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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로 간 애국자들, 1960년대 최빈국 한국이 오늘날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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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언제나 결과물이지만, 얼마든지 가정을 해 볼 수는 있습니다. “만약 일본에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만약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았다면?”과 같은 끊임없는 상황을 가정해 현재 상황을 그려 볼 수는 있겠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미 눈앞에 펼쳐진 현재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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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전 세계 곳곳에는 “만약 한국인이 없었다면?”이라는 상황을 가정해 상상해 볼 수 있는 국가들이 몇몇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유럽 정중앙에 자리한 초강대국이 하나 있습니다.

6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한국인들이 그 나라에 와준 것을 고마워하며 그리워하는 나라, 1963년 유럽 한복판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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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에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주린 배를 잡고 물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우거나 초근목피로 연명한 것은 아닙니다만, 제 아버지의 20대 시절에는 그랬습니다.

가을에 수확한 곡물이 전부 떨어진 3~4월 춘궁기가 되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그 시기를 살아내셨고, 1960년 한국에 살았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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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롭게 탄생하거나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는 약 85개국으로, 그중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른 여파로 세계 최빈국에 속했습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10달러로, UN에 등록된 120개 국가 가운데 최하 수준이었습니다. 인도보다도 못했죠.

인도야 인구가 너무 많아 그렇다고 하지만, 한국은 인도의 30분의 1도 안 되는 인구수라고 봤을 때 못 살아도 너무 못살았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최빈국에 속하는 아프리카의 브룬디나 소말리아, 콩고보다도 소득 수준이 뒤떨어졌고, 잠비아가 한국보다 10배 더 잘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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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습니다. 공사장을 돌고 싶어도 아직 대규모 건설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그나마 농사라도 짓겠다고 하면 아직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돈도 되지 않는, 허리뼈 깎아 먹는 중노동에 불과했습니다. 실제 1960년대 한국인 10명 중 4명이 실업자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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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62년 초, 20대 젊은이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좁은 한국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 큰 돈벌이를 해 볼 사람이 있느냐는 솔깃한 안내문이었죠. 바로, 독일이었습니다.

관련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1963부터 14년간 독일로 파견된 한국의 젊은이는 남녀를 합쳐 약 18,000명입니다. 왜 이역만리 독일에서 한국 젊은이들을 데려갔던 것일까요?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 이후 해외 인력 송출 제1호로 기록된 이 젊은이들은 국위선양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주된 목적은 외화 획득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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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하면 된다!”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지만, 경제는 의욕이 앞선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 발전을 시킬 돈이 있어야 했죠. 돈, 즉 차관을 빌려와야 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가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던 것은 미국입니다만,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잡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 금융기관도 한국의 미래를 불신했죠. 일본도 찾았으나, 일본은 “국교가 없는 국가에 돈을 빌려 줄 수 없다.”라며 단칼에 거절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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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라인강의 기적’으로 빠르게 경제 성장 중인 독일이 레이더에 잡혔습니다. 한국 정부는 1961년 11월 말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냈는데, 서독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독이 한국에게 1억 5,000만 마르크(약 330억 원)의 상업차관 도입을 수락한 것이죠.

물론 국가와 국가 간의 대출이기는 하지만, 이를 지불 보증해 줄 금융기관이 필요했는데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한국에 지불 보증을 해 줄 은행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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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이 고민에 빠졌던 찰나, 독일 정부의 노동부에서 한 관료가 사절단을 찾아왔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그는 대뜸 “서독에는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부족합니다. 웬만한 광산은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지금 독일인 중에서 광부로 일하려는 근로자가 없습니다. 혹시 한국에서 광부 5,000명과 간호조무사 2,000명을 보내줄 수 있을까요? 만약 보내준다면 그들의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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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1960년 당시 독일은 패전국이라는 상처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는데, 노동력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힘든 일을 기피하기 마련입니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취업 기회가 열려있다 보니 독일인들의 힘든 광산노동이나 시체를 닦는 등의 일을 기피하는 풍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노동력이 필요했던 독일과 실업문제와 외화 획득이 필요했던 한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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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덕분에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들을 해외로 보내는 인력 파견이 이루어졌는데요. 그렇게 모집한 파독 광부 1진 123명이 1963년 12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1966년까지 총 7,932명의 한국 남성과 10,226명의 한국 여성이 독일로 건너가 죽자 살자 돈을 벌었습니다.

이들이 목숨값으로 돈 벌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이 연간 600억 원으로 같은 기간 한국의 GDP 2%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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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으로 한국은 고속도로를 깔고, 포항제철을 세우는 등 경제개발이 착착 진행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단순히 파독 광부니, 파독 간호사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해 목숨 걸었던 애국자로 불러야 하는 겁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돈도 빌리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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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탄광에서 일하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안전을 위해 마스크와 장갑, 무릎 보호대, 헤드 랜턴 등의 안전 장비를 착용하는 것이 필수지만, 지하 1,000m 아래 35도가 넘는 탄광에서 온종일 버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독일 탄광은 100m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갔고, 그래서 대개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기 위해 옷을 벗고 작업하는 것이 다반사였죠.

