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모아보기: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직지’를 찾다

  • 지식

한국이 세계 최초로 개발해 낸 것은 꽤나 많습니다. MP3라든지, 쿠션 팩트라든지, 반도체, 선박 등등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제품이 한국인의 손과 머리에서 태어났죠. 머리가 유별나게 똑똑했던 우리 조상들은 역사적으로도 세계사를 뒤바꿀 만한 획기적인 물건을 개발했었습니다. 당연히 세계사에 기록되었어야 했으나 불행한 침략과 침탈의 역사를 겪으며 한국이 만든 것인지조차 모르는 것들이 있죠. 그런데 한 한국 여인이 50여 년 전 당당히 세계인 앞에서 세계 최초임을 증명해 전 세계 전문가들의 말문이 꽉 막히게 만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1935년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최고로 꼽히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조선에서 건너왔다는 한 젊은이가 내미는 돈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자기 손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고려청자를 팔기 위해 2만 원이라는 최고가를 불렀는데 이 애송이 같은 젊은이가 덥석 물어버렸으니까요. 당시 2만 원은 현재 화폐로 대략 60억 원인데 조선에서 온 이 젊은이는 한치의 망설임이나 흥정도 없이 주머니에서 2만 원을 꺼내 물건값을 치렀습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조차도 너무 비싼 가격에 엄두도 내지 못했었던 매물입니다.

천 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를 날아오르는 듯한 한 폭의 그림과 함께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에서 아래로 굽어내리며 유려한 S자 곡선을 그리는 청초한 옥색 빛 도자기. 인류사 다시없을 최고의 보물이라 불리던 ‘청자 상감 운학 매병‘이라는 작품입니다. 세계 최고 도자기를 만들었던 고려 시대 작품이 다시 일본인에게서 한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는데요. 현재 이 고려청자는 서울 성북구의 ‘간송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국보 68호이기도 하죠. 이 젊은이는 간송 미술관이라는 사립 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입니다.

24살 어린 나이에 논 800만 평, 지금 돈으로 6천억 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그는 평생을 우리 조선이 잃어버린 문화재 수집에 바쳤습니다. 서울 성북구에는 간송 미술관이라는 사립 박물관이 있습니다. 단순한 사립 박물관으로 보이는 이 미술관에 ‘뭐 볼 것이 있을까’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입니다. 왜냐하면 이 박물관은 전형필이라는 인물이 개인의 자격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된 서와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해 모아둔 곳이니까요. 그가 그렇게 수집한 문화재가 전부 간송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38년 그가 직접 설립한 개인 박물관이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역사를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단순히 역사책을 달달 외워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우리 조상이 남긴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외국으로 유출됐다면 이를 되찾아 우리 땅으로 돌려오는 것이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군 이래로 한반도는 단 한 번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영토가 그리 크지도 않으니 한반도의 지리적인 이점에 군침 흘리던 수많은 국가가 한반도에 침략했고 문화재를 강탈해 갔습니다. 누구는 재미로, 누구는 실수로, 또 누구는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문화재를 빼앗아 갔죠.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유출 문화재는 대략 7만 4천 점으로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개인 소장용 유물까지 더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최소 10만 점은 될 것으로 추정되는 유출 문화재 중 1948년 이후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은 겨우 천 점입니다. 한국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돌아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1972년 파리에서 한 한국 여성 덕분에 세계사가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한 전시회에서 “한국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 금속 활자를 개발했고 그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면서 기존의 세계사를 뒤집어엎는 발언을 남긴 것이죠. 이날 이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했던 국가는 독일이 아닌 한국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이후 역사책이 다시 쓰이게 됐습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누구이며, ‘직지‘는 왜 그렇게 중요한 자료일까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기 바로 1년 전인 1999년,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 쓴 기고문에서 ‘지난 천년 중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사건은 1445~1455 사이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세를 발명했다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활자 인쇄를 발명한 것은 제3의 정보혁명으로, 그 이전 제1~2혁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인류의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 드러커도 틀렸습니다. 활자 인쇄술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아니라 고려시대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유수의 언론이 새천년을 앞두고 조사한 ‘위대한 발명품’ 중 금속활자 인쇄술이 항상 1위를 놓치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쇄술의 등장은 문명사의 대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니까요. 만약 인간이 인세가 아닌 직접 수기로 어떤 책을 필사했다면 그 안에는 인간의 손을 거친 흔적이 남습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이상 오탈자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책 한 권을 필사하기 위해 적어도 몇 주에서 몇 달은 소요됐을 것이고,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목판 인쇄술도 있지만 나무의 특성상 습기에 취약해 판이 뒤틀리면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오탈자의 발생 가능성도, 뒤틀릴 가능성도 제로에 수렴하기 때문에 대량 인쇄가 가능합니다. 기록하고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지식을 후대로 전해 줄 수 있다는 의미죠. 이렇게 전달된 지식이 새로운 지식과 융합해 인류가 발전해 온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현재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금속활자로부터 시작됐고, 이 금속활자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 드러커조차 구텐베르크라고 알고 있는 이 금속활자 인쇄술을 두고 한국이 세계 최초라는 사실을 알린 인물은 누구일까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2년 뒤 1955년 당시 한국은 전 국토가 폐허로 변해버려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를 캐 먹었고, 연료가 부족해 전국의 모든 산이 대머리로 변했을 만큼 처참했습니다. 아이들은 길거리를 다니며 먹을 것을 구걸하는 처지였죠.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병선 박사는 1950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어렵게 졸업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큰오빠는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비밀리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 지원하는 자금책이었는데요. 사학과를 졸업한 후 그녀는 프랑스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는 말을 전해 들은 그녀의 은사 이병도 선생은 그녀를 불러 신신당부합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강화해서 약탈해 간 물품의 행방을 찾으라“라고 말이죠. 그녀는 가난한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스승의 이 한마디에 프랑스 유학이 숙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약탈당한 한국 문화재를 찾아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죠. 1945년 해방 후 첫 프랑스 유학생이던 그녀는 프랑스에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 한국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동시에 그녀는 학문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보였고,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거의 모든 책을 섭렵해 나갔습니다. 그녀의 잦은 출입은 도서관 직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녀에게 파리 국립도서관 특별 연구원이라는 직책을 내리기에 이르죠. 한국인 최초로 파리 국립도서관의 연구원으로 채용된 겁니다. 당시 유네스코가 자리 잡고 있던 파리에는 1972년을 ‘세계 도서의 해’로 기념하고 세계 각국에 고서를 전시하고자 ‘Books‘라는 전시회를 계획합니다. 파리 국립박물관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수없이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고 언어권별로 책을 선별하고 분류할 책임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박병선 박사가 눈에 띄었고 그녀를 한자 문화권인 동양을 담당할 실무자로 채용한 것이죠. 그렇게 책 분류를 시작하던 중 그녀는 마땅한 한국어책이 없어 도서관 창고를 뒤지다 구석에 먼지 묻은 작은 책을 찾아냅니다. 책 표지에는 ‘직지 하(下)‘라고 쓰여 있었는데, 한자로 쓰여 있었던 까닭에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중국 책으로 알고 있었죠. 책 전체 제목은 ‘백운화상 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펼치고 마지막 페이지를 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간행 기록이 남아 있었던 그 페이지에는 ‘이 책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녀는 이 책을 보는 순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1377년 고려 우왕 시절 불교의 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요약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는 대한제국 시절 어이없게도 프랑스에 헐값에 팔렸다고 알려져 있었는데요. 그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프랑스는 이 책의 가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도서관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었죠. 그녀는 이 사실을 즉시 모든 이들에게 알렸지만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70년 이상 앞서기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뀌는 것이니까요.

