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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옆나라들이 벌벌 떨던 해적왕이 있었다.

현재 한국의 치안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안전함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에서도 무법자들이 있었기 마련인데요. 한국 땅에 존재했던 무법자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해적입니다. 해적은 사실 왜구나 서양권의 해적들이 유명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해적 만화의 캐릭터 대부분이 그 지역의 인물을 본 따 만들었습니다. 해적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기 마련인데요. 신라구 또는 신라 해적이라고 부르는 신라의 해적 집단이 있었는데 대마도나 규슈 등지에 출몰하여 공물을 운반하던 배를 약탈하고 바닷가에 상륙해 일본의 관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한 집단이라고 합니다.

신라 내의 생활적인 곤경에 직면한 백성들이 살길을 찾으려 약탈했다는 것인데 일본의 신라에 대한 인식을 상당히 나쁘게 만들었던 집단이라고 합니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고, 내부적인 상황도 좋지 않아 매년 흉년이 들어 산으로 기어 들어가면 도적이 되고, 바다로 뛰어들면 해적이 된 것이었죠. 왜구와 신라의 마찰이 있던 지역이었기에 신라는 신라구를 활용해 일본을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신라와 일본의 앞바다는 신라구가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세력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해적의 사례를 보면 뒷배가 든든한 경우가 있는데 신라구의 뒷배는 지방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세력인 호족이 뒷배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당시 동북아시아 무역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신라의 앞바다는 털어먹을 게 많았기에 큰 이득을 취하기 좋았다고 합니다.

고대 일본은 신라의 대규모 정벌과 신라구의 약탈에 항상 두려움을 떨었고 수많은 사례로 많은 일본인이 납치되고 세상을 떠났죠. 811년 12월에는 신라인 110명이 5척의 배로 고지마시카를 침공해 9명의 숨을 끊었고 100명의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가 정말 많았다고 하는데 장보고가 해적 소탕에 나서기 전까지는 바다로 나가기가 벌벌 떨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고 하죠.

그렇기에 일본이 신라와의 교역을 끊었던 적도 있는데 장보고의 등장으로 많은 신라구가 소탕되었고 잠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해적들의 움직임은 찾기 힘들 정도로 쇠퇴했다고 합니다.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한국에도 악명 높은 해적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기에 다뤄 보았습니다.

두 번째, 검계입니다. 말 그대로 검을 차고 다니는 조직인데 조선 후기의 폭력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숙종 때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무리를 모을 때 진입 장벽이 높지 않아 아무나 받았는데, 선악을 보지 않은 결과 소란을 피우고 폭력을 휘두르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검을 차고 다니는 이유는 칼질하기 위함일 것인데 패악한 성향이 짙은 조직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검계를 검거하여 포도청에 잡아넣었는데 자신의 칼로 자기 살을 깎고 가슴을 배기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하죠. 검계의 주된 일은 사람 패는 것은 기본이며, 명줄을 끊어 놓기도 하고, 약탈과 여자를 건드는 등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모조리 하고 다니는 집단이었습니다. 일처리의 대부분을 폭력으로 해결하며 몸에는 칼자국이나 칼로 긋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존재하는데, 현대 사회의 건달들이 전신을 따야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맥락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낮에는 자고 밤에 돌아다니는 생활 방식을 보였다고 하는데, 밤에 약탈하고 그 돈으로 술을 무척 퍼마셨다고 하죠. 무력으로 돈을 긁어모으며 밤에는 여자 끼고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 현대의 건달들과 상당히 흡사하여 건달의 뿌리를 타고 내려가 보면 검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검계 무리는 40~60명이 한 단위가 되며 움직였는데 주민들의 개와 돼지, 닭을 말도 없이 잡아먹거나 하는 것을 보면 말이 통할 집단은 아닌 것으로 간주하였죠. 그러나 지방의 다른 집단과 연계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고 타파하기가 어려워 잡아놓으면 다시 생기고 하기를 반복했습니다. 19세기 초까지 검계의 활동은 지속되었다고 하는데 결국에는 이름만 바뀐 검계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듯합니다.

세 번째, 백백교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큰 사건입니다. 백백교는 전정운이라는 인물이 1900년 금강산에서 도를 닦고 평안남도 영변군에서 창시한 백도교를 근간으로 두고 있습니다. 전정훈을 60여 명의 여자와 방탕한 생활을 하고 그 생활을 교인들의 재산을 갈취함으로 유지했습니다. 전정운이 1919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인천교, 백백교, 도하교로 분열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전용해가 창시한 것이 백백교입니다.

그들은 말장난 같은 주문을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백백교는 신도들의 재산 상납을 요구했고 딸을 자신의 시녀로 바치게 하였는데 몹쓸 짓이 동반되었죠. 교주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현실을 깨닫는 신도들은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렸는데 그로 인해 백백교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전용해는 자신은 미래에 천위에 등극할 인물이므로 현재는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반드시 자신을 통해 독립될 것이니 헌금과 딸을 바치도록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를 비롯한 간부들은 전국에서 80여 회에 걸쳐 신도 300여 명이 세상을 떠나게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일본 경찰들에게 소식이 전해지며 수사가 시작되었고 경찰에 쫓기는 전용해는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고, 전용해와 함께 몹쓸 짓을 저지른 간부들이 체포되어 백백교는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살기 힘들고 위험했던 그 시절에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사기를 친 사이비 교주 전용해는 아직도 회자되는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무법자는 존재했듯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이런 집단들이 존재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땅에 존재했던 무법자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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