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빈 김 씨는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의 후궁으로, 노비 출신에서 후궁 중 최고의 위치인 빈에 오른 조선판 신데렐라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신빈 김 씨는 현재의 조달청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내자시 소속의 공노비였지만, 수많은 물의를 일으킨 세자 이제(양녕대군)가 폐위되어 대궐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새롭게 세자와 세자빈이 될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과 삼한국대부인(소헌왕후)을 모시게 될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면서 태종비 원경왕후는 직접 나서서 많은 궁녀를 뽑게 되었고, 이때 신빈 김 씨가 13세의 나이로 세자궁 궁인으로 선발됩니다.
선발된 궁녀들은 엄격한 수련 과정을 거쳐 배치되었는데, 이중 신빈은 성적이 우수하고 행실이 발랐기에 세자빈에 오른 소헌왕후의 지밀나인이 됩니다. 지밀나인이란 최상위 등급의 궁녀로, 항시 지근거리에서 왕과 왕비를 모시는 직책이었습니다.
이후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를 선언한 뒤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자가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이었습니다. 당시 만삭의 몸으로 즉위식을 했던 소헌왕후는 얼마 후 3남인 안평대군을 낳게 됩니다. 재위 원년에 새로운 왕자의 탄생에 왕실 어른들은 기뻐했지만, 연년생 아우를 본 둘째 왕자는 모든 관심이 동생에게 쏠리자 몹시 외로워했습니다.
이때 새로 들어온 13세의 궁녀가 그를 안아주고 얼러주며 업어 키우게 되었는데, 훗날, 이 이야기를 듣게 된 둘째 왕자는 이 일을 아름답게 여겨 평생 잊지 않고 그 궁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우대하였습니다. 바로 그 궁녀가 신빈 김 씨이고, 이때 둘째 왕자가 수양대군(세조)입니다.
같은 해 겨울, 외척을 극도로 경계한 상왕 태종에 의해 소헌왕후의 친정이 멸문당하게 되고, 죄인의 딸이란 이유로 폐비가 될 위기에 처하며 왕비는 생애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때 신빈 김 씨는 궁녀로서 소헌왕후를 모시면서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 줍니다.
세종은 왕비를 매우 사랑했기에 그녀의 폐위를 끝까지 막았고, 상왕 태종도 적통 왕자를 3명이나 낳은 소헌왕후를 내치지 않는 선에서 외척에 대한 숙청을 마무리 짓게 됩니다.
이후 소헌왕후는 아픔을 딛고 세종과의 금슬을 자랑하며 5명의 왕자를 더 출산하였으며, 특유의 자애로운 성격과 강단 있는 모습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내명부를 만들게 됩니다.
신빈 김 씨는 궁녀 시절부터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상전인 소헌왕후에게 사랑을 받았고, 이를 눈여겨본 세종 역시 그녀를 아끼게 되면서 결국 신빈 김 씨는 21살의 나이에 승은을 입고 왕의 후궁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그녀는 고대하던 첫 번째 아들 계양군을 출산하였고, 연년생으로 차남 의창군까지 낳게 되면서 정 3품 소용에 오르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2년 후에 3남 밀성군을 낳게 되었는데, 마침 그해에 소헌왕후도 8번째 왕자인 막내 영응대군을 낳게 되면서 소헌왕후는 신빈에게 영응대군의 양육을 맡기게 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신빈은 자신이 키운 영응대군의 사저에서 한때 같이 살게 됩니다.
참고로 세종은 총 18남 4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그중 소헌왕후가 8남 2녀, 신빈 김 씨가 6남 2녀였습니다.
1432년 신빈 김 씨는 소헌왕후를 도와 내명부를 잘 이끌고 왕자를 많이 둔 공으로 종 2품 숙의의 첩지를 받습니다. 이렇게 품계가 올라가게 되었지만, 그녀는 더욱 자신을 낮추고 성심껏 왕과 왕비를 모시니 세종은 그 모습에 더욱더 그녀를 아껴 다음 해 곧바로 정 2품 소의에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녀가 34세에 막내아들인 담양군을 낳으니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왕실에 크게 기여하고 변함없이 임금을 보필한 공으로 그녀를 빈으로 봉하려 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품계 상승이 너무 빠르다고 간언하자, 차차 빈에 올리기로 하고 종1품 귀인에 봉하게 됩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함께 왕실 자손들의 적자와 서자의 대우에 차별을 두지 않고 두루두루 서운하지 않도록 잘 다스렸으며, 이에 후궁들도 윗전을 잘 모시고 사이좋게 지내니, 이 당시야말로 조선시대 통틀어 가장 화목하고 안정적인 왕실이었습니다.