그 의심을 사실로 바꾸기 위해 그녀는 인쇄술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인쇄술과 관련된 책자는 있어도 한국 인쇄술과 관련된 자료는 전무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내 대장간을 돌며 금속 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수년간의 난관을 이겨내고 그녀는 마침내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해냅니다. 그리고 이 성과는 1972년 ‘Books’ 전시회, 그리고 유럽에서 개최된 ‘동양학 학자 대회’에서 발표하게 되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럽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제껏 역사상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사용한 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라고 알고 있었지만 동양의 코딱지만 나라가 그보다 70년이나 앞섰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녀는 동양 여인의 뭘 알겠느냐는 비아냥과 멸시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임이 유네스코에 의해 인정됩니다.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서적 전문가 마리 로즈세규이는 한국이 구텐베르크보다 75년가량이나 앞서 금속 활자 인쇄 수를 창안, 실용화한 것은 세계 문화사에서 중요한 새 사실이라고 말하며 이번 국제전을 계기로 모든 세계의 문헌, 교과서, 백과사전을 정정토록 통보, 조처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정식 보도되면서 전 세계 모든 문서가 ‘1452~1456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출간된 42행 성서가 아닌 1377년 한국의 고려 시대에 출간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이다’라고 정정했습니다. 그리고 유네스코는 2001년 9월 4일 직지를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시켰죠. 그만큼 유네스코도 세계 인쇄술 역사에서 직지를 가장 중요한 자료로 보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기 때문이죠. 지난 1997년,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서양의 많은 언론은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 100대 사건’을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건과 인물 100가지’라는 책자가 발간됐는데요. 이 책 역시 금속활자 인쇄를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꼽았습니다.

그리고는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가 세계 최초로 만들지 않았다. 이미 한국에서 14세기에 금속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55년 그녀가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한국인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전쟁 이후 민간인 중 여권 번호 1번이 박병선 박사라고 하니, 얼마나 드문 일인지 감이 오시죠. 그랬기 때문일까요. 박병선 박사는 국가가 힘들고 어려운 와중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직지를 찾아내고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1920년 5월부터 1921년 6월까지 발간했던 불어판 잡지 ‘자유한국‘을 전부 찾아냈죠. 그녀의 운명이 그러한 곳에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요?

오늘은 빼앗긴 도서를 찾기 위해 프랑스에서 온 힘을 다한 박병선 박사님에게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 영상에서는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발견했을 당시 전 세계의 반응, 그리고 그녀가 발견했던 ‘외규장각 의궤’가 잠시나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