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분위기 속에서 15~16세기경 르네상스 운동이 벌어집니다. 이제 드디어 중세 유럽이 인본주의로 회귀하게 돼요. 내세보다는 현세에 좀 더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해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권장하게 된 거죠. 게다가 사회 분위기가 극장에서도 해부를 보고, 공연 관람,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는 거죠.
그걸 더 공고히 한 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시신을 조각상처럼 만들어서 전시해요. 그래서 지금 보면 미대에서 해부 배우잖아요. 미술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긴 한데, 그러한 이유로 예술가들이 해부를 더 많이 하게 돼요.
그래서 당시의 해부도를 보면 다빈치가 그린 게, 그 후세에 있는 해부학도보다 더 정확하고 잘 그린 게 많아요. 오히려 예술적으로도 풀리다 보니까 이제 5년에 한 번이라는 거는 유명무실하게 됩니다.
일단 교수형에 당하면 시신이 예술가나 의사에게 바로 인도돼요. 하지만 수요가 많아지면서 예술가들한테도 많이 가다 보니까 의사한테 들어오는 건 아직도 부족한 거죠. 거기에 외과술이 발전하면서 더 열망하게 돼요. 해부를 한 번 하면 내가 수술을 월등하게 잘할 것 같다는 생각들을 하게 돼요. 그 과정에 이제 19세기가 됩니다.
19세기 런던에는 희대의 살인마 리스턴 박사님이 한창 팔, 다리 썰고 다닐 때죠. 1830년 한창일 때예요. 당시 런던에서 7개의 갱단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죄목은 도굴입니다.
우리가 보통 도굴이라고 하면 부장품을 훔치는 거죠. 그런데 시신을 훔쳐서 의사한테 판 거죠. 사형수로 부족하니까 묻힌 사람들을 썩기 전에 바로 파서 팔았어요. 그래서 무덤지기도 많이 연루됐었어요. 그래서 그 7개의 갱단이 잡히고 당연히 주범들은 목이 매달렸겠죠? 그 시신들은 또다시 의사에게 인도되는 겁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불리스 아크네, 불량배의 여드름이라는 별명이 붙은 공동묘지가 있어요. 그때 당시 런던은 슬럼화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보는 공동묘지 같지 않았단 말이에요. 어느 정도냐면 관이 있는데, 그 위에 또 관을 덮을 정도로 과밀했었어요.
그런 공동묘지 한 곳에서 연간 1,500~2,000구 정도의 시신이 사라져요.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도굴꾼들이 그래도 공로도 있어요. 당시에는 사망 진단이 어렵죠. 생매장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열었는데 사람이 살아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상황이면 도망가는 경우도 있는데, 더 나쁜 놈들은 그 사람을 다시 살해해서 밀수하는 경우가 있었죠.
이게 얼마나 만연했냐면 당시 저명한 해부학 교수들이 진짜 많이 나오거든요. 근데 그중에 이비인후과 쪽으로는 ‘구이차드 조셉 쥐베리’, 이 사람이 청각 기관의 해부를 완성한 사람이에요. 달팽이관은 이렇게 생겼고… 귀라는 게 깊고 민감하고, 뼈 안에 또 다른 뼈로 이뤄진 거라서 진짜 어려운 거거든요. 게다가 지식 없이 했기 때문에 정말 수십 번, 수백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이 사람이 대략 30년에 걸쳐서 파리 근교의 있는 공동묘지의 시신을 정기적으로 돈을 주고 샀어요.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부도덕한데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윌리엄 버크’, ‘윌리엄 헤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요. ‘어차피 시신을 팔 거면, 묻히기 전에 우리가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뒷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으슥한 곳에서 혼자 걷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살해하는 거죠. 한 명이 주의를 끌고, 한 명이 목을 졸라서 죽이는 거예요.
이게 당시에 수사 기술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밝혀진 걸로는 16건, 최소 16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거래를 튼 ‘녹스’라는 교수가 있어요.
녹스가 모르지 않았을 거예요. 이들이 갖고 온 시신에는 모두 교살 자국이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그걸 알고 있음에도 녹스는 병들어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성인을 해부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서 계속 진행하게 된 겁니다. 근데 어떻게 들켰을까요? 녹스가 먼저 걸리고, 이후에 버크와 헤어가 잡혔어요.
시신을 해부할 때 보조하는 사람이 들어왔는데, 시신이 자기 친척이었던 거예요. 어제 집에 안 들어갔다던데, 장례식도 안 한 시신이 거기 있었던 거죠. 그리고 목에 교살 자국이 있으니까 생각해 본 거죠. 녹스 교수가 해부하는 시신에는 다 교살 자국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걸 신고하게 되고, 윌리엄 버크와 헤어가 잡혀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윌리엄 버크는 사형을 당했고, 그렇게 교수형 처해져서 내려온 시선에 또 다른 교수가 가서 군중들이 보는 와중에 시신을 해부해요. 그런데 윌리엄 헤어도 교수형 선고를 받고 밧줄에 목이 매달렸는데, 줄이 끊어져서 헤어는 그 길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잡히지 않아서 생존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녹스 교수는 교수형을 당하지는 않았고 그냥 교수직에서 추방당했는데, 그 후에도 런던으로 이주해서 계속 해부학자로 명성을 이어갔어요. 녹스 박사가 어찌 됐건 해부학에 대한 지식이 워낙 해박하니까 완전히 배척할 수 없었던 거죠.
하여튼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해부학이 계속 발전했어요. 일각에서 나치나 일본의 마루타 실험이 해부에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논문을 찾아봤거든요. 그런 정황이나 증거는 전혀 없어요. 왜냐면 여기에서 시행한 실험은 어떤 살생을 위한 실험이었기 때문에 인류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게 없어요.
시간이 흘러서 ‘포르말린’이 개발된 게 가장 결정적인데요. 포르말린이 개발되면서 시신 1구를 가지고 오랫동안 해부할 수 있게 되고, 시간을 두고 여러 명이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시신에 대한 수요가 확 줄었어요. 그러면서 굉장히 인도적인 방법, 기증을 받아서 할 수 있는 현대의 해부학이 완성된 거죠.
게다가 이제는 해부학이 사실상 완성됐죠. 우리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제 알아요. 그래서 이러한 역사를 거쳐서 우리가 의과 대학에서 그런 해부 실습을 할 수 있었다는 거죠. 사실 끔찍한 역사가 있었어요. 해부할 때 포르말린 욕을 많이 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소중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였어요. 반성중입니다. 또 무궁무진한 의학의 역사 준비해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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