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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 놓친 세계적인 인재” 천재 과학자 ○○○가 한국에 오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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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의 이론 물리부장이자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벤저민 리는 6월 16일 일리노이 주 키와니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참사를 당했다. 그는 콜로라도 아스펜에서 열리는 페르미 연구소 자문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이었다. 벤저민 리는 소립자 물리 이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물리학자였다.”

1977년 6월 16일, 미국 일리노이 주를 달리던 한 덤프트럭이 갑자기 술에 취한 듯 중심을 잃더니 중앙 분리대를 넘어 반대편 차선을 침범합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36톤 덤프트럭을 예상치 못한 반대 차선의 승용차는 그대로 덤프트럭과 충돌하고 말았고 승용차 운전자는 즉사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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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승한 가족들은 무사했으나 운전자가 사망한 이 사고는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과학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운전자는 핵무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가 직접 스카우트한,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 이휘소 박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국 한국의 핵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살갗을 찢어 핵 개발 문서를 봉합하여 극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사고가 미국 정치권이 한국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은 현재까지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는데요. 오늘은 이휘소라는 과학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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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월간조선>은 한때 한국 대통령으로 재임하기도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담아 ‘박근혜 증언 : 아버지의 죽음과 핵 개발’이라는 기사를 냈습니다. 당시 그녀는 “청와대에서 있었던 핵 개발에 대한 논의 내용을 미국이 우리 측에 들이대면서 핵 개발 포기를 종용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도청이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알아냈을까?”라며 큰 여운을 남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사실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사망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을 것이란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죠. 만약 실제로 미국이 배후였다면 그의 죽음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던 그의 계획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소스라치게 두려워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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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은 CIA 기밀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 중앙정보국 CIA는 2005년 그간 국가기밀로 보관하던 1978년 6월에 작성된 보고서의 기밀을 해제했습니다. 보고서의 원제는 ‘한국 : 핵 개발과 전략적 의사결정’인데요. 미국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는 CIA가 작성한 보고서인 만큼 한국의 핵 개발사가 모두 담겼습니다.

보고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890 프로젝트’라 불리던 작전을 직접 승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90 프로젝트의 핵심은 국방과학연구소장 책임하에 미사일 팀, 핵탄두 팀, 화학탄두 팀을 구성해 북한으로 쏘아 올릴 핵을 개발하는 것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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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당시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는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미국이 갑자기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시도했던 핵 개발 때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1976년 “핵 개발을 중지하지 않으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중단할 것”이라고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한국의 1차 핵 개발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CIA가 한국의 핵 개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1년 전, 미국이 한국에 핵 개발을 당장 중지하라고 협박한 시기에서 1년 뒤 사망한 이휘소는 실제로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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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에 대해 살펴봐야겠습니다.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이휘소 박사를 두고 혹자는 그가 교통사고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쓴 논문 덕분에 7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으니까요. 아마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물리학자, 화학자, 수학자, 생물학자를 전부 다 거론해도 이휘소 이상의 이름값을 가진 인물은 등장하기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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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값은 김진명 작가가 1993년에 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 덕분에 높아졌습니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인 이용후는 이휘소를 롤모델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을 위해 비밀리에 핵 개발을 진행하다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인물로 묘사됐죠. 이휘소의 가족은 이는 사실이 아니며,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판결은 ‘내 이름과 사진을 상업적으로 쓰지 마세요’라고 요약할 수 있는 퍼블리시티권에 대한 국내 최초의 판결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이휘소는 핵 개발을 완전히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가 창피해 얼굴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말할 만큼 한국의 정치 체제에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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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명 ‘벤저민 휘소 리’, 이휘소라는 이름이 미국 과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그가 석사 학위를 받은 해인 1957년쯤입니다. 피츠버그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석사 학위를 마치기도 전에 박사 과정 자격시험을 치렀는데요. 이 시험에서 그는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93점이라는 점수를 받았는데, 이는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아야 받을 수 있는 점수였습니다. 심지어 2등과의 총점 격차가 무려 20점 이상 벌어졌죠.

이렇게 높은 점수는 대학 물리학과 창설 이래 최고의 성적이었고, 이는 곧장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당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 오펜하이머는 그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그의 시험지를 직접 읽어 본 후 그에게 사람을 직접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사 과정도 마치지 않은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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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인류 역사에 핵폭탄을 등장시킨 인물입니다. 직접 핵무기를 개발하지는 않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핵폭탄 3개 중 ‘가제트(플루토늄 핵폭탄)’는 실험용으로 쓰고, ‘리틀보이’와 ‘팻맨’을 일본에 투하하기로 한 인물이죠.

