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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모르는 사이 도둑맞은 땅, 어쩌다 ‘이곳’은 러시아 영토가 됐을까?

  • 이슈

모든 국가의 국경이 확정된 2022년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해결되지 못한 영토 분쟁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특히,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에서는 무려 10개 이상의 장소에서 국가 간 영토 분쟁이 은밀하지만, 치열하게 진행 중인데요.

일본과 러시아 간의 ‘쿠릴 열도 분쟁’, 일본과 중국의 ‘센카쿠 열도 분쟁’, 중국과 동남아시아 간 ‘남중국해 분쟁’ 그리고 일본이 억지로 국제사회로 끌어가려는 ‘독도 분쟁’까지 타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치열한 영토 분쟁이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빈번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계략으로 중국에 빼앗긴 ‘간도’만큼이나 소중한 영토가 하나 있습니다. 이 영토는 중국의 계략으로 러시아에 빼앗기고 말았는데, 그 면적이 여의도 4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러시아가 절대로 돌려주지 않는 한국의 마지막 영토, ‘녹둔도’를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적군이라도 그 적군이 너무나 경이로울 때는 그가 죽은 후에도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이 그렇습니다.

일본의 해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 영웅으로 꼽히는 ‘사토 데쓰타로’라는 인물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장수는 이순신이다. 영국의 넬슨 제독의 명성이 아무리 높다지만, 인격과 천재성에서 이순신에 필적할 수는 없다.”라며 1926년 ‘조선지방행정’이라는 월간지에 ‘절세의 명해장 이순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격파시킨 유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제독 ‘넬슨’보다도 이순신 장군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인데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땅에 살았다는 것 자체로 전설”이라 불렸던 이순신 장군을 너무나 존경한 몇몇 일본인들은 한때 주기적으로 통영의 ‘충렬사’를 찾아 그에게 예를 갖추고는 했는데요. 이러한 내용이 1977년 10월, 일본에서 발행된 월간지 ‘아시아 코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 아는 분이 많지 않은데, 그곳이 바로 러시아에 빼앗긴 땅 ‘녹둔도’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1587년 선조 20년, 국토 최북단 국경선의 녹둔도는 추수기를 맞이해 여진족이 침입해 국민을 납치하고 말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지역은 두만강에 가까웠기 때문에 토지가 비옥해 농사를 짓기에 훌륭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는데, 1587년은 그 어느 해보다 풍년이 들었습니다.

이를 노린 여진족은 추수철을 맞아 기습적으로 침입했고, 조선군 병사 10여 명이 전사하고 백성 160명이 여진족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그때 이 섬의 수비대장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었는데, 뒤늦게 여진족의 침입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몇 안 되는 군사를 데리고 추격에 나서 적장 3명을 배고 백성 60여 명을 가까스로 구출했는데요.

그런데 당시 함경도 지역 군대 총사령관을 맡았던 ‘이일’은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묵살한 죄를 피하고자, 이순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이순신을 잡아다 가두고는 조정에 징계 여부를 물었죠.

‘선조실록’ 21권에 따르면 선조 임금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로 하여금 장형을 치게 한 다음,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라고 하명했는데요. 큰 벌을 받을 뻔했지만 선조 임금 덕분에 간신히 처벌을 면했고, 이듬해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 사면받게 되는데요.

당시 나이 마흔셋이었던 이순신의 생에 있어서 이 ‘녹둔도 전투’는 중요한 변곡점이 됐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1987년 당시, 이순신은 변방의 하급 무관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선조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라고 규정했다면 임진왜란에서 귀신같은 전공을 세운 그의 존재는 없었을 겁니다.

위 일화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녹둔도는 명백한 조선의 땅이었다는 점입니다.

녹둔도가 처음 우리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세종실록으로, 세종은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해 길이 1,246척, 높이 6척의 녹둔토성을 쌓고 목책을 둘렀습니다. 즉, 조선의 최북단 기지였죠. 현재로 따지면 함경북도 경흥에 있는 작은 섬인데요.

전진 기지였기 때문에 병사를 제외한 농민은 섬에 거주할 수 없었고, 봄가을 춘경 추수기에만 출입이 허가됐죠. 그런데 조선의 영토였던 녹둔도는 어쩌다 러시아 땅으로 편입된 것일까요?

1860년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현재 러시아 땅으로 알고 있는 극동 지역의 연해주는 한때 발해의 영토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조국을 잃은 우리 조상들이 망명했던 곳이며, 현재는 한반도와 국경을 맞댄 곳입니다.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 배경에는 청나라와 영국 간 ‘아편전쟁’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청나라는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5개의 항구를 개항하게 됐는데, 영국은 무역 확대를 요청하며 청나라를 더욱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청은 과도하다며 영국의 요청을 거절했고, 결국 제2차 아편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이때도 패배한 청은 영국과 ‘톈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청과 영국의 톈진 조약을 중재해주었고, 그 대가로 청과 러시아 사이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죠. 이 조약으로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가 전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됩니다. 이 기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가져간 영토가 10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한반도의 5배이자, 러시아 전체 영토의 6%가 되는 광활한 땅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녹둔도가 포함되면서 하루아침에 러시아와 한반도는 국경을 접하게 되는데요.

당시 조선은 이 베이징 조약을 알지 못했고, 녹둔도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무려 29년이 지난 후에야 고종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청나라에 항의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상당한 자료가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조선의 주장은 번번이 무시되었죠. 심지어 1937년에는 스탈린 정부가 녹둔도에 거주 중이던 조선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후 이곳에 군사 기지를 건설했고, 이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이들이 바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흩어진 ‘고려인’입니다.

군사 기지를 건설했지만, 접근을 금지한 탓에 녹둔도는 풀만 무성한 땅으로 변해버렸죠. 사실 녹둔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것은 수없이 많은 지도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섬이되 섬이 아닌 탓에 조금씩 다르게 표시되어 있을 뿐이죠.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해도로 그리고 있고, 1754년에 제작한 ‘비변사 지도’는 이를 두만강 하구의 삼각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175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는 녹둔도를 육지화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각 지도마다 섬으로 그리거나 삼각주로 그리거나 육지처럼 그려지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녹둔도의 독특한 지형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홍수로 두만강이 범람하게 되면 여름에는 수로가 넘치면서 물에 잠기거나 습지가 됩니다. 수로가 막혀버리면 섬처럼 보이고, 장마철이 지나면 길이 보이기 때문에 육지에 붙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녹둔도는 조선의 영토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북한의 영토입니다. 그래서 지난 1984년 11월, 북한과 소련은 국경 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었지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역시 1990년,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정부 차원에서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죠.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북한과 국경을 맞닿은 탓에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러시아는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대통령이 이끌고 있어 반환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빼앗긴 우리의 소중한 영토인 만큼 이 녹둔도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야 할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돌려받아야 할 한국의 마지막 땅, 녹둔도가 한국 지도 속으로 반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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