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돈을 흥청망청 쓰는 사람에게 ‘땅을 파봐라. 돈이 나오나’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땅을 파면 돈은 물론 돈보다 더 귀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작년 8월 독일 북부 항구도시 브레멘에 사는 여덟 살 소년 비아네는 학교 운동장에서 모래놀이하다 우연히 작은 금속 하나를 주웠습니다.
아이는 이 금속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집으로 가져가 1년간 보관해 왔는데 최근 이 금속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고고학자에게 우연히 금속을 보여줬는데 글쎄 1,800년 전에 발행된 로마 제국 은화였던 겁니다. 동전은 서기 161~180년 사이 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주조된 은하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무게는 28g이 채 되지 않고 폭은 1.3cm, 가장자리 무늬와 중앙에 도형이 새겨진 것이 특징입니다. 다만 1,8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탓에 상당 부분이 마모돼 세부 디자인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릴 예정입니다.
고고학자 우타 할레 교수는 ‘이 동전은 2세기에 만들어진 고대 로마의 데나리온’이라며, ‘당시 인플레이션 시기에 주조됐기 때문에 은의 양은 상당히 적은 것으로 보인다’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땅을 팠더니 돈보다 귀중한 보물이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처럼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 보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31년 전 경남 함안에서는 신문 배달하던 중학생이 공사장에서 철조각을 하나 찾아냈는데 이게 상상도 못 할 보물로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31년 전인 1992년 어린 학생이 유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경남 함안에서 신문 배달하던 중학생 이병춘 씨는 달랐죠.
6월 6일 현충일 아침 7시, 일간지를 배달하기 위해 도항리 아파트 신축 공사장을 지나던 그의 눈에 햇빛을 받아 순간 반짝이는 작은 생선 비늘 모양의 철편이 보였습니다. 아파트가 거의 들어서고 배수관 설치 작업 공사 중이었는데 포클레인으로 퍼낸 흙더미에서 그는 예리한 눈썰미로 철편을 발견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잠시 소개해 드렸었는데 경남 함안은 아라홍련이라는 꽃이 유명합니다. 1991년 성산산성 발굴 도중 발견된 700년 전 고려시대 연꽃 씨앗을 발아시켜 종을 복원해 냈는데 7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연꽃에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죠. 그리고 함안연꽃테마파크에는 약 33,000평 규모의 생태공원을 빼곡히 채워 8월이면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습니다.
홍련은 말 그대로 붉은 연꽃이라는 의미인데 앞의 아라는 무슨 뜻일까요? 바로 6세기 중반 경남 함안에 존재했던 가야의 소국 중 하나인 아라가야에서 따왔습니다. 아라가야는 그 위치에 대해 논란이 거의 없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한데요.
어쨌든 평소 함안이 아라가야의 중심이라는 말을 누누이 들었기 때문에 익숙했는데 혹시 몰라 철편을 들고 곧장 지국장을 찾았습니다. 이 비늘 모양 철편을 본 지국장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즉각 그를 데리고 공사 현장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포클레인이 퍼낸 흙더미에서 수많은 철편을 발견했고 즉각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제보했는데 연구소는 발견 장소가 아파트 공사장이라는 소식에 단번에 달려왔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막 공사를 재개하려는 포클레인을 막아서고 흙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그 흙더미 속에서 수 개의 갑옷 쇳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간 함안에서는 철제갑옷이 출토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조바심을 냈고, 당장 공사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아마 10분만 늦었어도 찬란했던 가야의 갑옷은 포클레인 바가지에 무참히 흩어졌을 뻔했지만, 어린 중학생의 예리한 눈썰미 덕분에 아라가야의 역사가 1,6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즉시 현장으로 발굴단을 보냈는데 당시 조유전 유적조사실장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갑옷은 사람이 입던 것이 아니라 마갑, 즉 말이 입던 갑옷인데 그간 이렇게 완벽한 형태의 마갑이 발견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포클레인 바가지 한 삽에 갑옷 한쪽은 없어졌지만, 멀쩡히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수준이었죠.
우선 함안에서 발견된 마갑은 머리, 목, 가슴 그리고 몸통 부분으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왜냐하면 부위별로 철편의 크기를 달리해서 만들었으니까요. 여기에 말의 얼굴을 가리는 마주, 목과 가슴을 가리는 경흉갑,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까지 이렇게 완벽한 형태의 마갑은 발견된 적이 없었죠. 그간 합천이나 경주 등에서 마갑에 사용된 철편들이 가끔 등장하기는 했으나 함안의 그것처럼 완벽한 형태는 아니었는데요.