우리는 그를 핵무기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전쟁을 끝내려면 핵무기를 실전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말 한마디로 인류사에 핵무기를 등장시켰으니까요. 오펜하이머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원장,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페르미 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약 21년, 이휘소와 약 7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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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는 아인슈타인과 벤저민 리 두 사람을 뛰어난 과학자로 기억한다. 두 사람 중 더 뛰어난 사람을 꼽으라면 벤저민 리를 꼽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각에서는 “내 밑에는 아인슈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슈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라고 말했다는 보도도 있는데요. 이 말에는 약간의 과장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3명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생이고, 오펜하우어는 1904년생, 이휘소는 1935년생이니 오펜하우어가 자신보다 25살 많은 대선배에게 ‘내 밑에 있었다’와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휘소는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비밀리에 한국에 핵기술을 전해졌을까요? 이는 명백한 허구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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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휘소는 핵물리학자가 아닙니다. 입자물리학자였습니다.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최소의 알갱이, 즉 소립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죠. 그의 영결식 당시 페르미 연구소장이었던 로버트 윌슨은 “그는 근대 이론 물리학자 20인을 거명할 때 반드시 포함해야 할 인물”이라고 애도했습니다. 게이지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압두수 살람은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라며 그의 공적을 널리 알리기도 했는데요.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소립자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반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학 공식이 적용됩니다. 이 계산식을 당시의 슈퍼컴퓨터에 입력하면 3년이 지나야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휘소는 이러한 식을 불과 몇 시간 만에 계산해서 답을 낼 정도였습니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두뇌를 가진 천재 물리학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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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구 성과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미지의 입자에 최초로 ‘힉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빅뱅 이후 우주의 모든 물질은 12개 기본 소립자와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4개의 소립자, 그리고 모든 물질의 질량을 부여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힉스 입자 등 모두 17개의 소립자로 구성됐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이론입니다. 그간 16개의 소립자는 모두 발견됐으나 힉스 입자만은 흔적을 찾지 못해 ‘신의 입자’를 불렸는데요. 이휘소가 ‘힉스’라고 부르기 시작해 현재 모든 이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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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업적은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라는 논문을 발표해 현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으로 불리는 ‘와인버그-살람-글래쇼’의 이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이휘소가 논문을 쓰기 전까지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는데요. 이를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죠. 해당 논문을 쓴 3명의 저자는 1979년 이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요. “우리가 받은 노벨상은 이휘소에게 갔어야 할 상이다”라는 수상소감으로 공을 이휘소에게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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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업적은 ‘참 입자’를 발견해 질량의 범위를 예측할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1974년 ‘참 입자들의 탐색’이라는 논문을 통해 참 입자를 찾아내는 방법과 성질 등을 예측했는데요. 몇 달 뒤 이들의 결합 상태인 차모니움이라는 새로운 소립자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입자 탐색 연구를 통해 이론을 현상화한 물리학의 대가로 알려지며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인정받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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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사실이 소설과 다른 두 번째 이유는 이휘소가 한국의 정치 체제에 진저리를 쳤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 개발에 대한 의지는 이휘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를 한국에 데려오고 싶어 했습니다. 그를 데려올 수 있다면 60만 대군 전부를 그의 경호를 위해 쓰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기까지 했습니다.

이휘소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아이들 취미를 알았는지 한국 우표와 전통 무용책을 보내왔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과학자의 자녀 취미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건 정보 조직이 가담해 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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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휘소 역시 조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있었습니다. 1971년 그가 캘리포니아 공대의 교환 교수로 재직했을 당시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의 정근모 부원장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때 정근모 부원장은 이휘소가 가난한 한국을 위해 한국에 물리학 뿌리를 내려 어떻게든 조국을 돕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근모는 그에게 한국에서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휘소 역시 3년 전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는 했지만 조국에 도움을 주고 싶었던 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요. 그러나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을 상대로 승리한 박정희에 대한 반대 시위를 저지하고자 정부가 군병력을 투입하고 위수령을 발동한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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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식을 접한 그는 즉각 한국 방문 계획을 전면 철회하는데요. “하계 물리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라며 유신 독재에 대한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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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카이스트 교수로 부임하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었지만 유신 독재 정치에 실망하여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를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던 인물들은 그에게 ‘정권과 학문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완강한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죠. 결국 그는 1977년 6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석연치 않은 사고로 42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각오를 다졌던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한국에 오지 못한 것도 너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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