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 힘이 너무나 약해져 중국의 변방국쯤으로 여겨지는 몽골이지만 한때 이 국가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지배하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지배했었습니다. ‘신이 내린 재앙’, ‘끔찍한 학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칭기즈칸이 시작한 역사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손꼽는 정복자로 보통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때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었던 나치 독일의 ‘히틀러’나 섬나라 영국을 제외하고 전 유럽 대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그리스를 넘어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정도를 꼽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복한 영토를 모두 합쳐도 13세기 칭기즈칸이 정복한 영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25년간 그가 정복한 영토는 로마 제국이 400년에 걸쳐 정복한 영토보다 많았는데요. 1206년 몽골제국을 통일시킨 그는 세계로 눈을 돌려 1211년 만리장성을 넘더니 즉각 황하 이북 지역을 점령 후 금나라 수도 북경까지 영토를 늘립니다.
이후 중앙아시아, 피르시아, 러시아, 카프카스, 크림반도, 볼가강 유역의 동유럽 국가들까지 정복하면서 유라시아 대부분이 그의 말발굽 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잔인한 학살자였지만 1995년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천 년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1위로 칭기즈칸을 뽑았습니다. 인터넷이 발명되기 700년 전 이미 지구상에 거대한 통신망을 건설했고 세계무역기구 WTO 못지않은 자유무역을 구축했죠.
그런데 이렇게 천 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 그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사망한 지도 벌써 8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덤의 위치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고 그 무덤을 찾으려 할 때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 그의 무덤을 찾는 순간 대재앙이 일어난다는 소문까지 생겨났죠. 전 세계의 절반을 자기 말발굽 아래 복속시켰던 칭기즈칸의 무덤은 아예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찾지 못한 것일까요?
‘800년 전 한 사나이가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세계 절반의 땅에서 왕으로 군림했으며, 죽은 뒤에도 그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수백 년 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세상은 그를 끔찍한 학살자, 신이 내린 재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류 최고의 전사, 왕 중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가 바로 칭기즈칸이다.
그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일까? 유럽 중심의 세계사 서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이라는 위대한 정복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앞서 말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정복자였지만 그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왜 그의 역사는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묻혀버렸을까.’
미국의 역사 저술과 해럴드 램은 자신의 책 ‘칭기즈칸’ 서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적어도 칭기즈칸에 대한 기록은 그렇지 못합니다. 칭기즈칸 이후 세계사의 중심으로 떠오른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굴복시켰던 그의 그림자를 거의 지워버리다시피 했으니까요.
유럽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정복자 칭기즈칸의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입니다. ‘칸’이란 군주를 의미하고 ‘칭기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보통 위대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어 ‘위대한 군주’ 정도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1206년 부족 국가였던 몽골을 통일하면서부터 테무친이 아니라 칭기즈칸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복된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잔인한 역사가 시작됩니다.
부족을 통일하고 왕이 된 그는 본격적으로 몽골 밖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1년 뒤 중국 서북쪽 변경의 탕구트족을 시작으로, 금나라, 서요를 정벌하더니 차차 호라즘을 넘어 러시아와 헝가리 등 유럽까지 손에 넣었죠. 위에서 언급한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면적을 모두 합한 것보다 넓은 땅을 손아귀에 넣었는데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까지 합치면 몽골제국의 면적은 2배까지 늘어납니다.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러시아, 남쪽으로는 인도,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단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신들의 말발굽이 닿는 모든 지역을 다 정복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고작 10만의 기마병에 불과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정복자가 아닐 수 없는데요. 그의 리더십이야 워낙에 잘 알려져 있으니 이 콘텐츠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영토를 최단기간에 정복했던 전쟁의 신이 어떻게 사망했느냐 말입니다. 그는 20년 넘게 이어진 서하와의 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왜 죽었는지는 아직 그 원인이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거나 서하와의 전투에서 독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그의 죽음 이후 유포된 소문들인데 최근 그가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등장했는데요. 코로나로 전 세계가 휘청거리던 2021년 3월 ‘국제 전염병 저널’이라는 학술지에는 ‘칭기즈칸의 죽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인가 아니면 단순히 유행병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1226년 몽골 군대와 서하 간의 전투 당시 몽골 군대에는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퍼져 수천 명이 사망했는데 원나라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에는 칭기즈칸 역시 고열로 고생하다 8일 만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1226년 몽골 군대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이 칭기즈칸까지 전염시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죠.
