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충격 반전… 현종이 후궁 두지 않았던 이유가 왕비 명성왕후의 ‘OO’ 때문?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조선시대 후궁을 두지 않았던 왕 현종”

현종은 조선 제18대 왕으로, 효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아버지 그리고 영조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는 아버지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병자호란의 패배로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으며, 이로 인해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하게 됩니다. 현종의 이름은 이연, 자는 경직이며 어머니는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입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1646년에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봉림대군은 왕세자에 오르게 되고 현종은 9살의 나이에 왕세손이 됩니다. 그리고 1649년, 할아버지인 인조가 승하하면서 아버지인 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인조의 삼년상이 끝난 후인 효종 2년, 당시 왕세자였던 현종은 11살의 나이로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입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현종은 조선에서 왕세손, 왕세자, 왕으로 이어진 정상적인 왕위 계승 절차를 거친 몇 안 되는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통성을 가진 현종은 인지도가 거의 없었기에 단명한 왕으로만 기억되지만, 실제 재위 기간은 15년으로 기간 자체가 결코 짧지 않은 왕이었습니다.

아버지 효종이 어의의 의료사고로 인해 갑자기 승하하자, 현종은 1659년 1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그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 예송논쟁은 현재 한국사에 언급될 정도로 당시 중요한 정국의 이슈가 됩니다.

현종이 즉위하던 해에 일어난 1차 예송인 기해예송과 14년 후에 벌어진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은 효종의 계모인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효종과 인선왕후의 죽음에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이 논쟁의 핵심은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부모나 조부모는 이를 왕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자식의 죽음으로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인조의 둘째인 효종은 소현세자 죽음 후 새롭게 세자에 책봉되고,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소현세자 사후 그의 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인조의 뜻으로 동생인 둘째가 세자가 되고 왕이 되었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서인들은 왕도 성리학의 법인 주자가례에 따라 둘째이니 1년복이라고 주장하지만, 경국대전과 대명률에서 장남이든, 차남이든 1년복을 입게 한다는 내용으로 포장하면서 장렬왕후의 상복을 1년상인 기년설로 밀어붙이게 됩니다.

이에 남인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의 예와는 다르게 3년복인 참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서인들이 승리하면서 대왕대비 장렬왕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또한 현종 15년, 효종의 부인인 왕대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때 역시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에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장렬왕후의 복제를 놓고 2차 예송논쟁이 불붙게 됩니다.

리학의 예법인 주자가례에서는 맏며느리가 죽었을 때 시어머니는 1년 상복, 그 외 며느리는 9개월 상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서인은 이러한 논리로 장렬왕후의 상복을 9개월인 대공복으로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조선의 법인 경국대전에 며느리는 상관없이 1년이라는 것을 근거로 기년복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현종은 전에는 “지금의 법을 썼는데, 이제는 옛날 법을 쓰자는 것이니 논리의 일관성이 없다.”라며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물론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현종과 당시 신하들이 재위 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으며 비교적 심각한 정쟁을 평화적으로 풀어나갔기에, 이는 현종의 정치력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툼을 지켜본 현종의 아들 숙종은 자신의 입맛대로 집권세력을 바꾸는 환국정치를 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현종은 경신 대기근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순간을 넘긴 임금이기도 했습니다. 경신 대기근은 조선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과 1671년에 있었던 재난으로 임진왜란 때부터 살아온 노인들이 ‘전쟁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조선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1670년 한 해에만 지진, 역병, 냉해, 가뭄, 수해, 해충 등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재해가 일어났고, 조선 팔도는 모두 흉년이 들게 됩니다. 이때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어가게 되는데, 심지어 재상급 인사들마저 10여 명 이상 죽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현종은 대기근의 극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고, 대동법을 곡창지대인 호남 전역으로 확대 시행하게 되면서 국난 극복에 큰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외에도 현종은 수리시설과 양전사업에 힘쓰고, 호구 장악을 위해 오가작통사목을 제정하고 나라의 재정을 수습했으며, 동활자 10만 개를 주조하는 치적을 남깁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군사적으로는 북벌정책을 계승하지 않았으나 아버지 효종의 군사력 강화 정책을 이어받아 화포를 개량해 대량 생산하였고, 온천행 때마다 군사훈련을 시킬 정도로 군사력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의 개량이나 자명종 제작에도 힘썼습니다.

하지만 북벌이라는 커다란 목표가 있었던 아버지 효종과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를 이용한 환국정치로 알려진 숙종에 가려서 현종은 관심도나 존재감이 떨어지는 왕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심지어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무능하거나 심약한 군주로 기억되곤 합니다. 하지만 현종은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붕당정국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고, 효종에 이어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는 데 노력했으며, 경신대기근을 무사히 넘기는 등 치적을 제법 많이 남깁니다.

또한 2차 예송 당시에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효종의 위상을 장자로 확정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서인들의 기세가 대폭 꺾일 정도였고, 영의정 김수흥 같은 거물들도 군소리를 못 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현종은 후궁이 하나도 없이 부인인 명성왕후 김씨에게만 충실했는데, 금슬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왕비가 워낙 성격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현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후궁을 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명성왕후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숙종, 영조, 정조까지 다들 한 성격하게 됩니다.

현종은 화를 낼 때는 단호한 성격이었지만, 어려서부터 3명의 누나와 4명의 여동생이 있었던 가계 특성상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이었습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현종은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고, 왕세자인 숙종과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종 사후, 명안공주마저 숙종 13년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현종 이후 조선 왕조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현종 때 단절되었고, 왕족인 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이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현종은 몸이 병약하여 평생 고생했는데, 특히 피부병과 그로 인한 부스럼이 심하여 고름이 한 되나 나올 정도의 종기가 얼굴에 붙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현종은 재위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애용하게 되었고 심지어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고의 온천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674년 9월 17일, 현종의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학질과 과로로 인해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유텍스트 YouText 글로 읽는 동영상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