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8시간을 날아가면 북태평양 한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섬 ‘하와이’에 도착합니다. 지상낙원이라고도 불리는 북태평양의 이 섬은 가장 가까운 미국 본토에서 3,862km 떨어져 있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가장 고립된 섬 중 하나죠.
총 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은 ‘빅 아일랜드’라는 별명을 가진 ‘하와이섬’인데, 그 별명에 걸맞게 다른 7개의 모든 섬을 합친 것보다 거의 2배나 큽니다. 그런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 하와이섬 구석에서 한글이 쓰인 비석들이 잔뜩 발견됐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조선이 개항을 시작하고 10년 뒤인 1886년 7월, 한 외국인이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을 밟습니다.
그의 이름은 ‘호머 헐버트’로, 아마 역사 이래로 한반도를 방문한 외국인 중 한민족을 가장 사랑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헐버트를 꼽을 수 있을 텐데, 그는 조선에 살며 늘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똑똑한 민족에게 제대로 된 교육 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세계에 우뚝 솟을 만한 잠재력이 충분하다.”라고 말이죠.
그가 우리 민족에 남긴 선물은 상당합니다. 외국인이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가 쓰는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 헐버트이고,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자고 제안한 인물도 헐버트이며, 미국에서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인물도 헐버트입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교과서를 쓴 인물도 헐버트입니다.
‘선비와 백성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민필지>를 집필했는데, 세계 지리, 제도, 천체를 자세히 기록한 161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교과서입니다. 단 한 글자의 한자도 없는 순수한 한글 교과서는 조선 땅을 밟은 지 4년도 지나지 않은 미국인 헐버트가 쓴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양반과 서민, 남녀 모두가 평등하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아는 모든 바깥 세계를 자세히 소개했는데, 이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그가 쓴 <사민필지>를 읽고 하와이 등 해외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등장했을 정도니까요.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조국에서 추방돼 강제적으로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단어였는데, 현재는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조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 한민족에도 디아스포라가 있는데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반강제적으로 발생했는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입니다. 이들은 어쩌다 이역만리 하와이로 떠나게 된 것일까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드러내면서 상당히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우리 조상들에게 이민을 떠오르게 만든 것은 1901년 함경도를 중심으로 덮친 대기근이었습니다. 부정부패에 타락한 정치인들로 가득 찬 정부는 백성들의 고난을 지탱해 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지 못했고, 결국 백성들은 살길을 찾아 이역만리 타지로 이민을 결심하게 되는데요.
하와이가 이민지로 떠오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역선이나 포경선의 기항지에 불과했던 하와이는 사탕수수가 생산되면서 전 세계 모든 노동력을 흡수했습니다. 원래 하와이 각 섬에 자생하던 사탕수수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와이에는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원주민 노동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자, 19세기 중반부터는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는데, 1852년, 중국인 293명이 처음으로 하와이로 이주한 후 약 5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사탕수수 재배를 책임졌습니다.
그러다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을 반대하는 소요가 있고 난 뒤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이 통과되면서 중국인이 급감하고 일본인 이민이 시작됩니다. 189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인 노동자는 8만 명을 찍은 후 급감합니다.
농장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파업으로 대항하다 다른 직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다급해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합니다.
1884년,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점차 조선의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계략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목적으로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고민 끝에 조선인들을 하와이로 보내고자 했고, 고종을 설득해 1902년, 이민원이 설립되는데요.
사실 처음 이민자 모집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불효였기 때문이죠.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알렌은 ‘인천 내리감리교회’의 ‘존슨’ 목사를 통해 하와이 이민을 추진했는데, 초기 이민을 주도한 이들이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하와이 초기 이민은 교회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어렵게 모집한 121명의 하와이 이민자는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 모여 상선 ‘갤릭호’를 타고 새 삶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한국을 떠난 121명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이를 통과한 조선인 102명이 1월 13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기 시작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우리 이민사,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작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매년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이라 하여 한국인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데, 이는 1903년 1월 13일,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가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을 기념하며 재미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끼친 지대한 공헌을 기리고자 제정되었습니다.
