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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14세기 선박을 끌어올렸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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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카리브해에서 충격적인 뉴스 하나가 타전됐습니다. 보물선이 발견됐다는 뉴스였는데요. 선박명은 ‘산호세호’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함대에 속했던 이 배는 1708년 6월 콜롬비아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싸우다 카르타헤나 앞바다에 침몰했습니다. 당시 배에는 스페인이 중남미 식민지에서 끌어모은 20조 원의 보물을 싣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죠.

그런데 이 보물선이 발견되자 콜롬비아는 물론 스페인과 볼리비아, 민간 인양업체들까지 각자의 지분을 주장하며 국제분쟁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콜롬비아 정부는 추후 침몰선 잔해와 보물들을 카르타헤나로 옮겨 전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희망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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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얼마 전 콜롬비아 해군이 영상을 하나 공개했습니다. 콜롬비아 해군이 카메라가 달린 수중 장비를 달고 수심 900m 아래에 있는 산호세호의 모습을 근접 촬영한 것으로, 영상 속에는 반짝이는 금화와 정교한 무늬의 도자기, 옛 대포 등 무수한 보물들의 모습이 담겼죠. 마르타 루시아 라마레스 콜롬비아 부통령은 전문가들은 최소 200톤의 금과 은, 에메랄드가 있다고 추정한다며 보물의 가치는 17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전했죠.

이렇듯 지금도 잊을 만하면 전 세계 곳곳에서 바다에 침몰한 보물선 이야기가 종종 들려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보물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돈스코이호처럼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보물선이 아니라 어부들이 물고기 대신 도자기를 건져 올리며 존재가 드러난 진짜 보물선,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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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에서 서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는 증도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근방에는 예로부터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큰 보물선이 침몰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겨난 것도 우연은 아닌데 왜냐하면 조업에 나섰던 어부들의 그물에 깨진 청자, 나무토막 같은 것들이 심심치 않게 끌려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부들은 나오라는 고기는 안 잡히고 재수 없는 것만 나온다며 그대로 바다에 버리기 일쑤였죠. 그나마 원형이 온전한 그릇이라도 나오면 집 앞마당에 두고 개밥그릇이나 재떨이로 사용했는데요. 그러다 1975년 8월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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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고기를 잡아 온 최평호 씨는 결국 자신도 어부가 되었는데 8월 20일 만선의 꿈을 안고 중도 부근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물에 온전한 형태를 갖춘 그릇 6점이 끌려 나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푸른색도 있고 하얀색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릇이 예뻐 보였던 그는 버리기는 아까워 이들을 챙겨 마루 밑에 보관해 두었었죠.

그러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생이 집을 방문하자 이 그릇들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동생의 눈에 이들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군청에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동생의 제안에 최평호 씨는 신안군청에 청자와 백자 인양 사실을 알렸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선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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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이들은 중국제 청백자이며, 송나라, 원나라 시대의 것임을 확인했는데 문제는 비밀이 지켜지지 못하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문화재관리국이 이 청백제가 발견된 해역에 대한 조사와 보존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는 수중 유적을 조사해 본 전문가도 없었고, 잠수를 위한 장비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모든 보물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소문은 전국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당연히 도굴꾼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는데요. 바다에 가라앉은 보물섬과 도굴꾼, 어쩌면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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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이 신안선 발굴은 국가사업으로 발전했는데 뜻밖에도 도굴꾼이 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신안선의 도굴사건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1976년 10월입니다. 도굴꾼 8명이 9월 1일부터 9일까지 청자 화병 등 122점을 인양했으나 신고하지 않고 밀매를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3명이 검거된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5명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는데요.

물주 2명이 보도를 보고 잠수부를 고용해 도굴한 유물 중 일부를 팔아치우려다 덜미를 잡힌 것이죠. 그러고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들이 1976년 7월부터 9월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무려 230점을 인양해 골동품상에 팔아넘겼고, 골동품상은 그중 27점을 부산의 한 사업가에게 1,240만 원을 받고 팔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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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대검찰청에 따르면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수사 끝에 3개 조직 13명의 도굴꾼과 취득자를 입건했고 311점의 유물을 회수했는데요. 당시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송나라, 원나라 시대의 도자기가 완전한 모습으로 바다에서 인양된다는 것은 일반인이 듣기에도 가슴 뛰는 뉴스였을 겁니다.

