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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에게 대결 신청하며 쫓아다닌 ‘최배달’, 두 전설의 맞대결은?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최배달은 수십 개가 넘는 일본의 가라데 유파 중 최초로 ‘풀 컨택트’, 즉 직접 상대방을 가격할 수 있는 타격을 허용함으로써 세계에서 유명해진 극진 가라데를 창시한 인물입니다. 192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16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가 46살이던 1968년, 일본으로 귀화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배신자’, ‘변절자’ 등등 온갖 입에 담을 수가 없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아무래도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어릴 적 다른 나라로 유학을 떠나 오랫동안 살게 되면 그 나라 언어가 가진 특유의 억양이 입에 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는 70세의 노구에 한국의 토크쇼에 출연했음에도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는 점 외에는 일본식 억양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가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일본으로 귀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가라데 중 유일하게 실전 격투에 가까운 극진 가라데를 창시하고, 그의 도장 깨기 일화가 알려지고, 황소와 싸워 황소 뿔을 자르고, 헤비급 복서인 ‘톰 라이스’를 KO 시키는 등 그의 전설 같은 무용담이 일본에서 화제가 되면서 그에게는 ‘야쿠자와 무술 고수들도 꼼짝도 못 하는 남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최고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옛날부터 사무라이와 협객 등에 대한 로망을 가진 일본답게 검이나 무기 없이 맨주먹 하나로 일본을 평정한 그는 단숨에 일본 청소년들이 뽑은 ‘일본의 위대한 영웅 10걸’로 선정됐죠. 일본 역시도 일본 출신의 영웅이 필요하던 순간에, 당시 극진 회관을 후원하던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가 “외국인이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며 귀화를 요구해왔죠. 그날까지 단 한 번도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잊은 적 없고 일부러 ‘배달’을 그의 이름에 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시한 극진 가라데를 보급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이 귀화를 선택했으나, 그에게 귀화는 국적이 바뀌는 것일 뿐 뿌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 자신은 늘 한국인임을 강조했습니다.

어쨌든 그가 창시한 ‘극진 회관’은 최전성기 때 전 세계 130개국 지부에 요르단 국왕, 스페인 국왕, 007시리즈로 유명한 영화배우 숀 코너리 등등 유명인까지 총 1,200만 명이 넘는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일본 청소년이 뽑은 위대한 영웅 최배달과 일본 레슬링계의 영웅 역도산은 어떻게 주먹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일까요?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바람의 파이터 최영희의 무도 활동에 관한 연구’에서 김용호 저자는 최배달과 역도산의 만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모든 고수를 격파한 후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진출한 그는 자신의 공수도를 전파하기 위해 11개월간 미국 32개 회관을 돌며 당대 최고의 레슬링 챔피언 및 복싱 챔피언들과 진검승부를 펼쳤는데…

그중 마지막 행선지인 하와이에서 자신과 같은 조선인 역도산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역도산을 만난 그는 레슬링 선수들의 타격기가 약한 것을 간파하고 그에게 공수도를 가르쳐줬는데 이후 역도산은 자신의 전매특허인 ‘가라데 촙’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역도산은 이를 바탕으로 복싱 선수 출신의 프로 레슬러 ‘톱 라이스’와 대결했으나 피투성이가 된 채 패배했고 최영희가 대신 복수해 주면서 인연을 맺게 되는데요. 둘 사이에는 ‘기무라 마사히코’라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무라는 예전 프라이드 시절이나 현재 UFC에서도 가끔씩 볼 수가 있는 관절 기술인데요.

이 기술에 ‘기무라’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이 기술을 창시한 인물이라는 뜻이죠. 엘리오 그레시라는 선수와의 대결에서 엘리오는 우두둑 소리와 함께 팔 관절이 빠지게 되는데 기무라 선수가 유도 기술 중 ‘팔 얽혀 비틀기’라는 기술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 기술에는 ‘기무라 록’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죠. 그는 약관의 나이에 키 170m, 85kg으로 크지 않은 신체 조건임에도 일본 무제한급 유도 대회를 제패한 인물이면서, 하루 9시간 동안 훈련하는 연습 벌레입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이 만나 18세에 무려 유도 5단의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17세에 전 일본 유도 대회 우승 후 3연패, 10연승 우승, 1950년까지 13년간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일본 유도계 최강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연히 기무라의 경기를 본 최배달은 그에게 호감을 느껴 친구가 됐는데 역도산과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은 기무라가 병든 아내의 약값을 벌기 위해 프로 레슬링으로 전향하면서입니다. 당시 역도산은 조선인이었지만 철저히 조선인임을 숨기고 프로 레슬러로 활동하면서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는데, 수없이 많은 서양의 거구들을 쓰러뜨리면서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일본인들의 패배 의식을 치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일본식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라 불렸던 역도산은 프로모터로서도 상당한 자질을 갖췄습니다. 프로레슬링의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태그 매치를 도입한 것도 그였으니까요.

