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쇠젓가락을 사용한 덕분에 발달한 세밀함, 그 세밀함에 더해 DNA에 촘촘히 박힌 성실함은 한국인을 세계에서 가장 성실하고 두뇌 좋은 민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자신감 덕분일까요? 한국은 전 세계에서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유일한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는 유대인을 게으르다고 놀릴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죠. 아주 작은 영토를 가진 한국인들이 가진 독특한 면모입니다. 사실 한국인, 아니 한국인의 피를 가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인정받습니다.
얼마 전 독일 방문 당시, 가이드에게 들은 바로는 독일의 스타벅스에서 가장 인기 많은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하는데, 성실하고 똑똑하고 일 처리가 유능하다는 것이 이유라고 했죠. 하지만 20세기에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될 국가적인 위기를 수차례 겪으면서 민족이 전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인 DNA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뿌리내린 곳에서 더 열심히 살며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여기 비록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미국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한 연구소가 3개월이나 소장직을 비워두고 모셔가려던 한국인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천조국, 세계 최강대국 등으로 불리는 미국은 국방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세계 최고로 꼽힙니다. 그런데 역사가 고작 200년 조금 넘은 미국이 이렇게 세계 최강 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가진 독특한 이민정책 덕분입니다. 물론 노벨상이라는 타이틀이 모든 영광의 지표는 아니겠지만, 미국 정책재단이 202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01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이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는 총 311명입니다. 세계 최고 과학자들이 미국에 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놀라운 결과가 드러납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35%인 109명을 미국인이 아니라 미국으로 망명한 이민자 또는 난민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순수 미국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고위직 또는 상류층에는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이민자 출신의 외국인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미국의 과학계는 이민자가 이끌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핵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엔리코 페르미’는 이탈리아에서 탈출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고,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아인슈타인’ 역시 히틀러로부터 ‘유대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핍박받자 ‘프린스턴대’ 교수직을 얻어 미국에 망명했죠.
이런 과학자들의 힘을 깨달은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과학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는데요. 1965년, 이민-국적법 개정을 통해 국적 할당제를 폐지시켰고, 1990년 이민법 개정으로 직업 선택이 가능한 ‘그린카드’ 수를 크게 늘려 외국인 과학자들의 취업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우수한 인재는 미국인으로 만들자는 취지 아래 추진한 개방적 이민정책은 노벨상 수상자의 증가를 불러왔습니다. 1901~1959년, 21명이던 이민자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1960~2021년 88명으로 4백 이상 증가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렇겠지만 과학을 중시하며 과학자 우대 정책을 펴는 미국에는 ‘미국의 자존심’이라고 부를 만한 몇몇 연구소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벨 연구소’가 그렇습니다. 1925년, 미국의 통신업체 ‘AT&T’의 사장 ‘월터 기포드’가 세계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서 설립했는데, 설립 이래 3만 개를 훌쩍 뛰어넘는 특허와 10명이 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그야말로 ‘노벨 과학상의 산실’이라는 독보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1996년, ‘AT&T’가 3개 회사로 분할되면서 벨 연구소는 통신장비 제조업과 함께 ‘루슨트테크놀로지’ 산하로 편입됩니다.
어쨌든 과학 기술의 발전사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발명으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연구기관인 ‘벨 연구소’가 오랜 전통을 깬 것은 2005년입니다. 왜냐면 역대 최연소이자, 사상 최초로 외국인을 소장직으로 발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이 45살, 한국인 김종훈입니다. 절대 외국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의 대명사 ‘벨 연구소’가 선택한 최초의 외국인 소장입니다. 사실 한국 이름을 가진 그를 외국인 소장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중국적자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을 따라 15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너무 가난한 한국에서 희망을 볼 수 없었던 그의 부모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민을 떠나 미국의 메릴랜드주 빈민가에 정착했습니다.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는 했지만, 15살의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언어가 큰 문제였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습니다. 여기에 학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주방보조, 신문 배달 등 가리지 않고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요. 그는 가난을 탈출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부라는 생각에 하루 2시간만 자며 주경야독했고, 이러한 습관은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괴물처럼 공부한 그는 전교 2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해 존스 홉킨스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는데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최고의 통신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미 해군 장교로 임관해 핵잠수함 등에서 7년간 근무합니다. 미 해군은 해상 근무와 육상 근무를 번갈아 하는데, 워싱턴에서 육상 근무를 하면서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존스 홉킨스 기술 경영학 석사를 땄고, 메릴랜드대학에서 ‘신뢰성 공학’이라는 독특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보통 4~6년 걸리는 박사 학위를 그는 만 2년 만에 취득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전설 같은 스토리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박사학위 취득 직후, 그는 32살에 그의 딸 이름을 딴 ‘유리시스템즈’ 벤처 회사를 창업했는데요. “네가 지으면 그들이 올 거야”라는 영화 [꿈의 구장]의 대사를 떠올리며 설립했고, 여러 고난을 넘어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가도에 오르자 더 큰 회사로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회사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외형이라고 보고, 그는 당시 필요한 공간의 4배가 넘는 건물을 집과 신용을 담보로 구했고, 이후 ‘윌리엄 페리’, ‘제임스 울시’ 등을 이사로 영입했는데, 윌리엄 페리는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이고, 제임스 울시는 전 CIA 국장입니다.