신문 기사에서 이런 제품이 1억 원에 거래된 적이 있다 하니 오히려 전국의 도굴꾼에게 보내는 초청장이 되어버렸고 문화재관리국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죠. 도굴꾼이 검거되면서 비로소 발굴의 필요성을 절감한 문화재관리국은 부랴부랴 ‘신안 해저 발굴조사단’을 꾸린 후 해군 소속 심해 잠수사들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수중 발굴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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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발굴에 나선 그 누구도 얼마 뒤 자신들이 발견하게 될 유물의 규모를 가늠하지 못했죠. 그렇게 1, 2차 예비조사에서 무려 5천 점이 넘는 도자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직후 수심 20m에 선체 28.4m, 폭 6.6m의 선박이 발견됐는데 그야말로 보물선입니다. 침몰선은 발굴 당시 총 720조각으로 나뉘어 인양됐는데, 어느 정도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술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조사단은 신안 침몰선의 제작 기술과 나무의 원산지, 선용품 등을 토대로 이 배가 14세기 일본으로 향하던 중국 무역선으로 추정했습니다. 또한 인양된 목간의 글씨를 통해 1323년 원나라 지배하에 있던 현재 중국 저장성 동부 도시 영파에서 무역품을 싣고 일본의 하카다와 교토로 향하던 무역선이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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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 칼코 등 일본 유물 20여 점도 함께 발견되면서 당시 동북아 삼국에 교류 상황을 추론할 수 있었죠. 1984년까지 11차례 발굴 끝에 드러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총 23,502점의 유물, 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나왔죠. 이는 단독 유적에서 수습한 유물로는 세계 고고학 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특히 발굴된 도자기는 청화와 백자를 비롯한 모든 종류가 모여 있어 마치 중국 도자기의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중세 해상 무역의 비단길과 견주어 ‘도자기의 길’이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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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장 놀라운 것은 단연 동전이었습니다. 무려 800만 개, 무게로 28톤이 발견됐으니까요.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동전이 실려있었던 것일까요? 일각에서는 배의 균형을 잡으려고 실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배의 균형이나 잡기 위해 이 많은 동전을 실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가장 수긍이 가는 주장은 청동 대불 조성을 위한 재료였다는 주장입니다.

원나라의 주요 화폐는 지폐였고, 동전이 통용된 것은 딱 두 번입니다. 1310년 발행된 지대통보와 대원통보였죠. 이 두 동전이 신안선에서 확인되어 신안선의 침몰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됐는데 그마저도 원나라 조정은 발행 1년 만에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연대 추론이 가능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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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제 사용 가치도 없는 동전이 원나라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됐는데 다만 외국과 무역 때는 이를 교환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결국 신안선에서 발견된 28톤의 동전은 일본과 교역을 위해 사용됐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청동 대불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일본은 8세기 후반부터 동 생산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10세기 중반에는 일본 최대 광산인 ‘나가노보이 동산’이 폐광했습니다. 이에 따라 동 생산량은 지속적으로 낮아졌으나 수요는 폭발했죠.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서 불교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불교의 핵심은 불상입니다. 불상을 만들기 위해 동 수요가 폭발한 겁니다. 일본의 3대 대불로 아스카 대불, 나라 대불, 가마쿠라 대불을 꼽는데 약 1252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가마쿠라 대불은 납 성분이 어마어마하게 높습니다. 무려 30%에 육박하죠. 이건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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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을 분석해 보니 납 성분이 약 30%였던 겁니다. 즉, 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한 것이죠. 그렇다면 125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121톤의 가마쿠라 대불이 원나라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아무도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 수 없어 추측과 주장만 제기할 수 있을 뿐이죠. 보물선은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가 있는지, 어떻게 바다에 가라앉았는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혹은 도굴꾼 같은 이야기가 더 관심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배가 어떤 역사적 가치를 가졌는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역시 보물선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유물이라고 부르는 이 맞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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