이때, 역도산이 자신의 짝꿍으로 선택한 것이 기무라였고 둘은 환상의 콤비를 자랑했죠. 어쨌든 역도산과 기무라가 한 조가 되어 경기에 자주 나섰는데 둘은 환상의 콤비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약값을 벌기 위해 프로레슬링으로 진출하기는 했으나 슬슬 인기가 높아지던 순간, 매번 역도산에 가려 조연에 만족해야 했던 기무라는 슬슬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것’, ‘일본의 자랑’이라는 유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최고 스타가 프로레슬링에서 조연급으로 전락하니 기무라 입장에서 상당한 자존심이 상한 것이죠. 결국 기무라는 “역도산의 레슬링을 쇼”라는 막말을 내뱉고 ‘국제 프로레슬링단’이라는 독립단체를 설립합니다.

이후 역도산과 결별을 선언하고는 “정식으로 경기하면 내가 역도산에게 이긴다”라고 큰소리를 쳤는데요. 결국 역도산이 기무라의 대결을 받아줍니다. 그렇게 1954년 12월 22일, 오후 8시 30분에 치러진 기무라와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시작됩니다. ‘NHK’와 ‘니혼 TV’ 두 방송사가 중계한 방송의 시청률 합계는 자그마치 100%, 모든 국민이 경기 하나만을 본 것이죠. 이 경기의 승자는 역도산입니다. ‘일본의 영웅’이라 불리던 기무라는 역도산으로부터 거의 일방적인 린치를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로 KO 당했습니다.

거의 농락당하다시피 패배한 기무라를 두고 일본 아쿠자들은 “당장 역도산을 제거하러 가자”라고 나서는 등 ‘일본의 것’, ‘일본의 자존심’인 유도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게 일본의 정신이니까요. 그런데 이 경기 때문에 최배달과 역도산의 대결이 시작됐습니다. 원래 이 경기는 기무라와 역도산 간의 각본 경기였습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흥행을 위해 처음 경기는 역도산이, 다음 경기는 기무라가 이겨 가면서 무승부로 계획됐는데요. 경기 중 기무라가 역도산의 낭심을 걷어차면서 역도산이 분노에 가까운 폭행을 했죠.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KO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최배달은 즉각 링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좋으나 싫으나 같은 동포인데 일본인들 앞에서 싸워서야 되겠나”라면서 만류했고 최배달 역시 이미 시합을 치른 역도산에게 승리해 봐야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해 버렸죠. 그는 각본을 믿고 전혀 무방비 상태로 경기에 임한 기무라를 묵사발로 만든 것은 기만행이라고 생각했고,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기무라가 처절하게 얻어터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역도산에게 정식 도전장을 보냈죠. 하지만 역도산은 최배달의 도전을 받아주지 않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역도산이 최배달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비록 최배달과 직접 겨룬 적은 없지만, 하와이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톰 라이스’를 발차기 한 번으로 KO 시킨 최배달…

그와의 경기 후 톰 라이스는 턱뼈와 갈빗대가 부러진 채로 은퇴하고 말았는데요. 자신은 최배달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역도산을 찾아다니던 최배달은 그가 자주 드나드는 나이트클럽에서 기다리기를 며칠 뒤 그는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던 역도산을 마주합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무대로 올라가 그에게 정식으로 도전 의사를 밝혔는데 예기치 않은 최배달의 도전을 받은 그는 마이크를 휘두르며 최배달을 위협했습니다. 일본 레슬링을 만든 장본인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가 쇠파이프로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 큰 실망을 느낀 최배달은 그에게 ‘비겁한 자식’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그대로 나이트클럽을 나와버렸습니다. 그에게 싸울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겁니다.

어쨌든 이후로 역도산은 1968년,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와 사소한 말다툼이 폭행으로 이어지면서 복부를 칼에 찔렸습니다. 깊지 않은 상처였기 때문에 간단한 치료로 끝날 줄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화농성 복막염이 원인이 되어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됩니다. 나이 불과 39살에 일본 레슬링의 아버지와도 같은 인물이 사망한 겁니다. 그의 사망에 의료 사고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단지 의혹입니다.

그렇게 역도산은 1968년에, 최배달은 1994년에 사망하면서 직접적인 대결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조선인 2명이 한 명은 ‘맨손 격투의 전설’로, 다른 한 명은 ‘일본 레슬링의 최고 영웅’으로 꼽히며 활약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음 영상에서는 역도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한 번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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