그렇다면 아라가야인들은 왜 말에 갑옷을 입혔던 것일까요? 왜냐하면 전투방식 때문입니다. 말을 탄 기병과 보병이 전투를 벌일 때는 창과 같은 긴 무기를 가진 보병이 먼저 말을 공격해 기병의 전투력을 약화시킵니다. 이때 보병은 말의 앞다리나 머리, 가슴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데 우선 말의 앞다리를 쳐서 주저앉힌 후 말의 가슴을 찌르는 방식을 썼죠.
이러한 보병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 마갑으로, 말의 앞다리, 머리, 가슴부위를 보호해 줍니다. 그래서 보병이 말의 앞다리를 공격하기 위해 몸을 낮추게 되는데, 자칫 말발굽에 짓밟히는 위험이 있어 마갑은 보병의 공격력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어쨌든 한반도에서 마갑이 사용된 것은 삼국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약 4, 5세기 무렵으로 쌍영총 등 고구려 벽화에 말에 마갑과 마주를 착용시킨 중무장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함안에서 발견된 마갑은 총길이 2.26m, 너비 48cm로 이를 통해 고대 왕국인 아라가야의 실체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됐습니다.
말의 갑옷이 출토된 무덤이라 하여 이를 마갑총이라 불렀는데 마갑총에서 나온 또 하나의 대단한 유물이 있습니다. 칼인데요. 고리자루 큰 칼이라 불리는 이 칼도 같은 장소에서 발굴됐습니다. 우선 칼은 전체 길이 89.6cm로 꽤 길었는데 칼의 단면은 세장한 이등변 삼각형이고 한 줄의 톱니무늬가 금 상감기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속의 표면에 무늬를 새긴 후 파낸 다음 금을 박아 넣은 것이죠.
이 유물은 가야인들의 철 다루는 기술, 공예기법의 수준, 조형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높습니다. 또한 두 유물 모두 출토지가 분명하다는 점, 함께 출토된 여러 유물이 5세기 아라가야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됨으로써 제작 시기 및 장소를 확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데요.
이에 2019년 12월 26일 문화재청은 이 둘의 상징성을 감안해 함안 마갑총 출토 말 갑옷 및 고리자로 큰 칼로 명명하고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가야 유물이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간 가야사는 잊힌 왕국처럼 마치 기억 속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가락국기는 단편적이고 설화적이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일본서기 등의 고문서들은 가야가 아닌 고구려, 백제, 신라와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쓰여 가야의 발전 과정을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대사뿐 아니라 신라의 성장 과정, 고대 한일관계 등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서는 가야사가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 가야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아마 임나일본부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4~6세기 일본이 가야에 해당하는 임나에 통치기구를 세우고 신라와 백제, 가야를 지배했다는 주장입니다. 일본이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고 6세기 중반까지 그 지역을 통치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이죠.
물론 이는 20세기 초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날조에 불과합니다. 이 날조의 시작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시작됩니다. 414년 고구려 장수왕은 자신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과 영토 확장 등 전무후무한 업적을 기리고자 현재 중국 길림성 통구 압록강변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는데 이 비석에 쓰인 신묘년 이래 있었던 일을 기록한 기사가 날조 도구로 쓰였습니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죠.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스파이였던 사코 가게아키는 옛 고구려 국내성 터였던 길림성 지안현에서 광개토대왕비의 목본을 입수해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5년에 걸쳐 비문을 판독한 후 이를 책으로 펴냈는데, 이 책은 일왕에게까지 헌상됐죠.
당시 일본은 일본서기에 날조된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시기에 걸맞게 광개토대왕비가 판독된 겁니다. 일본이 광개토대왕비에 열광했던 것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한 내용과 자신들의 역사서 일본서기 내용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 9권 신공기에는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나,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배경이 됐습니다. 즉, 임나 지역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를 직접 통치했다는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한반도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시켰죠.
다만 이렇게 중요한 통치 기록이 자신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등장할 뿐 한국의 역사책인 삼국사기에는 ‘임나’라는 용어조차 등장하지 않아 일본 외에는 주장하지 않는 날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잊힌 왕국으로 역사 속에 잠든 가야사에 대한 문헌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이 가야에 대한 유물조사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고고학자들을 대거 동원해 조선고적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가야 고분군 발굴에 나섰었죠. 1914년에는 도리이 류조라는 일본 고고학자가 조사를 시작했고, 1917년에는 아라가의 중심지 함안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유적으로 보고 대대적인 발굴 조사에 나섰습니다.
고분 하나에 하루 이틀 만에 마무리하거나 약식 발굴보고서만 내는 등 상당히 부실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고학적 유물을 찾아낸다는 목적이 아니라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어쨌든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근거 없는 낭설로 기록될 듯합니다.
이렇듯 신문 배달하던 중학생이 찾은 철편 하나가 때로는 역사를 파헤치는 귀중한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걷고 있는 땅속에도 유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는 하는데 땅속 어디에선가 우리 관심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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