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예로부터 흙, 나무, 돌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으나, 우리 조상들은 그중에서도 구리를 가장 잘 활용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구리를 이용해 만든 놋그릇을 사용하는 유일한 민족이기도 하죠.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신라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경덕왕 즉위 11년 되던 해, ‘김태렴’이라는 인물이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합니다.
사실 김태렴은 일본 조정에 자신을 신라의 왕자라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경덕왕은 결혼 후에 아들을 얻지 못해 첫째 부인을 내보내고, 둘째 부인인 만월부인 사이에서 혜공왕을 얻었기 때문에 752년 당시 김태렴과 같이 장성한 왕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김태렴은 왕자를 사칭한 장사꾼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죠.
어쨌든 김태렴이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 귀족들의 관심은 신라의 왕자라는 김태렴보다는 사절단에 포함된 상인들이 들고 온 신라 제품에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단연 놋그릇입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역사서에 따르면 일본 조정은 5위 등급 이상의 귀족들에게 구매하고 싶은 품목,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하여 문서로 제출하게 했는데, 이것이 일본 왕실의 옛 보물창고인 ‘쇼소인’에 남아있는 <매신라물해>라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인삼, 꿀, 잣 등의 먹거리를 비롯해 백동화로, 팔출경, 놋그릇 등의 동제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은 청동기 시대부터 구리를 기본으로 하는 합금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는데, 신라시대에는 철유전이라는 담당 기관을 둘 정도로 합금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불러왔습니다.
덕분에 명나라의 이시진은 “페르시아 동은 거울을 만드는 데 좋고, 신라 동은 종을 만드는 데 좋다.”라고 기록하기도 했죠.
그런데 경덕왕 시절 신라는 현재로 치자면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한 엄청난 크기의 종을 구리로 만들었었습니다.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의 무게가 18.9톤인데, 경덕왕 시절 만들어진 이 종은 그 무게가 무려 80톤입니다.
현대 자동차의 제네시스 GV80 한 대가 약 2톤이니, 40배에 해당하는 무게의 구리종을 약 1,200년 전에 만들었는데, 이렇게 거대한 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크기라면 분명 최선을 다해 지켜냈을 법도 한데… 하늘 위로 솟았는지, 땅속으로 꺼졌는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이 종의 행방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지난 2021년 6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옆 공터에서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쏟아졌습니다.
‘서울 공평구역 제15, 16 지구 도시환경 정비사업 부지’를 개발하기에 앞서 문화재가 매장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지표조사가 실시된 것인데,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글 금속활자가 발견된 겁니다.
그런데 그 한글 금속활자와 더불어 ‘동종’, 즉 구리로 만들어진 작은 종도 하나 발견됐습니다. 동종 표면에는 ‘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라고 쓰여 있어, 이 종이 ‘명종’ 시대인 1535년 4월에 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구리라는 금속을 다룰 줄 알았고, 그것도 최고 난도로 꼽히는 종을 만들 만큼 발전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부지 바로 옆에는 탑골공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탑골공원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구리를 잘 사용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는 고려시대 ‘흥복사’라 불리던 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세종대왕 6년 흥복사를 폐사시켰습니다만, 그로부터 40년 뒤 세조가 민생안정을 기원하기 위해 흥복사 옛터를 넓히고 그곳에 다시 큰 절을 지으면서 ‘원각사’라 이름 붙였습니다.
1468년 세조는 전국의 구리를 끌어모아 5만 근의 거대한 동종을 제작해 걸도록 했습니다. 다만 원각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연산군이 이전에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으로 만들어 기생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사찰의 기능을 잃고 다시 폐사되는데요. 그럼, 그 5만 근짜리 동종은 어디로 갔을까요?
연산군이 폐사시킨 원각사의 동종은 이후 남대문과 명동성당 근처에 걸렸다가 1619년 광해군 때 종각에 걸린 후 약 370년간 하루 61번씩 타종이 됐었습니다.
하지만 1979년 종에 금이 가고 소리가 탁해지자 1년에 딱 한 번, 12월 31일 제야의 종만 타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다 결국, 국립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물 제2호로 지정됐습니다. 하지만 ‘소리 없는 종’ 신세가 되어버렸죠.
현재 종각에 걸린 종은 1985년 국민의 성금을 모아 에밀레종을 본떠 만든 종입니다.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20톤짜리 구리로 만든 종을 조선시대에 제작해 만들었다는 점으로 본다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구리를 활발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그런데 지금의 경주에는 원각사 동종보다 4배 이상 컸던 80톤짜리 초대형 동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리고 그 80톤짜리 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그 범인으로 ‘칭기즈칸’이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도 아시나요?
지금은 사라졌으나 통일신라시대 경주에는 거대한 랜드마크가 하나 있었습니다. 553년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던 터에 누런 용이 나타나자 이곳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1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황룡사’가 완성됐죠.