당시 그는 통신 기술 장비에 주목했는데, 창업 당시 “내가 가진 건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뿐이다.”라고 공언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네트워크 간 통신이 가능한 통신장비를 개발해 상용화했습니다. 그리고 이 제품이 대박을 터뜨렸죠. 이 통신장비 덕분에 그는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한 최고의 상장기업이 됐고, 그가 39살이 되던 해에 이 회사를 10억 달러에 ‘루슨트 테크놀로지’에 매각하면서 포브스 선정 ‘미국 400대 갑부’로 선정됐습니다.
위 사실만 놓고 보자면 단순히 갑부라는 타이틀로 불리겠지만, 그의 능력을 먼저 알아본 것은 ‘벨 연구소’입니다. 2005년, 그가 연구소 소장직으로 발탁되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it 업계가 발칵 뒤집혔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 45살이었으므로 사상 최연소 소장이자, 연구소 사상 최초 외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는데, ‘보수적인 미국 연구소가 설마…’라는 의심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사상 최연소, 역대 최초의 외국인 소장으로 임명하면서 벨연구소가 기대했던 것은 연구 문화입니다.
2005년, 그가 부임할 당시에 벨 연구소는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죠. 과거 기술혁신을 벨 연구소가 주도했지만, 이런 혁신을 이제는 소규모 벤처기업들이 주도하고 있으니 예전의 명성을 되찾자는 것이 목표였는데요. 그런데 그가 소장직을 부임한 것은 2005년인데, 그가 벨 연구소 소장직을 제의 받은 것은 이미 4년 전, 2001년입니다. 위에서 ‘유리시스템즈’를 ‘루슨트 테크놀로지’에 매각했다고 전해드렸는데, 당신 루슨트의 ‘헨리 샤키’ 회장은 그를 연구소장으로 앉혀 벨 연구소의 혁신을 주입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종훈은 “아직 그런 어마어마한 자리를 맡기에 자격이 많이 부족하다.”라며 거절했는데, 벨 연구소 역사상 소장 자리를 사양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고 하죠. 이후로도 헨리 샤키 회장은 3개월간 소장직을 비워둔 상태로 그에게 구애를 보냈으나 결국 설득시키지 못했고, 그는 메릴랜드대 교수로 부임합니다. 만약 그가 2001년에 부임했다면 41살에 나이로 부임한 역대 최연소 벨 연구소 소장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 4년이 지나 2005년, 새로 부임한 ‘패트리샤 루소’ 회장이 다시 그에게 연구소장 제의를 보냈고, 심사숙고 끝에 수락했는데요.
그는 부임하면서 뛰어난 인력, 첨단 연구시설, 일하는 문화라는 3가지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또한 “연구소의 연구는 연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실용성을 갖춰야 한다.”라며 연구와 기술을 접목시키기 위해 시장에 즉시 투입 가능한 벤처팀을 구성해 연구소를 다시 살려냈습니다. 그의 부임 1년 뒤 2006년,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김정훈이 계속된 구조조정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벨 연구소를 수익성 높은 상업 기술 개발 센터로 바꿔놨다.”라고 보도하며 “그가 후퇴 중인 연구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김종훈이라는 이름은 여러분들도 익숙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때 한국 정부의 장관 후보자로 떠올랐던 인물이니까요.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전 인수위원회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로 김종훈을 추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정치 싸움에 지쳐 후보자를 사퇴했지만, 저는 시간이 지나서 그때 얼마나 아까운 인재를 놓쳤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15살에 이민을 떠나 얻게 된 미국 국적으로 이중국적 논란에 휩싸이자 미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자신이 진짜 사랑한 벨 연구소를 포기하고 한국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장관 후보자를 수락했습니다. 당시 통합진보당의 한 의원은 그가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설립한 ‘인큐텔’ 창립에 관여한 이력을 두고, ‘한국말 잘하는 미국인’이라고 비난을 쏟아붓기도 했는데요.
결과적으로 중도하차했지만, 당시 그는 큰 결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경우, 평균 5년 동안 소득세 납부액이 1억 6,000만 원을 넘거나 또는 순자산이 22억 원 이상인 미국 시민이 국적 또는 영주권을 포기하면 국적포기세 부과합니다. 그 당시 재산 1조 원가량을 환산했을 때 미국의 납부해야 할 국적포기세는 족히 1,000억 원을 넘었는데, 그는 “얼마가 되든 다 내고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일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를 향한 다양한 의혹이 제기됐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참을 수 없다.”라며 결국 장관 후보자에서 사퇴했는데요.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이제 한국에서 기업 활동이나 정치 활동할 계획이 없음을 못 박고 미국으로 떠났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는 최순실 등의 비선 실세가 드러나면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적어도 김종훈 후보자의 사퇴만큼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과학 분야에서만큼은 큰 도약을 이루어낼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짙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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