1441년, 드디어 세자에게서 고대하던 세손이 태어나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은 잠시, 세자빈 권 씨가 단종을 낳고 이틀 후 산후병으로 죽게 되고, 1444년, 세종의 5남 광평대군마저 2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죽자 왕과 왕후는 상심하여 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6남 평원대군까지 19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임금 내외는 몸져눕게 되었고, 결국 1446년, 소헌왕후는 회복하지 못하고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연달아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극도로 상심한 세종은 대신들이 새롭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여러 번 주청했지만 거절하고, 정사도 세자에게 맡길 정도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왕후가 죽은 다음 해인 1447년, 신빈 김 씨는 42세의 나이로 후궁 중 최고 품계인 정1품 신빈의 작호를 받게 되는데, 작호의 뜻은 삼가고 근신할 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1448년, 왕실에서는 죽은 가족들의 명복과 자신들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에 심취하게 되고, 궁궐에 내불당까지 설치하자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됩니다.
한편 세종은 소헌왕후 소생 막내 왕자인 영응대군을 몹시 사랑하여 사저로 내보내지 않고 대궐에서 데리고 살았는데, 왕자가 장성해 더 이상 궁에 있을 수 없자 안국방 민가 6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헐어낸 다음 동별궁을 지어 대군의 사저로 주고, 그를 양육했던 신빈 김 씨를 모시고 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50년, 건강이 더욱 나빠진 세종은 자신이 사랑하는 신빈 김 씨와 영응대군이 살고 있는 동별궁으로 피접을 나가게 됩니다. 이때 신빈 김 씨는 세종에게 평생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갚기 위해 직접 밤낮으로 그를 간호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종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1450년, 영응대군의 사저에서 54세의 나이로 승하하게 됩니다.
이렇게 신빈이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 그녀의 막내아들 담양군마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지나쳐 병을 얻게 되고, 세종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12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됩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신빈 김 씨는 세종의 국장이 마무리되자 자수궁에 이주하여 머리를 삭발하고 임금과 죽은 왕실 가족에 대한 명복을 빌면서 살게 됩니다. 자수궁은 세종 후궁들의 말년을 위해 문종이 지은 별궁으로, 머물던 왕실 여인들이 대부분 불교에 심취했기에 정업원과 더불어 점차 비구니들이 모여있는 사찰로 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후 신빈 김 씨는 죽을 때까지인 14년 동안 세상에 관여하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자수궁에 들어간 지 2년 후 신빈 김 씨의 자식들은 어머니를 모시게 해달라고 문종에게 간청하였고, 이에 문종은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을 허락했으나 그녀는 거절하게 됩니다.
뒤이어 단종 때에도 여러 번 출궁을 권유하였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고, 세조가 즉위한 뒤에는 특별히 기거할 저택까지 하사하였으나 끝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어렸을 때 자신을 기른 신빈 김 씨와 그의 아들들을 우대하게 되고, 그녀의 자식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세조를 따르게 됩니다. 이후 자연스레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힘을 보탠 신빈 김 씨의 아들들은 공신이 되어 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지만, 그녀는 그것을 같이 나누지 않고 말없이 자수궁에 머무르게 됩니다.
말년에 신빈은 몸이 좋지 않아서 온천을 자주 다녔는데, 세조는 그녀가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라고 특별히 관찰사에게 명하게 됩니다.
이후 아들들의 비행과 죽음이 잇달면서 크게 상심한 신빈 김 씨는 병석에 눕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세조가 친히 자수궁으로 문병을 가고 탕약을 보내게 되지만, 결국 1464년, 맏아들 계양군이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신빈 김 씨는 59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됩니다.
세조는 예법대로 쌀과 콩 70석을 내려주었고, 남은 아들들과 신빈의 손자들을 보살피게 됩니다.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으며, 1994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됩니다. 세종의 후궁 중 후손이 가장 번창해서인지 그녀의 묘역은 후궁의 묘치고 상당히 큰 편이며, 현재에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관리 중입니다.
신빈 김 씨는 공노비에서 세종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어 정점인 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지만,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며 왕과 왕실을 위해 평생을 힘쓰게 됩니다. 이러한 신빈의 노력이 세종에게 많은 힘이 되었기에 그의 훌륭한 치세에 하나의 작은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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