다만 낙마로 사망했다거나 독화살에 맞아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생겨난 것은 칭기즈칸이라는 거대한 중심축이 무너지면 몽골 군대 전체가 무너질 것을 염려해 비밀에 부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는 도대체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는 점입니다.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첨단 과학기술을 전부 동원해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의 무덤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남은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위에 잠시 등장한 원나라 역사서인 ‘원사’인데 여기에 딱 네 글자가 등장합니다. 장기련곡, 즉 기련곡에 묻었다는 것인데 이 문장 하나로 그의 무덤 위치를 추적해야 합니다.
후대 학자들은 이 기련곡의 위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칭기즈칸이 동서양에 걸쳐 워낙에 넓은 제국을 건설한 까닭에 기련곡은 몽골이라는 의견, 러시아라는 의견이 분분한데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에 의하면 칭기즈칸 사후 무덤 조성을 위해 동원된 인원은 수천 명에 달합니다. 몽골군 병사들이 대부분 참여했는데 그들은 칭기즈칸의 조용히 비밀리에 매장하라는 명령을 최선을 다해 받들었습니다.
이에 그가 정복했던 영토에 걸맞은 크기의 무덤을 만들고 수많은 여자와 말들을 함께 매장했다고 하죠. 그리고 무덤의 위치를 절대 알지 못하도록 관을 운반하며 마주친 사람들은 물론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조리 죽인 후 1만 마리의 말을 동원해 시신을 묻었던 곳을 철저하게 말발굽으로 다지는 식으로 평정했다고 알려집니다. 물론 도굴 등에 의한 무덤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였죠.
그런데 보물 사냥꾼들은 그의 무덤에는 분명 엄청난 양의 보물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지배했던 만큼 각국에서 약탈한 금, 은, 보화가 함께 매장됐을 것이라 믿는 것인데 그런데도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무덤의 위치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요.
일각에서는 칭기즈칸은 스스로 흉노족의 후손으로 여겼는데 흉노족의 전통은 지하 20m를 판 후 그 아래 시신을 매장하는 겁니다. 전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몽골고원 어딘가 지하 20m를 파고 1만 마리 말발굽으로 다졌다면 이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그의 무덤을 찾기 위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벨리 오브 더 칸스 프로젝트인데 그는 몽골 정부로부터 금지구역으로 알려진 장소를 조사하도록 허가받아 그의 매장지를 추적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티아고 분교 소속의 앨버트 린은 칭기즈칸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6,000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지역을 인공위성과 무인기 등을 동원해 추적했습니다. 이를 통해 촬영된 8만 4,000장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도로와 하류를 비롯해 대규모 매장 흔적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1만 명이 넘는 연구 지원자가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55곳을 추적 매장지로 압축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장소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북쪽에 있는 컨티산맥 일대입니다. 몽골비사에 등장하는 부르한산이 바로 이곳인데 칭기즈칸이 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자 몽골인들이 신처럼 모시는 성산입니다. 다만 첨단과학을 동원해 찾아 나섰지만 지금까지도 무덤의 위치는 미궁에 빠져있죠.
그런데 아마 무덤을 찾는 이들도 쉽게 무덤을 열지는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무덤을 찾기 위한 노력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이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미국 시카고 출신 변호사인 모리 크라비츠라는 인물입니다. 1992년부터 30년 이상 그의 무덤을 찾아왔는데 지난 2002년 드디어 가능성을 봤습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300km 떨어진 한 장소에서 60여 기의 봉분이 발견됐는데 전 세계가 들썩거렸었죠. 모든 봉분이 3m 높이의 돌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인간이 조성한 것이 분명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몽골 언론은 이 소식을 자세하게 다뤘었는데 몽골인들 사이에서 반대 여론이 대단했습니다. 함부로 그의 무덤을 찾아 파헤치는 것은 칭기즈칸 유언에 대한 모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반대로 들끓는 여론을 무시한 후 탐사를 강행한 결과는 잔인했습니다. 크라비치의 지휘 아래 발굴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뒤 갑자기 심한 돌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돌이 굴러떨어져 발굴 요원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죠. 또 차량을 운전하던 운전사가 의문의 사고로 숨지는가 하면 발굴단 내부에서 의문의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죠. 결국 작업은 중지됐습니다.
물론 대대적으로 조사한다면 언젠가는 불가능해 보이는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몽골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까지 발아래 무릎 꿇린 대단한 정복자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고,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만들어 냈으며, 몽골 최초의 종이 화폐를 만들기도 했죠.
그 때문에 몽골인들은 비밀리에 묻어달라는 칭기즈칸의 마지막 유언이 꼭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를 원했던 칭기즈칸의 무덤은 몽골인들은 일부러 찾지 않습니다. 과연 몽골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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