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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득템한 한국 전설 속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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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사무라이를 좋아하시나요? 사무라이라는 한자는 모실 시의 일본식 발음인데 뜻으로만 보자면 누군가를 모시는 또는 지키는 사람입니다. 현재로 치자면 경호원이죠. 사무라이를 대표하는 그림은 칼을 두 자루씩 차고 다니는 이미지일 텐데 칼을 두 자루씩 들고 다니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6세기 센고쿠 시대 일본의 영주들은 영토전쟁을 벌였는데 그들을 지키는 사무라이들이 들고 다니던 칼은 모래에서 추출한 사철을 주원료로 했습니다. 하지만 불순물이 워낙에 많았던 탓에 칼이 쉽게 부러져버리자 비상용으로 한 자루를 더 휴대하게 됐던 것인데 이 이미지가 워낙에 강렬하다 보니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만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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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사무라이인데, 게임, 만화, 영화 등에서 미화된 사무라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현재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무언가를 지켜내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을 문화의 힘으로 해석할 수 있을 텐데 현재 한국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지만 한국 이전에 전 세계를 강타했던 것은 일본 문화입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을 잘 활용했는데 한국인 중에도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층이 상당합니다. 혹시 ‘귀멸의 칼날’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알고 계시나요? 워낙에 작품성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거뒀는데 이 애니메이션이 한국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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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착용하는 귀걸이에 욱일기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애니메이션에는 독특한 모양의 칼이 등장하기 때문인데요. 일본 애니메이션에 일본 국보로 지정된 칼이 등장하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되겠냐마는 이 칼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600년 전 백제가 왜에 하사한 칠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일본이 백제에서 하사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 칼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역사 왜곡의 뿌리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칼날에 쓰인 문장 하나로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일본이 국보로 지정한 백제 ‘칠지도’를 자세히 다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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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반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설을 말합니다. 물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으로 남선경영론 혹은 줄여서 임나일본부라고도 하죠.

이 역사왜곡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비롯됐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 자신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과 영토확장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중국 길림성 통구 지역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는데 이 비석의 비문 가운데 ‘신묘년 기사’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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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1883년 일본 육군 밀정이었던 사코가게야키가 옛 고구려 영토였던 길림성에서 광개토대왕릉비 묵본을 비밀리에 입수한 후 해독해 책으로 냈는데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렇게 1,50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됐습니다.

일본이 이토록 다른 나라 비석에 열광했던 것은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내용과 자신들의 역사책인 일본서기 내용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 9권 신공기에 따르면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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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임나지역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한국을 직접 지배했다는 것이고, 이를 근거로 19세기 일본 역사학자들이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시켰습니다. 다만 일본이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자신들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만 등장할 뿐, 한국 측 역사책인 삼국사기에는 임나라는 용어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임나일본설의 결정적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오늘 살펴볼 칠지도라는 칼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로 알려진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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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된 ‘금족지’에 있는 보물창고에는 몸체 좌우에 각각 3개의 칼날가지를 가진 육차도를 보관한 특수상자가 있다는 것이죠. 1873년 신궁의 주지로 부임한 스가 마사토모는 이 전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금지구역으로 들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데요.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내용을 확인합니다.

오랜 세월 탓에 녹이 슨 75cm 길이의 칼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금빛 글자를 본 것이죠. 즉시 녹을 긁어내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예리하게 파낸 후 그 속에 금을 밀어 넣은 금상감 기법의 글자들이었는데요. 녹을 전부 제거하자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의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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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일부는 너무 손상이 심해 읽을 수 없었는데 대략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앞면에는 ‘태O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OOOO가 만들었다.’ 뒷면에는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라고 적혀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맨 처음 글귀, 즉 황제 또는 국왕의 연호인 ‘태O 4년’입니다. 이 글자를 정확히 해석하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이 때문에 일본의 역사왜곡의 근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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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계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육차모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라 여겼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 하나와 칠자경 하나, 그리고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이 칠지도가 바로 이소노카미 신궁의 육차모라는 것이죠.

칠지도는 그 한자에서 보듯 7개의 가지가 있는 칼인데 칼날가지가 좌우 3개씩 6개인 것 같지만 상부 칼날까지 합치면 7개로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칠지도라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는 1953년 이 칼을 칠지도로 명명해 국보 제15호로 삼았죠. 위 명문을 두고 일본 학계는 백제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본에 바쳤다고 하고, 한국 학계는 백제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태자를 일본에 외교사절로 보내 이 검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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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국과 일본의 견해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칠지도는 한국의 고대국가인 백제가 제작했고, 이 검은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국보로 지정했다는 점입니다. 그간 명문의 해석을 두고 일본은 태라는 글자가 종종 태자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 369년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369년 무렵이면 백제 근초고왕 시대입니다. 그해 근초고왕은 고구려군 5천 명을 격파하고 371년에는 평양성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369년 근초고왕이 한강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황색은 전통적으로 황제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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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으로 볼 수 있죠. 이렇듯 황제국을 자처한 백제가 일본에게 칠지도를 만들어 바친다는 것이 맥락상 어울리지 않고, 칠지도에는 그것을 후세에 널리 알리라는 식으로 나열됩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내리는 명령인 것이지, 명령을 받으며 이런 말을 할리는 만무합니다. 어쨌든 그간 369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점이 정설로 굳어졌지만 학계에서는 주목하지 않던 연구가 40년 전에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1981년 일본 NHK가 칠지도에 대해 X선 촬영을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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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글자가 발견됐습니다. 그간 명문의 앞부분인 ‘태O 4년 5월 16일 병오’에서 연자와 월자 사이에 그간 판독했던 오자가 아니라 십자가 보인 겁니다. 1996년 일본에서 발간된 ‘칠지명문도록’에도 십 밑에 일자가 보이는데 한마디로 칠지도는 5월이 아니라 11월에 제작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이 새로운 글자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제작 월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병오를 함께 본다면 369년 5월 16일은 병오여야 하지만 이 시기는 병오가 아니라 을미입니다. 하지만 일본 학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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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에 제작했어도 길일인 ‘5월 병오’에 주조했다고 새기는 경우가 있다며 단지 운수 좋으라고 새겨 넣은 문구인 ‘길상구’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줄기차게 주장한 369년 제작, 372년 헌상설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일본은 3세기부터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발전했었고 한반도 일부 지역은 일본이 지배했었으므로 원래 일본 땅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기를 썼던 일본. 칠지도를 이용한 임나일본부설을 깨는 가장 논리적인 주장은 아마도 백제 근초고왕 시기의 상황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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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은 371년 정예병 3만 명으로 평양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살해하고 중국에 식민지까지 건설한 백제 최대 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입니다. 당시 일본은 고작 국가 형태를 갖춰가는 후진국이었는데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이 일본을 황제로 모시며 이에 대한 징표로 칠지도를 바친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상식적이지도 않죠.

특히 바쳤다면 왜왕을 높이는 존칭을 썼을 테지만 그런 내용은 명문 어디에도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맞지도 않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느니 진심으로 사죄하고 사과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요?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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