1903년 1월 13일, 갤릭선을 탄 최초의 이민자가 도착한 후부터 1905년 8월 8일, 몽골리아호까지 총 56회에 걸쳐 총 7,291명이 하와이로 이민했는데, 1905년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전체 노동자 48,229명 중 한국인이 4,683명을 차지했습니다.
노동은 고됐습니다. 사탕수수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관개시설을 설치해야 했고, 높은 고랑이 필요했으며, 많은 비료가 필요했습니다. 약 1,200평당 1톤의 비료를 뿌리는데, 그 무거운 비료는 기계의 힘이 아니라 노동자의 허리 힘으로 날라야 했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백인 감독들이 이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이민자들의 목에는 ‘방고’라는 번호표 목걸이가 달려 있었는데, ‘루나’라고 불리던 농장 관리인들은 말을 타고 가죽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늘 그들을 감시했습니다. 이름이 아닌 번호를 불러가면서 말이죠.
가죽을 꼬아 단단하게 만든 채찍은 조금이라도 허술해 보이는 짐승들의 등에 쏟아졌고, 뜨겁고 습한 하와이 땡볕 아래에서 아침 5시부터 오후 9시까지 혹사당하면서도 하루 30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쉴 수 없었는데요.
보통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현지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이민자들은 점차 농장주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너무 성실했기 때문에 또 다른 이민자들을 발생시켰습니다. ‘애니깽’이라고 불리던 멕시코 이민자입니다.
그런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개처럼 일했던 하와이 이민자들은 이역만리로 내몰렸음에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1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이를 십시일반 모아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는데요.
창원대학교는 지난 2019년부터 조사단을 파견해 하와이 현장에서 이민자 묘비를 찾고 탁본 및 신원 파악 등을 진행했는데, 그 결과 빅아일랜드 등지에서 총 155개의 묘비, 157명의 이민자를 찾아냈습니다. 묘비에는 고향, 종교, 직업, 나이, 가족 사항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들의 묘비에는 ‘대한인’, ‘조선인’ 등 빼앗긴 조국의 이름이 비석 전면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조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흔적도 확인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1909년 10월 26일, 만주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이 소식은 저 먼 하와이까지 전해졌고, 하와이의 여러 섬에 퍼져 있던 이민자들은 지원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의 <신한국보사>는 총 25페이지짜리 “대동위인 안중근 전”이라는 책자를 출간했는데, 이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 의거, 재판 경위를 포함해 그를 돕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던 하와이 이민자들의 활동상이 담겨 있습니다.
책에 따르면 1909년 12월부터 4개월 동안 한인 동포 1,595명이 최소 25센트부터 최대 10달러에 이르기까지 성금을 모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총 2,965달러 중 경비를 제외한 1,700달러가 블라디보스톡 공동회로 보내졌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아후섬에서 446명이 738달러 25센트를, 카우아이섬에서 478명이 1,126달러 70센트를, 마우이섬에서 236명이 439달러 20센트를, 하와이섬에서 435명이 616달러 85센트를 모았는데, 1,595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하와이 한인 전체 인구의 35%에 해당합니다.
종일 짐승처럼 일하며 번 피 같은 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에게 조국이 싫어 떠났다는 비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와이 이민자들은 10년 뒤 3.1 운동 때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3월 1일, 조선 땅에서 대대적인 3.1 만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전해진 직후 하와이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됐는데, 4월 2일, 첫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같은 해 6월 15일, 1,800명의 이민자는 한자리에 모여 조국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을 도울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당시 ‘대한부인구제회’라는 여성 독립운동 단체는 대한독립선언서 3,000장을 인쇄한 뒤 이를 팔아서 모은 2,000달러 중 1,500달러는 만세 운동 사상자를 위해, 500달러는 자신들이 모은 300달러를 더해 독립군에 직접 지원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은 사망 후 하와이에 묻혔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묘비가 조성되기는 했으나 상당수의 묘비는 아무도 찾지 않아 버려진 채 잊혀가고 있는데요. 비석을 쓸 돈이 없어 콘크리트로 만든 관 뚜껑에 쓴 묘비명을 보는 마음은 너무도 불편하기만 합니다.
부디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묘비를 되찾아올 수는 없더라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찾아내 깨끗하게 관리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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