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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물 뜯자 발견된 종이 뭉치의 정체… “선조들의 솔선수범”

  • 지식

아마 사극을 좋아하시거나 적어도 조선시대 임금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한 편이라도 보셨다면 임금 뒤에 병풍이 있었다는 점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그림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을지 몰라도 조선시대 임금들은 항상 뒤에 병풍을 두고 있었죠. 바로 ‘일월오봉도’입니다.

5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가 그려진 이 그림은 특이하게 한국에서만 발견되는데, 해와 다른 ‘음양’, 즉 중전과 왕을 나타내고, 5개의 봉우리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5가지 도리를 상징합니다. 산봉우리 사이 폭포수가 내려와 바다를 이루는 것은 왕이 내리는 덕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며, 좌우의 붉은 소나무는 아주 상서로운 존재로서 백성을 비롯한 만물을 상징합니다.

쉽게 말해 일월오봉도는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함과 동시에 왕조의 영구 지속을 염원한다는 의미가 있는데요. 그림의 중앙에는 5개의 봉우리 중 가장 큰 산봉우리가 위치하고, 그 양쪽으로 각각 2개의 작은 봉우리가 배치됩니다. 해는 중앙 봉우리의 오른쪽 작은 봉우리 사이에, 달은 왼쪽의 작은 봉우리 사이에 떠 있도록 그렸죠.

일월오봉도는 항상 왕의 뒤에 세웠습니다. 이 그림의 중앙에 임금이 앉아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승하하시면 이 그림도 함께 매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데 몇 달 전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 병풍 뒤에서 상상도 못 한 의외의 종이 무더기가 발견됐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정부가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서 인재를 키우고 쓰는 문제는 국가의 장래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업무죠.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은 크게 2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혈통’, 또 다른 하나는 ‘능력’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사회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기준은 다르지만, 고대로 올라갈수록 ‘혈통’이 강조되고, 현대로 내려올수록 ‘능력’이 강조됩니다. 다시 말하면, 선진국일수록 ‘능력’을 강조하는 반면, 후진국일수록 ‘혈통’을 강조하죠. 단적으로 김씨 가문의 혈통을 중요시하는 북한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반도에 살았던 많은 왕조도 혈통을 중시했습니다. 불과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둘째, 또 그도 여의치 않으면 왕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적자를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 왕위 계승의 명분을 쌓았죠.

그러나 문제는 왕위와 혈통을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왕을 보좌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관료들조차 혈통을 중시했다가는 국가는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라도 그 아들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시대가 지날수록 ‘혈통’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는 트렌드가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한반도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과거 제도가 시행됐습니다.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 활성화된 이 과거제도를 두고 많은 학자들이 ‘조선시대 500년을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버지가 영의정이라고 아들이 영의정이 될 수 없었고, 아버지가 좌의정이라고 아들이 좌의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요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문관을 뽑는 ‘문과’든, 무관을 뽑는 ‘무과’든, 기술자를 뽑는 ‘잡과’든 과거시험에 통과해야 했죠. 폐해도 있었지만,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는 점에서 선진적인 제도였습니다.

현대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시험 제도는 많습니다. 공무원 시험, 경찰 시험, 외무고시, 행정고시 등등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하다못해 대학 입학을 위해서도 수능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경쟁률로 따지자면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현대의 시험은 비교가 되지 않는데요.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꽃이라는 문과 시험은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총 33명을 뽑았는데, 문과 시험의 평균 경쟁률이 2,000:1입니다. 보통 5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과거에 급제한 나이가 약 30~35세라고 하니,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감이 오시죠?

그런데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1차 과거시험인 초시에 응시한 응시자가 평균 63,000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정성 들여 작성한 시험지는 어떻게 됐을까요? 최소 63,000장의 답안지가 제출됐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합격한 응시자에게는 답안지를 돌려주었고, 불합격한 응시자에게는 답안지를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 돌려주지 않은 시험지를 그냥 불태워 버렸을까요? 그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우리 조상들은 조선시대부터 재활용에 눈을 뜨신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일월오봉도 뒤에서 발견된 종이 무더기가 바로 이 답안지였으니까요.

지난 1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 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인정전의 용상 뒤 ‘일월오봉도’를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접지로 1840년 과거시험 탈락자의 답안 종이가 대거 사용된 것을 찾아냈다.”라고 밝혔습니다.

일월오봉도는 보통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설치되는데,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선정전 등 왕의 집무 공간에 설치했습니다. 인정전의 일월오봉도는 가로 436cm, 세로 241cm의 4폭 병풍으로, 그간 인정전을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하면서 바깥공기가 드나들어 손상이 시작됐는데요. 그림 전체에 오염과 탈색이 발생했고, 청색 안료가 대부분 변색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풍틀이 들떠 벌어지는 등 손상이 심각했죠.

그간 1964년, 1983년, 1997년, 2004년, 2012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했지만, 2005년 문화재청이 열악한 보존 상태를 제기하면서 즉각 전면 해체 보존 처리를 시작했고, 2021년 말에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보존 처리 과정에서 병풍 뒷면에서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가 발견됐습니다. 그림이 무너지지 않게 그림 뒤에 덧대는 ‘배접지’로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를 활용한 것인데, 조사 결과 이 종이들은 1840년에 시행된 ‘식년감시초시’ 불합격자들의 답안지로 밝혀졌습니다.

‘식년감시초시’는 3년마다 치른 정기시험 식년시와 생원시, 진사시를 합쳐 부르는 용어입니다. 윤선영 고려대 한자 학문연구소 연구교수는 보고서에서 “과거시험 탈락자의 답안지인 ‘낙폭지’를 재활용해 제작했다.”라고 썼는데요.

윤 교수는 “시권의 글을 번역해 살펴본 결과, 다섯 가지 유교 경전인 오경 가운데 한 구절을 골라 대략적인 뜻을 물은 과목과 사서 중 의심이 가는 구절에 대해 질문한 과목의 답안지였다.”라며 “시권 27장 중 25장이 동일한 시험의 답안이었다.”라고 강조했는데요.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00년대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이미 재활용에 눈을 떴다는 점입니다. 합격자들의 답안지는 응시자에게 돌려주지만, 과거시험에 탈락한 이들의 시험지는 다시 돌려주지 않고 이를 재활용해 적재적소에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보존 처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과거시험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조선 500년을 가능케 한 선진제도였다고 평가하는데, 이 어렵디어려운 과거시험의 전설적인 스타가 한 명이 있습니다. 바로 5천 원권 지폐의 주인공, ‘율곡 이이’입니다.

현대 시대에는 공무원 시험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고, 외무나 행정고시 그리고 예전의 사법고시는 몇 년 동안 죽은 듯이 매달려야 간신히 통과할까 말까 한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그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율곡 이이는 과거시험에서 무려 9관왕을 차지했습니다. 문과 전 단계에서 수석을 차지했던 유일한 인물이죠.

문과 시험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초기 응시부터 최종 합격까지 총 9번의 시험을 거치게 됩니다. 우선 생원시를 치르게 되는데, 생원시는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로 나뉩니다. 이 두 단계를 통과하면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지고, 일정 기간 후 문과 시험을 치를 수 있죠. 문과 시험은 초장, 중장, 종장 등 3단계에 각각 초시와 복시가 있으므로 총 6번의 시험을 통과해야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 ‘전시’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9단계의 모든 시험에서 장원으로 통과한 인물이 바로 ‘율곡 이이’입니다. 29세에 관직에 올라 49세에 사망했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라는 명성과 함께 후대에 5천 원권의 인물로 그려지게 됐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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