현재 경주시 구황동에 그 터가 남아 있는데, ‘구황동’이라는 명칭도 ‘황’ 자가 들어간 절 9개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라 시대에는 왕과 귀족이 궁궐을 짓거나 절을 세우는 것을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방편으로 삼았는데, 진흥왕 역시 황룡사를 세워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궁궐터를 절로 바꾼 만큼 이 황룡사에는 이후로도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들어섰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입니다. 구리로 만든 범종이었죠.
진흥왕이 황룡사를 완성하고 약 200년 뒤, 황룡사에 경덕왕의 첫째 왕비였던 삼모부인이 종을 만들어 달라며 구리 약 80톤을 시주했습니다.
이 범종은 우리가 에밀레종이라 부르는 성덕대왕신종의 4배가 넘는 무게를 자랑했는데, 높이 3m, 두께 27cm가 넘는 초대형 종입니다. 지금은 터로 남은 황룡사에는 종각 유적을 볼 수 있는데, 나무 기둥이 두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거대한 종의 무게를 견디기 위한 특별한 건축 구조인 셈이죠.
이 종을 제작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남아있습니다. 현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신세지만, 만약 현존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종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을 것이 확실하고, 조형미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 종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고려시대 몽골이 침략했을 때 이 종을 몽골로 가져가려다 바다에 빠뜨렸다는 설입니다.
고려 고종 25년 몽골은 고려를 침략해 경주까지 이르렀는데, 황룡사를 보고는 그 규모에 깜짝 놀랐습니다. 약 2만 평이 넘는 거대한 부지에 어마어마한 종, 목탑, 불상까지 언뜻 봐도 고려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라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는 황룡사에 불을 질러 모든 걸 불태워 없앴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종이 남았는데, 몽골군은 이를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말에 태워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해 이를 뗏목에 싣고 강에 띄워 바다로 운반하는 방법을 썼는데, 바닷가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그만 종을 물에 빠뜨리고 맙니다. 이 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딘가로 가라앉아 버렸죠.
경주에는 토함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대종천’이라는 천이 있는데, 대종천 인근 마을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물에서 ‘웅웅’ 종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몽골군이 동해바다로 가져가다 물에 빠뜨린 하천이라 하여 천의 이름에 ‘큰 종’이 들어갔습니다.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황룡사 터는 1971년 경주 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83년까지 8차년도 사업을 진행해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종은 실제로 동해에 가라앉기라도 한 것인지 행방이 묘연했죠.
이에 1982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황룡사 종을 찾기 위해 잠수부들이 동해를 찾아 헤맸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1982년에는 해녀들이 바다에서 종과 도자기를 봤다는 제보가 잇따라 6명의 심해 잠수부가 반경 500m를 샅샅이 뒤졌으나 발견하지 못했고, 1989년 미군 비행기가 봉길리 앞바다에 추락했을 때 동원된 수색팀도 종을 찾기 위해 탐사했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이후 1997년 4월에는 경주시가 국방부와 해군에 요청해 해저 탐사작업을 실시했고, 최첨단 시설이 탑재된 탐사선 2척을 동원해 한 달간 탐사 작업을 벌였지만, 이 역시 허사였는데요.
현재 정부 차원의 탐사는 맥이 끊긴 것으로 보이지만, 민간 차원의 탐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지난 2013년 5월, 조개잡이 어민 김기창 씨는 조개를 캐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경주와 포항 경계 지점에서 2m쯤 되는 금속류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입구는 자신의 키보다도 컸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이후 TV에서 우연히 황룡사 대종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됐죠.
그는 자신이 본 것이 황룡사 대종이라는 확신이 생겨 제보했고, 해양문화재연구소 탐사팀이 한 달간의 작업에 나섰지만, 별 소득이 없어 탐사 활동을 종료했습니다.
그러나 김기창 씨는 자신이 본 것이 황룡사 대종이라는 확신이 있어 자체적으로 탐사팀을 동원해 현재까지 10년째 탐사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만약 실제로 이 종을 찾아내 건져 올리기만 한다면 신라 역사를 증언하는 세계 발굴이 될 것이고, 한국 땅에 존재했던 세계 최고 크기의 종을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부디 김기창 씨가 포기하지 말고 성공하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일각에서는 몽골군이 저지른 화재에 종이 녹아 없어졌으리라 추정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종은 생각보다 잘 녹는데, 2005년 산불로 녹아내린 보물 497호 낙산사동종이 그 증거라고 하죠.
하지만 만약 녹아내렸다면 그 성분은 그 아래 땅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인데, 아직까지 황룡사 터에서 금속 함량을 측정했다는 뉴스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혹 이 콘텐츠를 계기로 그러한 측정이 이루어진다면 80톤짜리 종의 행방이 확실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