실제로 한 파독 광부는 “우린 막장에서 매일 목숨 건 전투를 했다. 땀에 젖은 팬티를 하루 5번 이상 짜서 입어야 했고, 장화는 땀으로 젖어 10번 이상 쏟아내야 했다.”라고 증언하고 있는데, 약간의 과장이 더해졌는지 몰라도 그들의 일터는 지옥이었습니다. 물론 안전 장비를 벗고 작업하다 보니 사고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아 실제로 재해를 입고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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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광부들이 사용하던 ‘코담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면 석탄 가루와 돌가루가 온몸의 모든 구멍으로 들어옵니다. 독일에서는 탄광 작업 중 가스 사고의 위험 때문에 흡연을 금지했는데, 이 때문에 애연가들은 냄새로 흡연을 대신할 수 있는 ‘코담배’를 소지하고 입갱 했습니다.

코담배는 일반 담배와 다릅니다. 한쪽을 콧구멍에 삽입할 수 있도록 작은 용기 안에 담아 제조된 가루담배를 말하는데, 코담배를 코안에 넣어 비강 내 점막을 자극하면 이미 들이마신 석탄 가루가 콧물과 함께 다시 빠져나옵니다. 분비물이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코담배로 돌가루와 석탄가루를 뽑아내기 때문에 위험한 기호품이면서 약품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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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으로 내려가는 일은 멀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 지하로 내려가면 다시 전철을 타고 3km를 이동해야 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직접 석탄을 캐던 당시 우리나라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기계로 석탄을 캤는데요.

가장 힘들었던 일은 ‘슈템펠’이라는 무거운 쇠기둥을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채탄 기계가 석탄층을 파고들면 광부들은 그 뒤에 슈템펠을 세워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했던 작업인데, 60km에 달하는 슈템펠을 개인당 하루 80개씩 세웠습니다. 몸도 펼 수 없는 좁고 더운 갱도에서 60km짜리 슈템펠 80개를 세우는 일을 매일 반복한다면 얼마나 고됐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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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로 파견된 여성들의 삶 역시 광부 못지않게 힘들었습니다. 한국에서 건너간 간호사들은 대부분 독일 간호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맡았는데, 일부는 시체를 닦거나 죽은 이에게 수의를 입히는 일을 맡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던 이들로, 한국 간호사들을 24시간 내내 배정했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독일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죽은 이들의 시체를 닦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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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 언론에 한국인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이야기가 소개될 때마다 독일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이야기가 전해질 때는 ‘극동에서 온 천사’라고 부를 정도였죠.

한국에서 건너간 간호사들은 현지인들의 어마어마한 감탄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친절함과 주사를 놓는 실력은 서독 간호사들이 절대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VIP 환자들이 주사를 맞을 때는 꼭 한국인 간호사를 찾았는데, 아마도 어릴 적부터 젓가락질해온 덕분에 손재주가 좋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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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파독 간호사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1977년 정부 차원의 파독이 종료된 후 1990년대까지 독일 병원들은 한국 간호사를 별도로 찾았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좋으니 다시 독일로 와 달라는 요청이었고, 실제로 귀국한 몇몇 간호사는 다시 독일로 건너가는 사례도 있었죠.

어쨌든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에 감동받은 독일 국회의원들은 한국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해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되고, 1964년 12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독으로 국빈 방문하게 되는데요. 이 방문해서 한국은 이후 경제 발전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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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차관 교섭 사절단의 공식 통역을 담당했던 ‘백영훈’ 씨의 증언입니다. 국빈으로 초대된 박 대통령은 서독 본에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와 만났는데, 백영훈 씨는 다시 한번 공식 통역관으로 동행하게 됩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돈을 빌려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라면서 거의 울먹이며 부탁했습니다. 이 부탁을 받은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이 충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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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는 경제장관 때 한국에 두 번 갔다 왔습니다. 한국은 산이 많아 경제발전이 어렵습니다.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건설해야 합니다. 고속도로를 만들면 그 위에 자동차가 달려야 합니다. 서독의 국민차, 폭스바겐은 히틀러가 제조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철을 가공할 제철 공장을 짓고, 연료 생산을 위한 석유 정제공장도 필요합니다. 경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중간층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하면서 경제고문을 파견해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섰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서독에서는 5명의 경제고문이 한국으로 파견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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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독 총리는 그 자리에서 “리더는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일본이 아무리 미워도 꼭 일본과 손잡아야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습니다.”라며 한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 회담 후 에르하르트 총리는 담보가 필요 없는 재정차관 2억 5,000만 마르크를 제공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죠. 1964년 회담 후 한국으로 돌아온 박 전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부 고속도로를 깔고, 포항제철을 세우고, 1965년에는 한일협정을 체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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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1951년 10월 1일, 당시 영국의 <런던타임스> 기자가 쓴 이 문구는 1955년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UN은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 UN 한국위원회를 파견했는데, 당시 조사단장이던 인도의 전 국방장관 ‘메논’은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인용했죠. 그만큼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라는 희망도, 경제 재건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전쟁이 끝난 후 “이 나라가 복구되려면 적어도 1세기는 필요할 것”이라며 비관적으로 내다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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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의 기자도, 인도의 전 국방장관도, 맥아더 장군도 모두 틀렸습니다. 한국은 불과 1세기도 지나기 전에 쓰레기통에서 희망을 피워내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이역만리 독일의 지하 1,000m 탄광으로 들어가 슈템펠을 세우던 광부들의 피땀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독일 환자들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간호사들의 눈물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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