울이 넘어갔지만, 채집한 나비표본을 지키기 위해 그는 서울에 남아 있었습니다. 13년에 걸쳐 완성한 <한국산 접류의 분포 지도>를 출판하기 직전인 상황이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학관이 불타면서 수많은 표본이 전소했고, 석주명 박사는 좌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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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6일, 국립 과학관 재건 회의에 참석하려 길을 나섰던 석주명 박사님은 길거리에서 고향인 평양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북한군으로 오해받아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향년 41세, 세계적인 천재가 떠나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였습니다.

휴전된 이후로도 그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1964년, 뒤늦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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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누군가 석주명 박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있었나요?” 그리고 그는 답했습니다. “저는 논문 한 줄을 쓰기 위해 나비 3만 마리를 만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석주명 박사님이 기억되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재미주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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